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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렁에 빠진 일본…노구교 사건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7.07.07 04:22:531937년 7월 7일 밤 10시 40분, 중국 베이징시 외곽 노구교(루거우차오·盧溝橋). 몇 발의 총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마침 중일 양국군의 긴장이 고조된 상태였다.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이 중국 측과 사전 협의도 없이 6일부터 노구교 동북쪽 황무지에서 실탄 사격이 포함된 훈련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총성에 놀란 일본군 중대장은 급히 병사들을 모았으나 이등병 하나가 나타나지 않았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채 엉뚱한 보고가 올라갔다. ‘중국군, 노구교에서 소규모 선제공격, 아군 병사 1명 실종.’일본군은 실종 병사 수색에 나섰으나 찾을 수 없었다. 당연했다. 실종 병사는 이미 돌아왔으니까. 설사 때문에 20분간 대열을 이탈해 복귀한 이등병을 포함한 전 중대원들은 두 시간 동안 어둠 속에 헛수고한 셈이다. 중대장은 추궁이 두려워 병사를 찾았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상부에 보고했다. 대대장을 거쳐 ‘중국군의 공격과 실종 보고’를 접한 연대장은 중국 측과 교섭하는 동시에 전투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의 요구로 열린 한밤중의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중국 측은 실종된 일본군 병사 수색에 나섰다. 아무리 찾아봐야 없는 일본군 실종자가 발견될 턱이 없었다. 일본군은 실종 병사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늦게 중국 측에 알리면서 억지를 부렸다. ‘실종 병사가 돌아왔으니, 실종과 총성의 원인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귀측 지역을 수색하겠다’는 일본군의 주장에 중국 측은 ‘총성은 듣지 못했고 실종 원인은 해당 병사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라며 되받았다. 이때까지는 의문의 총성과 실종 소동이 작은 우발사건으로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8일 새벽 4시 50분,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중국군도 대응에 나섰지만 노구교 일대를 빼앗겼다. 사흘간 지속한 노구교 사건(중국에서는 7.7사변으로 통칭)의 피해는 불분명하다. 양측 사상자가 중국군 80여 명에 일본군 수십 명이 정설인 가운데 중국과 일본, 서구의 기록이 제각각이다. 분명한 사실은 노구교 사건의 후폭풍이 컸다는 점. 전투가 중지된 상태에 벌어진 정전 교섭에서 일본군은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베이징 시내 반일단체를 일소하고, 국민당이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지며 중국군 고위 장교들이 사과하라는 정전 조건을 둘러싸고 현지에서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은 전선 확대라는 더 큰 그림을 그렸다. 일본은 노구교 사건이 ‘중국의 계획적인 공격’이라고 규정하고 조선군과 관동군을 보냈다. 일본 육군 지휘부는 약 6,000여 명인 중국 주둔군에 ‘3개 사단을 증파하면 석 달 안에 중국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중국도 여기에 정면으로 맞섰다. ‘친일’이라고 공박 당할 만큼 일본에 유화적인 자세를 보여왔던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도 이번만큼은 달랐다. 7월 12일 장제스는 장시성 노산(盧山)에 중국의 주요인사 150여 명을 불러 모아 닷새간 대책을 논의한 끝에 ‘노산 담화’를 발표했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 민족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중국인들은 철저히 희생하고 철저히 항전할 뿐이다.’ 일본과 전쟁을 선택한 장제스의 결의는 세계로 퍼졌다. 최근에는 세계 2차대전 발발 시점을 독일이 폴란드를 전격 침공한 1939년 9월이 아니라, 노구교 사건 발발 시점인 1937년 7월로 당겨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물론 중국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주장이다. 일본과 중국이 전면전을 마다치 않은 데에는 둘 다 사정이 있다. 먼저 일본은 두 가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만주 지역을 빼앗아 괴뢰 만주국을 세웠지만, 욕심에 안 찼다. 허베이 지방 군벌들을 부추겨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킨 이유도 중국 북부만큼은 완전히 장악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됐다. 만주와 중국 북부를 잇는 거대 산업·군사 기지를 건설, 소련에 대항하려는 요량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도 전면전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가토 요코(加藤 陽子) 도쿄대 교수의 저서 ‘근대 일본의 전쟁 논리’에 따르면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일본군의 피습 자작극으로 발단) 이래 감소 일로를 걷고 있는 대중 무역에 불만이 컸다.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던 입장에서 중국을 일본의 경제권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반대로 중국은 일본의 시장 침탈과 군사적 침략이 계속되는 한 부국강병의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봤다. 마침 시안사건으로 국민당군과 공산군이 싸움을 멈추고 일본의 침탈에 공동 대응할 것이라는 중국 국민들의 기대가 높았다는 점도 장제스가 대일 전면전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장제스에게는 나름대로 해볼 만하다는 자신도 없지 않았다. 중국군은 이전의 중국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세찬 국방대 교수가 쓴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 군사전략’에 따르면 중일전쟁 직전 중일 양국의 육군 병력은 200만 명 대 38만 명. 해군은 120척 총배수량 6.8만t 대 285척 총배수랑 115만t으로 일본이 압도적 우세를 점했다. 공군도 600여 대와 1,600여 대로 차이가 컸다. 병력만 많았지 무장과 훈련은 떨어진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지만 장제스는 내심 독일식 사단 등 증강된 국민당군의 전력도 만만치 않다고 믿었다. 히틀러의 독일과 군사협력으로 30개 사단을 독일 육군처럼 개편한다는 계획을 완성 못 하고 8개 사단만 편제와 장비 보급을 마쳤어도 이전 전력보다는 훨씬 강했다. 충분히 보급이 안 됐을 뿐이지 개인화기와 경기관총, 박격포의 성능은 오히려 중국군이 일본군을 앞섰다. 독일제 Gew 88 소총을 면허 생산한 한양식 소총과 kar98k의 면허 생산형인 중정식 소총은 일본군의 38식 소총보다 우위였다.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북벌 과정을 거치며 쌓은 전투 경험에 신형 장비도 갖췄다. 예산 사정이 빠듯한 가운데서도 국방 투자를 늘려 체코제 경기관총과 프랑스제 박격포 등을 자체생산하고 5개 항공기 제조창에서도 국산 항공기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중국군 내부에서조차 일본군 1개 사단의 전투력이 최소한 중국군 4개 사단 이상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과거보다 사기와 실력이 향상된 점은 사실이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게릴라전에 능한 홍군(공산군)까지 국민당군의 제 8로군으로 편입되며 중국군의 전력은 과거보다 강해졌다. 막상 뚜껑을 연 결과는 예상을 절반쯤 빗나갔다. 파죽지세의 일본군은 8월 29일 베이징을, 이튿날 텐진을 점령했다. 허베이 지방도 일본군이 휩쓸었다. 하지만 중국군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독일식 사단을 비롯한 국방 투자와 혁신이 8월 중순부터 두 달간 이어진 상하이 공방전에서 위력을 나타냈다. 일본은 속속 신규 병력을 투입하고 해군 함정의 무차별 함포 사격을 퍼부은 끝에 막대한 인명 손실을 안고 가까스로 상하이에 입성할 수 있었다. 1937년 12월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진격이 늦어졌던 분풀이를 무고한 양민에게 풀었다. 남녀노소 30만 명을 죽이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학살인 난징 대학살이 전쟁의 광기 속에 일어났다. 일본군은 호언장담한 대로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으나 그것은 거대한 수렁이었다. 장제스의 말대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장제스는 일본군에게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얻었다.’ 장기 지구전으로 들어간 것이다. 일본군은 연인원 410만 명을 동원하고도 중국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미국의 경제 보복이 시작돼 더욱 궁지에 몰렸다. 국민당군과 팔로군은 가끔 대승을 거두며 중국인들의 저항의식을 북돋았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 압박으로 중국을 지원하다가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을 당한 뒤부터는 보다 적극적으로 도왔다. 미국이 ‘병기 제조창’으로 전 세계 연합국에 무기와 군수품, 식량을 지원한 ‘무기대여법’의 혜택이 중국에게도 돌아갔다. 36개 국에 제공된 약 484억 달러(비숙련공 임금상승을 기준 삼았을 때 요즘 가치 약 1조 4,600억 달러에 해당) 규모의 무기와 물자 가운데 영국, 소련, 자유프랑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16억 2,700만 달러(요즘 가지 약 490억 달러) 어치를 지원받았다. 국민당 군대의 희생도 컸다. 권성욱 군사 칼럼니스트의 역저 ‘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에 따르면 8년 동안 전쟁을 치르며 국민당군은 소장급 이상 고위장성만 206명을 잃었다(반면 팔로군은 참모장 1명과 연대장 5명을 잃은 게 전부다). 중일전쟁에서 승리하는 동안 중국 국민 역시 크나큰 고통을 당했다. 인명 피해는 말할 것도 없다. 중국군 전사자 320만 명, 부상 159만 7,000여 명에 민간인 사상자와 피난민 1,700만 명이라는 피해를 입었으니까. 국민들의 살림살이도 말이 아니었다. 군수품 최우선 보급 원칙 아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1937년 소 두 마리를 살 수 있었던 100위안의 가치가 1939년에는 돼지 한 마리, 1941년 밀가루 한 포대, 1943년에는 닭 한 마리로 줄더니, 1945년에는 달걀 두 알, 1947년에는 조개탄 하나, 1949년에는 휴지 한 장으로 떨어졌다. 중국이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51개 회원국으로 출범한 국제연합(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 미국, 소련, 영국에 이어 4번째로 상임이사국 지위에 오른 것도 것도 이런 희생과 공로를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최종적으로 2차 세계대전 승리를 결정지은 것은 미국이지만, 태평양전쟁이 없다고 치더라도 일본은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중국이 일본군의 절반을 묶어두지 않았다면 판세와 전황이 어떻게 흘렀을지 아무도 모른다. 중국에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중일전쟁의 도화선인 노구교 사건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후 질서를 결정하는 분기점의 하나였던 셈이다. 노구교 사건 발발 80 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당사자들의 위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중국은 세계 2위로 갈수록 입김이 강해지고 있다. 중일전쟁에서만 105만 5,000여 명 전사자와 117만 2,200여 명의 부상자를 내며 패전했던 일본 역시 되살아났다. 어쩌면 둘은 바뀐 게 없을지도 모른다. ‘인류의 공생 발전을 위해 민족이라는 편협에서 벗어나라’고 강조하는 일본의 세계적인 문예비평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지난 2013년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탈원전 운동과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격화하던 시기에 국면전환을 꾀하던 일본 정부는 센카쿠열도 국유화를 선언했다. 바로 그날이 2012년 7월 7일이었다. 상대를 일부러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고, 결국 그대로 됐다.” 노구교 사건 75주년에 맞춰 도발했다는 얘기다. 바뀐 것도 있다. 중국의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 같아 보인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움의 90%를 맡았다’고 강변하던 중국은 몇 년 전부터 국민당군의 공로를 일부나마 인정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 승리와 2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하는 자리였던 지난 2015년 전승절 70주년 행사에서는 노병(老兵)들의 퍼레이드에 국민당 출신들을 포함시켰다. 이념을 떠나 중국을 대표하겠다는 자신감의 발로로 보인다. 중국을 보며 우리를 생각한다. 중일전쟁에 공헌했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좌익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애써 잊혀진’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그 부대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하면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한반도의 시계만 멈춘 채 일본인들의 편협성은 그대로인 것 같다. 씁쓸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열려라 참깨' vs '닫혀라 참깨'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27 06:00:00인도와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탄자니아, 부르키나파소. 참깨 수출 1~5위 국가다. 하나 같이 기계보다 사람의 노동력이 더 싼 나라들이다. 다시 말하면 참깨는 가난한 나라들의 주력 농산물이라는 얘기다. 당연하다. 기계화가 어려우니까. 수입국 순위는 중국과 일본, 터키, 한국, 이스라엘. 주요 무역품목 중에서 531번째 품목이라는 참깨의 세계시장 규모는 약 32억 달러 남짓하다. 금액과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참깨(정확하게는 참깨 씨앗) 시장은 성장 산업이다. 중국의 수요 증가 때문이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수출 1, 2위를 오가던 중국은 세계 수입액의 35%를 차지할 정도로 수요가 커졌다.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도 공급이 따라갈 수 있을까. 가능하다. 참깨 생산이 늘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변수가 대기 중이다. 첫째는 품종 개량.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과 중국, 인도, 일본에서 다수확 품종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두 번째는 참깨 농업의 완전 기계화. 참깨 수확에는 사람 손이 많이 간다지만 미국의 정책이 변수다.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연간 420만톤인 세계 참깨 생산량은 몇 곱절 늘어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열려라 참깨’가 ‘닫혀라 참깨’로 바뀌고 있는 까닭이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보물 창고를 여는 암호인 ‘열려라 참깨’는 허구 속의 단순한 설정이 아니다. ‘열려라 참깨’라는 표현에는 참깨의 특성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일년생 풀인 참깨는 수확기에 접어들면 꼬투리의 아래 부분부터 벌어진다. 참깨 씨앗이 땅에 떨어져 못 먹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했다. 드넓은 목화밭 주변이 온통 참깨였으나 수확기가 목화와 겹쳐 참깨 씨를 건지려 노동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결국 90%는 땅에 떨어지고 꼬투리에 남은 10%에서 일부만 채취하는 게 미국의 참깨 농사였다. 노예해방으로 흑인 노예가 사라진 뒤부터 참깨 수확은 더욱 어려워졌다. 변화가 찾아온 것은 세계 2차대전 직후. 획기적인 신품종이 나왔다. 수확기에도 꼬투리가 벌어지지 않는 품종을 개발한 것이다. 신품종 개발의 주인공은 미국인 데랄드 랭험(Derald G. Langham) 박사. 돌연변이종을 1946년 새 품종으로 발전시켰다. 개과(開果·dehiscent)작물이던 참깨는 폐과(閉果ㆍnon-dehiscent) 작물의 특성을 동시에 갖게 됐다. 참깨의 종류가 ‘열려라 참깨(開果, dehiscent, 脫粒도 같은 뜻)’ 일색에서 ‘닫혀라 참깨(閉果, non-dehiscent, 耐脫粒)’로 양분되며 미국의 참깨 농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로이 앤더슨과 제임스 앤더슨 형제는 신품종에 주목해 1952년 텍사스주 달라스시 인근 파리카운티에 참깨농장과 유통회사를 차리고 참깨 크래커와 칩, 마가린, 햄버거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햄버거에 깨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앤더슨 형제는 참깨 사업에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나 인종차별 없이 고용하고 종업원 자녀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한 기업가로 기억된다.* 미국이 보유한 ‘닫혀라 참깨’ 품종의 기술은 철옹성이다. 꼬투리가 벌어지지 않아 참깨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 품종의 기술 제공에 극히 인색하다. 빈민 구제와 기아 해소에 관심이 많았던 랭험 박사**는 1991년 5월 27일 타개하기 전까지 외국에 기술을 어렵지 않게 전수해줬으나 이제 상황이 변했다. 관련 특허를 갖고 있는 세사코(SESACO)를 일본 미쓰비시가 인수한 뒤로는 이런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 꾸준한 기술 개발로 세사코가 보유한 최신 ‘닫혀라 참깨’종은 줄기가 강하고 키도 커 콤바인으로 수확에서 탈곡, 포장까지 단 한 번의 작업으로 끝난다. 한국에 비해 노동 생산성이 30배에 이른다. 국내에서도 오래전 미국의 기술 지원을 받아 ‘닫혀라 참깨’종인 ‘새품깨’를 개발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습도가 높아 줄기가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광활한 땅과 우수한 품종, 기계화까지 완벽하게 이룬 미국이 본격적으로 뛰어들면 세계 참깨시장의 변동은 시간 문제다. 한국의 참깨 농업은 기로를 맞고 있다. 지난 1987년 한때 완전 자급자족을 이룩했으나 점점 수입이 늘어나 자급률이 10% 안팎으로 떨어졌다. 국산 참깨의 우수성에 기대어 시장을 겨우 유지하고 있으나 미래는 불확실하다. 우수한 품종을 개발하려는 극소수 농생물 과학자들의 연구가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한 국산 참깨를 구하지 못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과연 품종 개량과 대규모 기업농이 인류에게 도움인지 재앙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닫혀라 참깨’ 품종으로 무장한 외국 농산물 회사들이 국내 시장을 향해 ‘열려라 참깨’를 외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점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앤더슨 형제는 파리카운티 교외에 땅을 사들여 종업원 자녀를 위한 유아원과 유치원 등 교육시설에 투자하고 ‘참깨 거리(Sesame Street)’라는 이름을 붙였다. 1969년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의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됐다. 파리카운티에는 아직도 세서미 스트리트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나 정작 극중 세서미 스트리트의 주소는 맨해튼 123가(街)다. ** 미국 록펠러 재단이 베네수엘라에 파견한 농업지도관이었던 랭험 박사는 베네수엘라에 10여년간 머물며 농업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린 공로로 유명하다. ‘베네수엘라 현대 농업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그는 생전에 한국 등 제 3세계 국가들에게 ‘닫혀라 참깨’ 품종과 관련된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그의 유업인 참깨 회사를 일본계 자본이 인수하며 꽉 막혀 버렸다지만. -
요격미사일(ABM) 협정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26 06:00:001972년 5월26일 밤 11시 5분, 모스크바 크렘린궁.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전략무기제한협정을 맺었다. 6시간 마라톤 협상 끝에 합의한 협정의 골자는 요격용 미사일 제한. 상대방이 발사하는 대륙간탄도탄(ICBM)을 공중에서 맞히는 요격미사일(ABM) 발사 기지를 두 곳으로 제한하고 배치 수량을 200기로 한정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 당시 두 나라의 ICBM 전력은 미국이 1,504기, 소련이 1,600기를 보유한 상태. 잠수함발사탄도탄(SLBM)을 탑재한 전략 원자력 잠수함은 미국이 41척, 소련이 42척을 갖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력이 엇비슷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의 ICBM은 한 발이 3~14개의 자탄(子彈)으로 분리되는 다탄두인 반면 소련은 다탄두 초보 기술을 갖춰가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탄도탄도 마찬가지. 미국 전략원잠은 다탄두를 실었으나 소련 잠수함은 단일탄두 밖에 없었다. 정확도 차이는 더욱 컸다. 미국의 다탄두 미사일은 각기 독립된 목표물을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었지만 소련은 ICBM이든 SLBM이든 정확도가 극히 떨어졌다. 대신 탄두 위력을 키웠다. 메가톤 단위의 폭발력을 가진 소련 ICBM은 목표지점에서 한참 빗나가도 광범위한 지역을 초토화할 수 있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의문이 나온다. 미국과 소련은 왜 군비 경쟁을 억제한다면서 방어용 무기를 제한했을까. 요격 용도의 미사일은 목표의 2~3배를 할당하는 게 통례. ICBM과 SLBM이 수천기라면 요격 미사일은 적어도 같은 수량이거나 2~3배에 이르러야 하는데 미국과 소련은 왜 200기 이내로 묶었을까. 요격 미사일을 오히려 늘리는 게 평화에 접근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 나올 법 하다. 미국과 소련은 반대로 생각했다. ABM 협정을 맺으며 양국은 국가 전체 방어망 구축을 포기하는 데 쉽게 의견을 모았다. 만약 어느 한쪽이 약속된 장소와 약속된 수량 이외에 요격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거나 추가로 요격미사일을 생산, 배치할 경우 다른 한쪽의 선제 핵 공격을 인정하기로 했다. 한 마디로 ‘미국과 소련 어느 쪽도 미사일 공격에 대한 방어능력을 갖추면 안된다’는 것이다. 미·소의 합의에는 공격능력을 살려둬야 서로 무서워 도발하지 못한다는 이른바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 개념이 깔려 있다. 요격용 미사일을 200기씩 인정한 것도 선제공격을 받은 쪽의 수뇌부가 수도권에서 보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을 남겨주자는 취지다. 모든 목표는 딱 한 곳에 맞춰져 있었다. ‘서로 못 믿어 핵무기 경쟁을 펼쳐도 핵 전쟁만큼은 막자.’ 미국과 소련이 이런 합의에 나서게 된 이유는 무한 경쟁의 끝을 서로 두려워했기 때문. 돈도 돈이지만 지구촌 공멸에 대한 위기감이 협정 타결을 이끌었다. 요격미사일이 또 다른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경고도 협정 타결의 요인으로 작동했다. 속도가 마하(음속) 10~12배로 날아오는 ICBM을 요격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직접 맞추기가 어려우니 예상진로에 핵폭탄을 터트리는 방식. 요격 미사일 자체가 핵폭탄이어서 지구촌 환경에는 치명적인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잇따랐다. 협정은 잘 지켜졌을까. 대체로 그랬다. 협정을 갱신할 때마다 서로 트집 잡고 싸웠지만 ABM 협정과 그 바닥에 깔린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제3차 세계대전을 방지하는 장치로 작용해왔다. 문제는 30년 동안만 이 협정이 효력을 냈다는 점. 미국에 의해 2002년 깨졌다. 전면적 핵전쟁 가능성이 낮아졌어도 ‘불량 국가’에 의한 핵공격 위험에 대응하는 데 이 협정이 장애물이라고 판단한 부시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깨버렸다. 협정을 파기한 미국은 지구 전역을 커버할 수 있는 미사일 방어망(Missile Defence) 구상에 매달렸다. 천문학적 자금이 소요된다는 지적에 따라 수차례 취소와 부활 과정을 겪고 이름도 몇번 바뀌었으나 MD 계획은 여전히 살아 있다. 문제는 ABM 협정을 무력화하고 등장한 MD를 둘러싼 갈등이 가장 심한 지역이 바로 한반도라는 점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 논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과 소련이 ABM 협정을 맺었던 44년 전 오늘 서독과 동독은 동베를린에서 만나 ‘동·서독일반통행협정’을 맺었다. 양독(兩獨)은 이 협정으로 서로에게 도로와 철도, 운하와 해상통행을 터놓았다. 한국이나 서독이 둘 다 분단국가였는데…. 오늘날의 현실은 참으로 다르다. 한반도에 내린 시련과 고통은 언제나 걷힐 수 있을까./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전략무기제한협정의 틀에서 요격미사일협정(ABM Treaty)로 불리는 이 협정은 개정을 거쳐 요격미사일 기지를 수도권 1곳으로 줄였다. 처음 발표된 이 협정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 ① 미국과 소련은 각각 수도권과 1개 탄도탄기지 주변 등 2개소에만 요격용 미사일 200기를 배치한다. 미국은 수도 워싱턴 주변 이외에 노스타코타주 그랜드포크에, 소련은 수도 모스크바 그리고 수도에서 1,300㎞ 떨어진 한 곳 등 두 곳에 요격미사일망을 설치한다. ②대륙간탄도탄과 잠수함발사탄도탄을 동결한다. 그러나 여기에 핵탄두나 전략폭격기, 그리고 순항미사일은 포함하지 않는다. ③방어용 무기에 대한 협정은 무기한이고 공격용 무기 동결은 5년간의 협정기간을 거쳐 양국은 영구적이며 보다 완벽한 협정을 체결할 협상을 벌인다. ** 국내 언론은 당시 소련의 전략원잠이 42척이라고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23척이었고 나머지는 건조 목표였다. 소련은 미국에 비해 성능은 물론 배치 수량까지 떨어지는 전략원잠의 전력 격차를 좁히려 구형 디젤 잠수함에 SLBM 2~4기를 적재해 1980년대 말까지 운용했다. 주목할 대목은 구 소련의 디젤 전략 잠수함 운용 전략을 북한이 물려 받았다는 점. 북한이 SLBM이라고 주장하는 미사일을 적재한 신포급 디젤 잠수함의 원조가 냉전 시기에 소련이 고육책으로 운용하던 디젤 전략잠수함이다. -
우주개발의 두 얼굴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25 06:00:001961년 5월25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케네디 대통령이 ‘국가의 긴급 과제에 대한 특별 교서’를 발표했다. 육군 개편과 해병대 증원, 실업자 대책 등을 담은 특별 교서의 백미는 ‘10년 이내 달 착륙’. 케네디 대통령은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다가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시키겠다’는 목표를 제시하며 ‘앞으로 5년 동안 70억~90억 달러의 특별 예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왜 ‘긴급’이라는 단어를 동원했을까. 미국 대통령의 ‘특별’교서 자체로도 중압감을 갖기 마련인데 ‘긴급’까지 더한 이유가 있다. 연설 시점은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를 여행해 미국에 ‘가가린 쇼크’를 안긴 지 43일 후였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케네디의 연설에 미국인들은 환호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반신반의한 것이다. 인간이 과연 달에 착륙할 수 있을까를 의심했지만 미국은 끝내 1969년 7월 아폴로11호의 달 착륙과 지구 귀환 성공으로 꿈을 이뤘다. 탐사선에 탄 우주인이 달을 찍고 지구로 돌아온 우주선은 아폴로 11호부터 17호까지 여섯 차례에 이른다. 우주개발의 주도권도 미국으로 넘어왔다.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먼저 쏘고 유인 우주비행까지 미국에 앞섰던 소련은 왜 우세를 유지하지 못했나. 돈 때문이다. 미국이 아폴로 계획에 투입한 예산은 250억 달러. 요즘 가치로 1,400억 달러에 이르는 자금이 들어갔다. 미 항공우주국(NASA) 직원 3만4,000명에 대학과 연구소, 기업의 연구인력도 37만5,000명이 따라붙었다. 같은 기간 중 소련의 우주 개발 비용은 미국의 20~30% 수준에 머물렀다. 미국의 달 탐사 성공에는 또 다른 요인도 있다. 선택과 집중. NASA는 레인저·서베이어·루너오비터 등 달 관측 계획을 아폴로계획의 보조 수단으로 삼았다. 우주 유영과 랑데부, 도킹 등을 훈련한 머큐리·제미니 계획도 아폴로계획의 성공을 거들었다. 시장의 선택을 중시하는 미국으로서는 드물게 국가가 목표를 세우고 역량을 집결하는 전략이 성공을 거둔 셈이다. 우주 개발의 그림자도 있다. 아폴로 11호 달 탐사선에서 내려 달을 밟은 직후 닐 암스트롱은 ‘이는 한 사람의 작은 발걸음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거보(巨步)’라고 말했지만 과연 그럴까. 인류가 달 탐험으로 얻은 게 무엇이 있는데? 미국만 대륙간탄도탄용 대형 로켓을 비롯해 우주의 군사기지화를 위한 경험을 축적했을 뿐이다. 암스트롱이 달을 걷는 순간 선전 목표가 이뤄졌기 때문일까. 개발의 추진력도 급속히 사그러들었다. 한국경제의 앞날에도 우주 개발은 국위 선양 기회인 동시에 예산 부담 요인이다. 앞으로 2년 뒤면 무인 달 탐사선을 발사할 계획이지만 막대한 예산 소요를 뒷받침할 힘이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우주개발의 덤 또는 진짜 목표인 장거리 미사일 운반체 기술을 확보할 의지도 없는 것 같고…. 세계 경제도 마찬가지다. 전통적 우주 강국인 미국과 러시아는 물론 중국도 거액을 투자하고 인도와 일본도 우주 개발에 뛰어들었다. 과연 얼마나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미국이 구상하는 화성 탐사 프로젝트는 비용이 1,000억 달러를 넘는다. 중국은 미국을 능가하겠다는 목표 아래 빠른 속도로 기술력 차이를 줄여나가고 있다. 미국이 아폴로 계획에서 남긴 가시적 성과물은 월석(月石) 385㎏. 우리나라도 소량이나마 분배받았다. 월석 채집 경쟁에 투입한 자금을 생산과 복지에 활용했다면 ‘보다 나은 사회’에 가까워졌을 것이라는 지적에도 주요국들은 우주개발을 포기하지 않는다. 군사기술 축적과 미래를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서. 참으로 모를 일이다. 우주를 향한 경쟁이 인류의 진보를 위한 발걸음인지, 아니면 우화(愚話)의 반복인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검은 유대인 구하기…솔로몬 작전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24 06:00:00상상해보자. 3,000여년 전에 이 땅을 떠났던 동족이 있다. 이역만리 떨어져서도 민족의 정체성과 풍속을 잃지 않고 조상의 땅에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 세월을 버텼다. 그런 종족이 존재할까.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이 그랬다. 이스라엘 국가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검은 유대인’들을 사지에서 구해냈다. 1991년 5월24일 오후 4시45분, 세계의 이목이 텔아비브 공항에 쏠렸다. 에티오피아에서 긴급 대피한 ‘검은 유대인’들의 첫 도착 때문이다. 호기심은 곧 경탄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기다려 온 세월이 관심을 끌었다. ‘잃어버린 단(Dan) 지파의 후손이라면 3,700여년, 솔로몬과 시바 여왕이 낳은 아들의 후손이라면 2,900여년 만의 귀향이었기 때문이다. 검은 유대인들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세기 중후반. 영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다. 검은 유대인을 찾아낸 선교사들은 경악했다. 안식일을 비롯해 히브리 성서의 각종 금기와 고대 유대교 신앙을 온전히 지키고 있다니! 소식을 접한 유대인 학자 조셉 힐러리가 이들을 찾아가 같은 민족이라고 밝혔을 때 반응. ‘세상에나! 백인종이 어떻게 유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오?!’ 예루살렘 이야기를 들려주니 이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에티오피아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의 견제와 박해 속에서 주로 산악지대에 살며 자신들을 ‘마지막 유대인’이라 여겼던 종족. 언젠가는 구약에 나온 대로 조상의 땅, 예루살렘으로 귀향하리라는 ‘약속’을 3,000여년간 믿었던 종족은 세상에 알려진 뒤에도 몇 세대를 더 기다려야 했다. 가장 먼저 이스라엘로 돌아간 시기는 1984년 11월. 에티오피아에 기근이 들자 이스라엘은 한 달 보름 동안 ‘모세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검은 유대인 8,000여명을 구해냈다. 1985년에도 수단의 내전이 격화하며 에티오피아 국경지대의 유대인 촌락이 전멸 위기에 빠졌을 때 494명을 항공편으로 빼냈다. 검은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소개한 경험이 있었어도 1991년의 상황은 급박했다. 에티오피아 내전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아디스아바바의 이스라엘 대사관은 우선 ‘동족’을 한데 모았다. 대사관저 부근은 곧 거대한 난민 캠프로 변했다. 이스라엘은 에티오피아 정부와 협상 끝에 몸값 3,500만 달러를 주고 이들을 이스라엘로 데려간다는 협약을 맺었다. 몸값은 미국 유대인 자선단체가 단 3일 만에 걷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반군 측과도 교섭해 검은 유대인의 송환작전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언약을 받아낸 뒤 명령을 내렸다. ‘솔로몬 작전 개시!’ 먼저 이스라엘군 정예 병력 200명이 대사관 부근 난민 캠프와 공항까지 6.4㎞ 구간의 안전을 확보했다. 솔로몬 작전은 전광석화처럼 펼쳐졌다. 이스라엘이 동원한 비행기는 군의 C-130 수송기와 B-747 점보 제트기 35대. 많을 때에는 28대가 동시에 하늘에 떠 있을 정도로 36시간 동안 사력을 다한 끝에 구조한 인원이 1만4,325명. 세계 항공 역사상 이렇게 단기간에 이 정도 인원을 수송한 유례가 없다. * 진기록은 이 뿐 아니다. 기네스북에는 가장 많은 수송인원을 기록한 시기와 항공사가 ‘1991년 5월 24일 엘알(El Al·이스라엘 국영항공사) 1,088명‘이라고 나온다. 이스라엘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760명 이상을 태울 수 없다‘는 보잉사의 경고를 무시한 채 실을 수 있는 만큼 실었다. 실제 탑승 인원은 기네스북에 등재된 기록보다 많았다고 한다. ** 솔로몬 작전은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모두가 돌아온다‘는 모세의 예언이 실현됐다는 기쁨과 자신감을 안겨줬다. ’검은 엑소더스‘ 이후 태어난 2세를 포함해 13만 5,000명으로 불어난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인구 증가정책에 도움이 됐지만 가난과 유무형의 차별 논란을 낳고 있다. 차별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가끔 일어난다. 자동소총과 선민사상으로 무장한 검은 유대인 병사와 경찰이 팔레스타인에 유독 가혹하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작전 이후에도 검은 유대인들을 모셔왔으나 심혈을 기울이는 인구정책은 따로 있다. 유럽 출신 백인 유대인의 유치가 최대 목표. 유대인 인구 비율 유지 및 증대 노력에 힘입어 1960년대까지 90%를 기록하다 1990년대 초반 70% 아래로 떨어졌던 전체 인구 대비 유대인 비중은 74% 수준까지 올랐지만 지속 여부는 불투명하다. 아랍계의 출산율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처음의 상상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에게 잃어버린 부족이 있다면 구해올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가난한 동족을 대해온 행태를 보건대 불가능할 것 같다. 인구 절벽에 봉착한 지금 발등의 과제가 아닐 수 없건만 현실은 답답하기 그지 없다. 통일대박론부터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까지 말의 성찬 뿐이다. 잃어버린 부족을 만들어도 부족할 판에 기회를 날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솔로몬 작전은 성공리에 끝났어도 남은 사람들이 있다. 현지에서 탈출 작전을 주관한 아셰르 나임 대사와 직원들은 마지막 비행기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아디스아바바에 남았다. 귀환 명단에 포함되지 않아 이스라엘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검은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서다. 나임 대사는 반군의 포탄이 대사관에 떨어지는 순간에도 검은 유대인들과 함께 자고 먹었다. 새 정부를 구성한 반군과 협상을 벌여 미처 떠나지 못한 동족을 최대한 구한 후에야 나임 대사는 돌아왔다. 리비아 출신인 아셰르 나임 대사는 1993~1994년 한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를 지낸 뒤 귀국, 검은 유대인의 대학 교육을 지원하는 장학재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검은 유대인 구출을 기록한 ‘잃어버린 부족 구하기’를 남겼다. * 엄마 치마 속에 숨었던 어린이 33명과 기내에서 태어난 2명을 합치면 1,122명이 내렸다고. 최신형 점보기(B-747 8I)의 최다 탑승인원이 605명, 에어버스 A380-800이 868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좀처럼 깨지기 힘든 탑승기록으로 꼽힌다. -
네덜란드 독립전쟁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23 06:00:001568년 5월23일, 스페인령 네덜란드 북부 흐로닝언 주 헤일리헤를레이. 스페인 총독 알바 공작의 철권 통치에 반대해온 네덜란드 저항세력이 군사행동에 나섰다. 보병 3,900명과 기병 200명으로 구성된 저항군의 기습을 받은 스페인 군대 3,220명(보병 3,200명·기병 20명)은 바로 무너졌다. 스페인군의 3분의2가 죽거나 다친 반면 저항군 사상자는 80여명에 그쳤다. 헤일리헤를레이 전투는 서막이었다. 스페인의 압제를 피해 독일 지역으로 망명했던 오라녜공 빌헬름(오렌지공 윌리엄)이 모은 3개 침공부대의 일부가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것이다. 비록 한달 보름 뒤 스페인군과 전투에서 7,000여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어도 저항세력은 독립을 선언하며 세를 불렸다. 스페인은 이들을 얕봤다. 그럴만했다. 전세계에 걸친 광대한 제국에 비하면 한 줌 밖에 안됐으니까. 합스부르크가문이 지배하던 당시 스페인 제국은 유사 이래 최초로 전세계가 무대였던 거대 제국이었다. 유럽의 영토만 오늘날 기준으로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남부와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서남부를 아울렀다.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전체와 필리핀까지 영역으로 삼은 스페인 제국을 상대로 네덜란드는 80년을 싸운 끝에 독립을 따냈다.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전쟁과 더불어 서유럽 4대 시민혁명의 하나로 손꼽히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바로 헤일리헤를레이 전투. 네덜란드 국가에도 이 전투에서 죽은 지휘관의 이름이 나온다. 기병대의 앞에 서서 전투를 치르다 전투 초반에 전사한 ‘나사우의 아돌프 백작’이 그 주인공.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인 오라녜공의 둘째 동생이었다. * 네덜란드인들은 왜 세계 최강인 스페인에 반기를 들었을까. 처음에는 반기가 아니라 읍소였다. 네덜란드의 국가 제 1절에도 저항세력이 충성심을 잃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문제는 스페인이 세금을 경감하고 보다 많은 자치권을 달라는 네덜란드 지역 유력자들의 청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 오히려 이들을 ‘거지’라며 내쳤다. 네덜란드 저항군 스스로 ‘거지 떼’라고 부르며 스페인제국을 괴롭혔다.** 결정적으로 스페인은 크게 세 가지 무리수를 뒀다. 첫째는 종교. 수차례의 정략결혼 끝에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을 차지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무역상들이 대부분이던 신교도를 억눌렀다. 두 번째는 중과세였다. 당초 세율 100분의 1로 시작한 세금이 세목을 늘려가며 20분의 1, 10분의 1로 높아지자 가톨릭 지역까지 저항세력에 합류했다. 저지대의 17개주가 모두 독립운동에 들어갔다. 세 번째 실책은 배고픈 군대의 폭정. 발흥하는 오스만 튀르크는 물론 프랑스와 경쟁하던 스페인 제국은 군사비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금은보화(주로 은)를 갖고도 늘 군사비가 모자랐다. 네덜란드 독립군을 상대하는 스페인 병사들은 봉급이 끊기자 1576년 11월 앤트워프시 약탈에 나섰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는 앤트워프 약탈에서 무고한 시민 7,000명이 죽었다. ‘스페인군의 광기(Spanish fury)’라는 악명을 얻은 앤트워프 약탈 이후 남부의 상인들과 지식인들이 종교까지 바꿔가며 저항군에 힘을 보탰다. 마침 스페인의 ‘분리 후 지배(devide & rule)’ 전략에 따라 17개주의 대오가 무너지고 가톨릭을 믿는 남부가 독립운동을 포기했던 상황. 북부의 홀란드주를 제외하고는 인구의 대부분이 몰려 살던 남부의 수도나 다름없는 앤트워프가 짓밟힌 뒤 우수인력이 대거 북부로 떠났다. 힘을 얻게 된 북부는 17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사실상 국가로 인정받을 만큼 커졌다. 1648년에는 독일 30년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마침내 국제적으로도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다. 뿐만 아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제국과 싸우면서도 대외무역으로 황금기를 구가하며 세계 최고 부자나라로 자리 잡았다. 비록 독립과정에서 일찍 스페인에 굴복한 남부가 벨기에로 갈라졌지만.*** 네덜란드의 비결은 또 있었다. 관용과 탈(脫)이데올로기.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었다. 기피민족이던 유대인조차 자유를 보장 받았다. 반면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막대한 금과 은에도 수차례 국가부도를 겪고 결국은 역사의 중심 무대에서 사라졌다. 종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전쟁을 일삼은 결과다. 예나 지금이나 경직된 사고가 나라를 좀먹는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독립전쟁을 이끌던 오라녜공작 빌헬름은 1584년 스페인의 사주를 받은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 총으로 암살 당한 역사상 최초의 유명 인물로도 기억된다. 독립전쟁의 신호탄인 헤일리헤를레이 전투에서 보병대를 지휘한 첫째 동생 루이는 1574년 모커르헤이데 전투에서 3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20살이던 막내 동생도 싸우다 죽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하던 가문의 4형제 모두가 독립전쟁에서 죽은 것. 오라녜공작 빌헬름이 오늘날까지 네덜란드의 국부로 추앙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 겉으로는 ‘거지떼’를 자처했으나 네덜란드 저항세력의 전력은 결코 거지 수준이 아니었다. 초반 육상전에서 밀릴 때마다 결정적으로 해상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바다의 거지떼’(독립군 해군)는 항해와 조선술에 모두 능한 무역상 겸 해상 전투세력이었다. 암살 당한 오라녜공 빌헬름의 둘째 아들인 나사우의 마우리츠는 군제 개혁으로 저항군을 유럽 최고의 군대로 만들었다. 마우리츠는 군대를 오히려 축소하고 적절하고 신속한 급료 제공, 우수 무기 지급으로 군대의 질을 높였다. 총포대가 교환하며 사격하는 방안을 창안하고 같은 군대에게 동일한 군복을 입힌 최초의 인물도 마우리츠다. 마우리츠 밑에서 근무하던 장교의 일부는 영국 내전에서 의회 편에 가담, ‘신형철기군’의 탄생을 도왔다. *** 네덜란드는 독립 이후 ‘세계 최강’이라는 생각에 영국 등 어떤 나라와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감에서다. 네덜란드에서는 17세기 후반부 이후 로마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가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게르마니아에는 ‘바타비아인들이 갈리아족 중에서 가장 강하고 용맹하다’는 귀절이 나온다. 스스로 강하다며 전쟁에 빠진 뒤부터 네덜란드는 황금기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로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가 1631년 암스테르담에 머물며 이런 말을 남겼다.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 이토록 손쉽게 편리하고 진귀한 물품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 이토록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네덜란드 튤립의 땅, 자유가 당당한 나라·주경철 서울대 교수 지음) -
지도로 돈방석 그리고...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20 06:00:00조선의 14대 국왕 선조. 무능하고 정권 유지에만 관심을 기울였다는 선조에게 국제정세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세계지도가 있었다고 가정하자. 어떻게 활용했을까. 동쪽을 향해 달려오는 유럽 국가들과 통하려 애썼을까. 생전에 선조가 보여준 행태에 비춰볼 때 짐작이 어렵지 않다.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중국에 일러 바쳤거나 아니면 불태워 버렸거나. 그런데 그런 지도가 있었을까? 있었다. 53쪽 분량의 지도첩 ‘지구의 무대(Theatrum Orbis Terrarum)’. 세계전도와 지구촌 곳곳의 지도를 넣은 지도책인 ‘지구의 무대’에 딸린 해설은 국제정세까지 담았다. 세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지도는 존재했을 뿐 아니라 극동에도 흘러들어왔다. 행선지가 조선이 아니라 일본. 13~14세 가톨릭 소년들로 구성된 ‘덴쇼 소년사절단(天正遣歐少年使節 團)’에 의해서다. * 이종찬 아주대 의대 교수의 ‘난학(蘭學)의 세계사’에 따르면 소년사절단이 선물로 받아온 유럽 지도책을 보고 일본 다이묘들은 충격에 빠졌다.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일본이 세계 전도의 귀퉁이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경악했다. ‘지구의 무대’를 본 히데요시는 스페인과 아시아를 공동 경영하려던 계획이 안 먹히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 지도첩 ‘세계의 무대’에 어떤 내용이 실렸기에 그랬을까. 유럽에서도 ‘지구의 무대’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1570년 5월20일 발행된 초판(325부)은 주택 한 채와 맞먹는 가격에도 순식간에 동났다. 첫해에만 4쇄를 찍었다. 만 존 클라크는 역저 ‘지도 박물관(7명 공저)’에서 지도첩 ‘세계의 무대’는 세계를 책에 담은 최초의 서적으로 간주한다. 제작자는 애이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당시 43세). 초판본에 실린 세계지도는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북미대륙을 제외하면 정확도가 뛰어나진 않지만 온갖 정성을 들였다. 지도제작자 87명의 지도를 10년간 모으고 표준을 정해 한 눈으로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도 뿐 아니라 각 지방의 지명 색인도 들어갔다. 일부 지도에는 경도와 위도까지 표시됐으니 아무리 비싸도 항해자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을 수 밖에. 무려 2절지(가로 86㎝, 세로 58㎝) 크기의 각면에 대형 지도 70점을 담은 그의 지도첩 초판은 라틴어로 제작됐으나 개정판이 거듭되며 7개국 언어로 번역됐다. 오르텔리우스가 사망(1598년)하기 전인 1595년판에 처음 등장하는 한국은 섬으로 표시돼 유럽인들의 인식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개정판을 거듭할 때마다 새로운 지도와 그림이 추가되고 분량이 늘어난 ‘세계의 무대’는 1624년까지 46판 7,300부가 팔렸다. 해적판까지 합치면 당시 서구의 모든 선박에는 그의 지도책이 구비돼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지도제작자 오르텔리우스도 떼돈을 벌었다. 유럽에서 가장 번화했다는 엔트워프 중심가에 대저택도 지었다. 중요한 점은 끊임없이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며 추가로 투자했다는 사실.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16세기형 기술 개발 및 투자 성공 사례인 셈이다. 유럽에 뿌려진 그의 지도첩은 호기심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탐험의욕을 자극해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을 낳고 종국에는 서구의 세계지배로 이어졌다. ‘보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과정이 반복된 결과다. 경제사학자 앵거스 메디슨의 추산에 따르면 16세기까지 유럽의 1인당 국민소득(PER GDP)은 평균 496달러로 중국의 600달러에 뒤졌지만 지도첩이 나온 후 역전됐다. 지도첩 ‘세계의 무대’가 세계를 유럽의 독무대로 안겨준 셈이다. 지도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미래 희망에 대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우리에게는 뛰어난 지도가 존재했었는지 의문이다. 반면 우리 주변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도 마테오리치가 전해준 세계지도를 일찌기 접했고 일본은 중국보다도 앞섰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가 나오기 69년 전인 1792년 나가사키의 한 학자가 제작했다는 세계지도는 오늘날 지도와 견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물론 네덜란드 지도를 보고 그렸겠지만. 비단 지도 뿐이랴. 습관과 구태, 아집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이 무능하고 집권에만 관심이 있었던 선조의 분신들을 보는 것 같다. 경쟁의 시대, 사고의 깊이와 폭을 키우려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다. 구슬 서말을 꿰어 보배로 만든 오르텔리우스처럼. /논설위윈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덴쇼소년사절단’은 1582년 일본을 출발해 유럽 각지를 돌아보고 1590년 귀국한 일본 최초의 서양 사절단. 일본 포교성과를 알리고 싶었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기리스탄(기독교도) 다이묘(영주) 3명이 추진해 사절단 4명에 일본인 수행단 3명(1명은 성인 지도역, 2명은 소년 인쇄공), 통역을 맡은 유럽 사제단 5명 등 13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돌아올 때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도 같이 들고 왔다. 일본인 소년 사절단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펠리페 2세를 만나고 교황 그레고리 13세(그레고리 역법을 보급한 교황)까지 알현했다. 소년사절단을 통해 전설과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일본이라는 존재가 서유럽에 각인됐다. ** 지도첩 ‘세계의 무대’와 국제정세를 보고받은 히데요시는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고 있던 스페인과 연합해 중국과 인도, 인도차이나(베트남, 캄보디아) 등을 지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망상 어린 그의 계획이 틀어진 후 돌려진 방향이 조선 참략이었다(링컨 페인의 ‘바다와 문명:해양의 세계사’). 히데요시의 헛된 꿈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조선의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꺾였다. *** 오르텔리우스의 ‘세계의 무대’는 이전의 지도제작자 이름을 넣은 색인만으로도 역사적 가치를 평가받는다. 인명 색인 자체가 귀중한 기록인데다 색인에 오른 지도제작자 중에 상당수는 ‘지구의 무대’를 통해 업적을 남긴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 -
난로와 창문에도 세금을?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19 06:00:00연간 예산 120만파운드에 세입 90만파운드. 왕정복고(1660년) 직후 영국 국왕 찰스 2세의 살림살이다. 국왕과 의회는 머리를 짜냈다. 모자라는 30만 파운드를 세금으로 거둬야 하는데 세목(稅目)이 마땅치 않았다. 바로 한 세대 전에 왕과 의회 간 내전에 대한 트라우마(trauma)도 있었다. 찰스 1세의 처형(1649), 공화정을 겪은 가장 큰 이유가 건함세 징수 등을 둘러싼 세금 갈등 때문이었으니까. 급해진 찰스 2세는 영국령 덩케르크를 프랑스에 팔았다.* 찰스 2세가 자존심을 버리고 덩케르크를 매각했어도 대금이라야 32만 파운드. 1년 예산 부족분을 간신히 넘기는 정도였다. 결국 증세 밖에 방도가 없었다. 고민은 예외가 있었다는 점. 의회와 세금 갈등으로 아버지인 찰스 1세가 참수 당한 기억을 갖고 있던 찰스 2세는 일반인을 납세 대상으로 삼았다. 귀족과 왕당파가 장악한 의회도 이해관계가 맞닿았다. 돈은 필요한데 내 주머니를 열기는 싫었던 찰스 2세와 의회는 화로에 눈을 돌렸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7세기께 처음 도입된 이래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반짝했던 화로세(Hearth Tax)법은 논란을 야기했지만 1662년 5월19일자로 통과되고 말았다. 찰스 2세는 당대를 주름잡은 경제학자의 도움도 받았다. 통계학과 경제학의 선구자이자 크롬웰의 심복에서 찰스 2세의 충신으로 변신한 윌리엄 페티가 법 제정에 앞장섰다.** 애덤 스미스 이전 시대의 경제학자로 손꼽히는 페티까지 나서 개발한 논리는 간단했다. ‘집을 소유하고 화로나 벽난로를 갖고 있으면 좀 사는 것 아니냐. 국가를 위해 세금 좀 내라.’ 왕정복고로 돌아온 국왕에게 충성 경쟁을 벌이던 일부 의원들도 ‘사람 수 세는 것보다 난로 숫자 파악하는 게 쉽다’며 거들었다. 변형된 재산세의 일종이었던 화로세 부과액은 화로당 2실링. 1년에 두 차례 나눠서 냈다. 요즘 가치로 430파운드(약 73만3,930원)라는 세액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세금도 ‘좀 산다고 하는 계층’에 부과된 게 아니라 벽난로나 화로를 갖고 있으면 빈부 가리지 않고 매겼다. 정작 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초기 징수액은 연간 10만~11만5,000파운드에 머물렀다. 징세관들이 화로를 헤아리기 위해 개인 집에 들어가 반발도 샀다. 사람들이 화로를 없애고 집안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통에 화재와 사망사고까지 잇따랐다. 화로세 징수액은 명예혁명 직후인 1689년 화로세 징수액은 21만6,000파운드까지 올라갔지만 민심을 얻으려는 윌리엄 3세와 메리 공동국왕은 세목 자체를 없애버렸다. 폐지 여부를 주저하던 윌리엄 3세가 결심하게 된 동기인 하원 보고서의 내용은 이렇다. “화로세가 빈민들에게 부담이 될 뿐 아니라 국민을 노예화한다. 낯선 징세관이 집에 마음대로 들어와 구석 구석 조사하는 행위에 반감이 심하다. 영국의 모든 신민은 자신의 집에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쉴 권리가 있는데 화로세가 방해물이다.” 영국인들은 새로운 국왕의 선정에 환호했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국세수입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영국의 당시 세입규모는 약 180만파운드. 20만 파운드를 걷어주던 난로세 폐지는 다른 세목 신설로 이어졌다. 결국 영국 의회는 1696년 말 ‘창문세(Window Tax)’ 신설을 의결했다. 창문세 부과의 명분도 화로세와 다를 게 없었다. ‘창문의 재료인 유리가 비싸니 창문 달고 사는 집이라면 돈 있는 것 아닌가. 세금 좀 내라.’ 창문 수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자 바로 파장이 일었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난로를 부수고 화톳불을 때던 사람들은 창문을 없었다. 신축 건물에는 창문을 아예 달지 않았다. 건물들의 외형은 기형적으로 변해갔다. 세금보다 어둠을 택한 것이다. 조세 당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창문간 간격이 일정 기준보다 벌어져 있으면 별도의 창문으로 간주해 세금을 때렸다. 일시적으로 창문을 폐쇄했다가 다시 여는 행위가 적발될 경우 20실링의 벌금을 물렸다. 창문세는 1851년 주택세가 도입될 때까지 존속했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의 법칙’을 주창한 프랑스 경제학자 세이(Say)는 영국 여행에서 창문세의 폐단을 목도한 후 기회 있을 때마다 세금 비판론을 쏟아냈다. 창문세는 오늘날에도 어리석은 조세정책을 비꼬는 용도로 회자된다. 오늘날에도 영국에는 화로세와 창문세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성이나 고택(古宅)에 굴뚝이 없으면 17세기 후반 지었다고 보면 된다나. 창문이 거의 없는 고성이라면 신축 혹은 개축시기가 거의 18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150여년 사이라고 보면 틀림 없단다. ***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화로세와 창문세는 어디에 쓰였을까. 런던 대화재로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고 뉴턴 같은 과학자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대양을 누빌 함대 건설과 아일랜드와 아메리카 식민지 유지에도 돈이 들어갔다. 부작용은 컸지만 재산세의 일종인 난로세와 창문세는 과학진흥과 제국 팽창의 다른 이름이었던 셈이다. 19세기 영국은 더욱 다양한 세금을 만들었다. 사냥용 개에 대한 견세(犬稅), 수출입 상선에 대한 호송세, 헤어 크림과 의복에까지 과세하고 상속세와 소득세를 재산에 따라 매겼다. 근대 조세제도가 자리 잡는데 200년 이상이 세월이 걸렸다는 얘기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일부 사료에는 덩케르크가 유럽대륙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영국령이라고 소개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영국의 마지막 대륙 영토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고향’으로 유명한 항구 도시 칼레다. 백년전쟁 패전으로 프랑스 내 영토를 모두 상실한 뒤에도 영국은 100년 넘게 칼레만큼을 유지했었다. 1558년 칼레를 프랑스군에 빼앗긴 뒤 꼭 100년 만인 1658년 영국은 덩케르크를 얻었다. 영국 공화정이 프랑스를 도와 스페인·영국 왕당파 귀족 연합군과 전투에서 승리한 대가로 양도받았다. 공화정이 얻은 땅을 왕정복고 후 매각했으니 찰스 2세는 체면을 구겼지만 주머니 사정이 급했고 덩케르크에 군사력을 유지할 자금도 딸렸다. 덩케르크는 중세 시대에 네덜란드와 벨기에, 스페인, 프랑스가 물고 물리는 쟁탈전을 펼쳤던 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에 밀렸던 35만 영국군이 살아서 도버해협을 건넌 ‘덩케르크 철수작전’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 윌리엄 페티의 대표저술인 ‘정치산술’(1690년 사후 출간) 형이상학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의 영역이던 정치경제학을 숫자와 중량, 척도가 중시되는 학문으로 바꾸는 계기로 평가받는다. 현대통계학·빅데이터의 원조로도 손꼽힌다. 애덤 스미스마저 혹평했던 칼 마르크스로부터 ‘근대 경제학의 건설자, 가장 천재적이고 독창적인 학자’로 평가받았던 페티는 아일랜드 측량에서 빈 땅을 찾아내 막대한 재산도 남겼다. 1782년 영국 총리에 올라 미국 독립전쟁을 뒷마무리한 윌리엄 페티 피츠모리스가 그의 증손자다. *** 화로세는 뜻하지 않은 유산을 남겼다. 얼마나 악착같이 걷고 기록했는지 당시에 징세관과 징세대리인들이 기록한 정확하고 광범위한 문헌 자료는 어떤 사료보다 신빙성을 인정받는다. 인구와 주택 사정, 소득과 재산을 파악하는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세기의 재혼, 콩가루?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18 06:00:00로빈 후드와 대헌장(Magna Carta), 십자군전쟁, 보르도 와인의 탄생과 백년전쟁, 심지어 산업혁명까지…. 별개의 사안으로 보이는 이들 사건들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1152년 5월18일, 푸아티에(오늘날 프랑스 중서부)에서 열린 ‘세기의 결혼’. 고귀한 혈통끼리 통혼이었으나 막상 결혼식에는 손님도 거창한 예식도 없었다. 간단한 혼인 서약으로 백년가약을 맺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30세 신부가 첫 남편과 헤어진 지 불과 8주 밖에 안 지난 이혼녀였다는 점. 11세 연하의 영국 왕자는 신이 났지만 신부의 사정은 달랐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갈라선 전 프랑스 왕비 아키텐의 엘리너(Eleanor of Aquitaine)는 교황청 이혼허가장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떠들썩한 혼인 잔치를 꺼렸다. 약식 결혼의 두 번째 이유는 보다 현실적이었다. 두려움 때문. 엘리너의 광대한 영지를 탐낸 이웃 귀족들의 침략을 막으려 유력 가문과 서둘러 결혼할 수 밖에 없었다. 영지가 얼마나 컸기에 그랬을까. 형식상 프랑스 국왕의 신하였던 엘리너 가문이 거느린 영토는 국왕의 직할령과 맞먹었다. 궁전문화와 예술, 생활 수준은 프랑스 왕실보다 앞섰다. 부유한 아키텐의 상속녀인 엘리너는 부친을 잃은 15살 때부터 유럽 최고의 신부감이었다. 엘리너의 부친인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는 임종 직전, 딸의 후견인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를 지목하고 눈을 감았다. 루이 6세는 엘리너를 둘째 아들 루이와 맺어줬다. 둘 사이에 아들이 생기면 거대한 영토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17세 신랑 루이 왕자는 두 살 어린 신부와 결혼식 일주일 뒤에 부친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프랑스 국왕 자리를 물려 받았다. 루이 7세는 엘리너 왕비를 끔찍하게 아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이가 벌어졌다. 아이도 생기지 않았다. 결혼 7년 만에야 첫 딸 마리 출산. 부부가 함께 출전한 십자군 원정에서는 사이가 더욱 틀어졌다. 국왕은 엘리너 왕비가 숙부와 불륜 관계라고 의심했다. 병력 운용을 놓고도 사사건건 대립했던 두 사람은 이슬람 군대에 처절하게 패하고 구사일생으로 돌아와 각자의 길을 걸었다. 이혼을 말리는 교황청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합방한 끝에 엘리너가 임신해 호전됐던 관계도 잠시. 엘리너가 또 딸을 낳자 아들을 기대했던 루이 7세도 이혼에 동의했다. 교황청의 이혼 승인 이유는 근친 관계. 국왕 부부는 10촌 사이였다. 먼 친척이어서 근친에 해당되지 않았어도 엘리너의 이혼 신청을 기각했던 교황청은 달리 내세울 명분이 없었다. 훗날 호사가들이 ‘중세의 섹스 심벌’로 불렀을 만큼 미모가 뛰어났고 막대한 재산까지 갖춘 이혼녀 엘리너는 또 다시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인근의 유력 귀족 두 명이 신부를 납치하려 군대를 보낼 것이라는 소문 속에 엘리너가 청혼 편지를 영국 왕자 헨리(프랑스식 이름은 앙리)에게 급히 보낼 때 주변에서는 반대가 적지 않았다. 전남편인 루이 10세보다 가까운 친척(8촌)인데다 11살이나 어린 헨리 왕자는 첫 딸 마리의 사위감 물망에도 올랐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헨리 왕자의 부친(앙리 백작)과 엘리너가 한때 연인이었다는 루머도 뛰어 넘었던 두 사람은 남다른 금슬을 과시하며 13년 동안 5남 3녀를 낳았다. 문제는 결혼 2년 만에 영국 국왕 자리에 등극한 헨리 왕자의 여성 편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는 점. 어린 남편의 바람기에 질렸던 엘리너는 아들들을 키우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가장 아꼈던 아들은 리처드. 3차 십자군 원정에서 ‘사자왕 리처드’으로 불리며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겨뤘던 인물이다. 프랑스 왕비로서 딸 둘, 영국 왕비로서 아들 다섯에 딸 셋을 낳았던 엘리너의 아이들은 세 살 때 죽은 맏아들을 빼고는 모두 장성한 가운데 딸들은 하나같이 주요 왕가로 시집갔다. ‘중세 말기 유럽 왕가의 할머니’로도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헨리 2세의 끝없는 바람기에 분노한 엘리너는 아들들을 부추겨 잇따라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 15년간의 감금생활 끝에 남편이 사망한 뒤 67세에야 풀려났다. 엘리너는 리처드 1세의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섭정으로 영국을 다스렸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포로로 잡힌 리처드 1세를 구출하려 막대한 보석금을 지참하고 대륙으로 건너가 아들을 빼내는 모성애도 보였다. 손자와 손녀들을 돌보려 80세 노구에도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엘리너가 82세로 사망할 때 남은 아이들은 존 왕과 딸 하나 밖에 없었다. 남편 둘과 아이 8명을 먼저 떠나 보낸 엘리너의 시대가 지난 뒤에도 프랑스 영역 내의 아키텐과 툴루즈·가스코뉴 등 영지는 영국에 충성을 보냈으나 결국은 영토분쟁을 낳고 116년 전쟁(백년전쟁)의 한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보르도산 와인도 이 시기에 명성을 얻었다. 와인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영국의 엘리너와 그 자손들에게 보내지며 국제적 명성의 와인으로 굳어졌다. 연상의 이혼녀와 결혼으로 유럽에서 가장 발전했다는 아키텐을 획득했던 헨리 2세는 선진제도를 영국에 들여와 행정제도와 법체계를 다졌다. 오늘날 영국 재무부의 원형인 재무재판소를 설치하고 보통법 제도의 근간도 마련했다. 재산을 지닌 자유인이 신분에 맞는 무기를 소지하도록 의무화한 무장조례는 오늘날 미국의 총기소유 자유화로 이어지고 있다. 엘리너와 로빈 후드와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전설로 전해지는 로빈 후드 설화에서 나쁜 왕으로 나오는 존 왕이 엘리너의 막내 아들, 위대한 군주로 등장하는 리처드 1세가 세째 아들이다. 존 왕은 프랑스내의 막대한 영토를 거의 상실하고 스코틀랜드와도 끊임없는 전쟁을 벌여 재정 위기를 맞았는데, 여기서 영국 의회민주주의의 태동이라는 대헌장(1215년)이 나왔다. 전쟁 비용을 내놓으라고 독촉하는 존 왕을 러니메드 숲으로 유인한 귀족들은 ‘국왕은 귀족과 성직자의 동의 없이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는 내용의 대헌장을 받아냈다. ** 로빈 후드 전설에서의 존 왕과 리처드 왕의 이미지는 영토를 상실하고 세금을 짜내려던 국왕(존)에 대한 반감과 기사의 상징처럼 보였던 국왕(리처드)에 대한 기억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형제에게 영국인 피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프랑스화한 바이킹 출신 노르만족 혈통이 4분의 1, 프랑스 유력 가문의 피가 4분의 3이 섞였다. 영국인의 사랑을 받는 리처드도 주로 아키텐지역에서 성장하고 일생을 보냈다. 프랑스와 영국의 왕비였던 엘리너의 흔적은 무수한 민요와 무훈시, 궁정 연애시에 남아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각종 전기물이 출간되고 미국과 유럽의 TV와 영화의 소재로 관심이 이어진다. 대조적으로 연하의 남편인 헨리 2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고도로 효율적인 법률·행정 시스템을 구축한 군주라는 평가 이면에 광폭한 군주라는 혹평이 공존한다. 기사 4명을 보내 토머스 베케트 캔터베리 대주교 살해를 사주 내지는 방조한 탓이리라. 정치지도자의 악행은 선정보다 오래 기억된다./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엘리너의 전남편인 루이 7세도 이혼 1년 뒤 33세 나이로 바르셀로나 출신인 13세 공주와 재혼, 3년이 지나 첫딸 마르그리트를 낳았다. 새로운 프랑스 왕비는 20세 때 둘째 딸을 출산하다 죽었다. 루이 7세는 두번째 아내 사망 5주 후에 세번째 아내를 맞아들였다. 둘째 아내와 동갑인 상파뉴 백작 가문 출신의 세번째 아내는 25세 때 루이 7세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았다. 그가 명군으로 손꼽히는 ‘존엄왕’ 필리프 2세다. 얽히고 설킨 ‘고귀한 혼맥’의 끝판왕은 엘리너와 헨리 2세의 둘째 아들, ‘젊은 왕 헨리’와 루이 7세와 두번째 아내 사이의 첫째 딸 마르그리트가 결혼했다는 사실. 재혼한 부부끼리 각각 전남편과 전처의 딸과 아들을 상대로 장인이 되고 시어머니가 됐다는 얘기다. 정략 결혼의 또 다른 희생양이었던 두 사람은 사이가 극히 안 좋아, 마르그리트가 출산을 이유로 파리로 돌아가 아이를 사산한 뒤부터 별거로 들어갔다. ‘젊은 왕 헨리’가 아버지 헨리 2세에 반란을 일으키고 실패한 끝에 상심 속에 살다 32세로 사망한 뒤 마르그리트는 헝가리 국왕과 재혼했다. ** 영국 민요에 로빈 후드 전설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4세기 중후반으로 실존 인물 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리처드 왕과 존 왕이 왕권을 겨루던 당시 영국의 숲이 이미 황폐화하기 시작해 의적들이 몸을 숨기고 근거지를 마련할 대규모 숲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목재 자원이 고갈된 영국은 대헌장 서명 시기를 전후해 서민들의 난방용으로 연탄을 캐기 시작했고 탄광에 고이는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 장치가 절실했다. 시간이 흘러 영국에서 처음 나온 증기기관은 모두 탄광의 배수용이었다. 증기기관은 18세기 초에야 나왔지만 탄광의 철로와 광차 등은 일찍부터 개발돼 증기기관이 운송의 도구로 확장되는 데 일조했다. -
잠수함의 탄생…USS-1 홀랜드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17 06:00:001897년 5월17일 미국 뉴저지주 엘리자베스항 크레슨트 조선소. 특이한 모양의 배 한 척이 도크를 빠져 나와 물에 떴다. 굴뚝도 선실도 없이 검은색 선체만 보이던 이 배는 잠수정이었다. 이름은 홀랜드Ⅵ호. 아일랜드 태생의 교사 겸 엔지니어 존 홀랜드(John Holland·당시 57세)가 제작한 홀랜드Ⅵ호에는 보이지 않는 비밀 장치가 많았다. 무엇보다 항해 방식이 남달랐다. 잠수해서 작전할 때면 홀랜드Ⅵ호는 배터리로 움직였다. 수상에서는 내연기관을 돌려 항해하면서 배터리를 자동 충전했다. 크기가 16.4m로 작고 무게도 74t(수중 배수량 기준, 수상 항해시에는 64t) 남짓했던 홀랜드Ⅵ호는 동력원이 가솔린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기본적인 구조가 현대의 디젤 잠수함과 같았다. 무장으로 어뢰도 장착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잠수와 부상을 위해 바닷물과 공기를 채울 수 있는 밸러스트 탱크도 갖췄다. 운항 방식과 구조 설계에서 홀랜드Ⅵ호는 현대식 잠수함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최초의 실용적 잠수함으로도 손꼽힌다. 서구에서 잠수 선박은 오랜 소망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언급했고 레오나드로 다빈치도 설계도를 그렸다. 16세기 중반에는 노를 저어 움직이는 잠수노선이 등장했고 미국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에서도 원시적 형태의 잠수정이 전과를 올렸다. 잠수함은 소설에도 나왔다. 기선의 아버지인 로버트 풀턴이 나폴레옹에게 연구자금을 받아 제작한 잠수정 ‘노틸러스’호는 채택되지도 성공하지도 못했지만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1869년)로 다시 살아났다.(미 해군이 1951년 8월 건조한 세계최초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의 함명도 노틸러스다) 쥘 베른보다 13살 아래였던 존 홀랜드는 청년 시절 해저 2만리를 읽으며 잠수함 제작의 꿈을 키웠다. 존 홀랜드가 건조한 홀랜드Ⅵ호를 3년 동안 시범 운행해본 미 해군은 1900년 15만 달러를 주고 사들였다. 홀랜드Ⅵ호는 독립전쟁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의 잠수정으로는 세 번째. 그러나 정식으로 함정 목록에 오른 잠수정은 홀랜드Ⅵ호가 처음이다. 처음으로 실전배치됐기에 잠수함 식별번호 1번(USS-1)도 붙었다. 홀랜드의 성능에 만족한 미국은 6척의 개량형을 더 주문해 세계 최초로 잠수정단을 편성했다. 홀랜드급의 성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잠수함을 ‘신사답지 못한 비겁한 무기’라고 조롱하던 영국도 홀랜드Ⅵ형을 확대 개량한 홀랜드Ⅶ형을 사들였다. 일본 역시 약 5년을 저울질한 끝에 홀랜드Ⅶ형 5척을 조립생산하고 발전형 2척을 일본 기술로 생산하는 계약을 맺었다. 당시 일본 해군 장교들의 치밀한 사전조사에 감동한 홀랜드는 잠수함의 설계도면은 물론 설비와 치공구 등의 설계도 일체를 넘겨줬다고 전해진다. 네덜란드와 러사아도 홀랜드Ⅶ형을 1척씩 도입해 발전시켰다. 당시에는 글로벌 잠수함격이었던 홀랜드급은 미국과 영국, 일본, 소련 잠수함의 모태였던 셈이다. 미국이 USS-1 홀랜드를 ‘선박으로 재활용하지 않고 반드시 부순다’는 조건 아래 단돈 100달러에 고철로 매각한 1913년 무렵, 각국은 엔진을 디젤로 바꾸고 함체를 키워 대양형 잠수함을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1·2차 대전에서 잠수함을 활용한 통상파괴작전이 전세를 뒤집을 만큼 위력을 발휘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독일이 애초부터 잠수함대 사령관이 원하던 300척의 U-보트로 전쟁을 시작했다면 연합국의 승리는 훨씬 어려웠을지도 모른다.(제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독일의 잠수함은 65척이었다) 잠수함은 오늘날 더욱 유용한 무기체계다. 조용히 접근해 어뢰 한 방으로 거대한 함정을 격파하는 잠수함에 대항할 수단이 많지 않다. 한국은 잠수함을 가장 효율적인 전략무기로 인식하고 세력을 확충해 왔으나 주변국에 비해서는 미약한 수준이다. 원자력 추진 잠수함 확보도 논의만 무성할 뿐 앞이 보이지 않는다./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곡물법 폐지, 자유무역과 양당정치를 낳다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16 06:00:001848년 5월16일 새벽 4시, 영국 의회가 격론 끝에 곡물법 폐지안을 표결에 부쳤다. 디즈데일리 의원 등이 장시간 반대 연설에 나섰으나 결과는 통과. 찬성 348표 반대 251표, 기권 159표가 나왔다. 중세 시절부터 적어도 650여년(영국에서 곡물법에 대한 첫 기록은 1194년)을 내려온 곡물법은 이로써 사라졌다. 오래된 법률이 없어지며 남긴 파장은 참으로 컸다. 먼저 영국의 정치와 경제는 물론 국제 무역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근대경제학이 태동한 이래 최초의 논쟁이 바로 곡물법 폐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칼 마르크스도 ‘자본론’ 여러 곳에서 곡물법을 다뤘다. 곡물법 폐지를 이끌었던 로버트 필 당시 영국수상은 오늘날까지 ‘정파의 이익에 휘말리지 않는 정치인의 표상’으로 칭송받는다. 도대체 곡물법이 뭐길래. 곡물법은 나라와 시대(로마 공화정에서도 곡물법이 있었다)마다 성격이 달랐으나 영국에서는 국내 농가 보호와 수입 농산물 억제가 골간. 1815년에 마련된 곡물법은 이런 경향이 특히 강해 값싼 외국산 농산물 수입을 원하는 산업자본가들의 원성을 샀다. 1815년 곡물법의 골자는 밀 1쿼터(약 12.7㎏) 가격이 80실링을 밑돌 경우 외국산 밀의 수입 금지. 법으로 가격을 보장한 셈이다. 영국이 이런 곡물법을 만든 이유는 간단하다.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토지 귀족과 지주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과의 전쟁 직전까지 46실링 수준이던 밀 1쿼터 가격이 전쟁 중 177실링으로 올랐다가 종전 후 60실링으로 떨어지자 ‘국내 농가’를 위해 마련한 게 1815년 개정 곡물법. 말이 ‘국내 농가’지 쓸만한 토지는 귀족이나 지주들이 보유하던 시대였다. 당연히 반발이 따랐다. 산업자본가들은 밀 가격이 오르면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구가 거세진다는 점에서 곡물법 반대와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섰다. 주식 중개인 출신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는 폐지론을 거들었다. 자유무역으로 곡물 가격이 낮아지면 노동자의 저임금과 기업가의 고이윤을 낳고 자본 축적과 고용 기회 확대, 경제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펼쳤다. 리카도에 맞선 곡물법 폐지 반대론의 대표주자는 토마스 멜서스. 목사이자 인구론의 저자로 유명한 멜서스는 농산물 보호 무역이 국내 생산 및 수요의 증가와 고가격을 낳고 농가 소득이 높아져 결국 사회 전체의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중농주의적인 논리를 내세웠다. 친구 사이였던 리카도와 멜서스의 신문 지면을 통한 논전은 경제학 논쟁의 시초격이다. 산업자본가들은 곡물법 폐지를 위해 수많은 방안을 짜냈다. 책자와 팸플릿을 찍어서 뿌리는 전통적 홍보 방법은 물론 조직화에 나섰다. 조직화의 산물인 ‘곡물법반대연합(1836년 결성)’은 대중 계몽운동에서 서명서 제출, 선거인 명부 열람 및 수정을 통한 ‘유권자 창출’과 ‘자유무역 지지론자의 하원 진출’까지 다양한 활동을 펼쳐 최초의 ‘정치 압력 단체’로도 손꼽힌다. 온갖 노력에도 법률 개정이나 폐지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폐지를 둘러싼 대립을 ‘지주와 노동자’라는 이분법으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주 계층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1842년부터 3년 연속 의회에 폐지 동의안이 상정됐어도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토리당(1836년에 보수당으로 개칭)의 벽에 막혔다. 철옹성 같던 곡물법은 끊임없는 반곡물법 운동과 참정권 요구,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무너졌다. 반곡물법 운동이 선거법 개정 요구와 맞물려 사회 불만 요소로 자리 잡고 아일랜드의 주식인 감자 돌림병으로 대기근이 발생, 수십만 아사자가 나오는 상황에 봉착한 로버트 필 수상은 1845년 말부터 생각을 바꿨다. 곡물법을 없애지 않는 한 영국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판단한 그는 폐지론자로 돌아섰다. 필 수상에게는 정치적 모험이었다. 토지 귀족과 지주 계층을 기반으로 삼는 토리당 출신의 수상이 반(反) 토리적인 곡물법 폐지에 앞장 섰으니까. 폐지안의 하원 의결을 주도한 필 수상은 상원 통과까지 마친 다음 수상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필의 배신’에 분노한 골수 토리당원들은 보수당 깃발 아래 뭉쳤다. 토리당 내 곡물법 폐지론자와 휘그당의 자유주의자들은 함께 자유당을 만들었다. 영국 최초의 양당정치가 이렇게 선보였다. 곡물법 폐지의 경제적 파장은 더욱 컸다. 곡물법 논쟁이 한창이던 시절, 런던에 거주하며 대영제국 도서관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칼 마르크스는 곡물법 폐지를 자본주의 확산의 결정적 계기로 여겼다. 자본론에 ‘곡물법 폐지는 토지귀족에 대해 산업자본이 거둔 승리의 마침표’라는 구절도 나온다. 과연 그럴까. 마르크스의 평가와 달리 산업자본이 일방적 승리를 거둔 것 같지 않다. 토리당이 우려했던 영국 국교회의 붕괴나 토지 귀족의 몰락도 없었다. 영국의 성장에 곡물법 폐지는 힘을 보탰다. 당장 노동계급을 비롯한 일반 가정의 밀가루와 설탕, 버터와 햄, 베이컨 소비가 크게 늘어났다. 생활 수준의 향상은 사회적 불만을 가라 앉혀 영국 사회의 안정에 기여했다. 농업관세를 철폐한 영국은 모든 부분의 무역을 자유화한 결과 영국 상품의 수출도 크게 늘었다. 산업혁명과 기술 혁신이 맞물리며 영국은 20세기 초반까지 자유무역 속에 번영 가도를 달렸다. 영국이 과연 곡물법 폐지의 덕을 봤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지 않지만 확실한 점은 한 가지 있다. 로버트 필 수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소속 정당의 당론, 이해관계를 떠나 결단을 내린 위대한 정치인으로 추모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앞두고 여야가 대립할 때마다 ‘필 수상의 결단’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지구 둘레의 20%에 해당된다는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선이 북위 49도에 맞춰진 것도 곡물법 직후(1846년 6월15일). 북미 대륙 서부는 1818년 이래 미국과 영국의 공동 영토로 인정됐으나 미국의 서부개척민이 급증하면서 영유권 시비가 불거졌던 상황. 양국에서 전쟁 불사론이 퍼지는 가운데 아일랜드 대기근과 곡물법 폐지 논란, 정계개편 등 현안에 눌려 있던 로버트 필 총리가 먼저 타협안을 내놓았다. 미국은 겉으로만 큰소리쳤을 뿐 내부 여건이 편안하지 않던 터. 북부와 남부의 대립이 깊어지고 텍사스 병합을 놓고 멕시코와 갈등을 빚던 처지여서 영국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국경선이 굳어졌다. 곡물법 폐지 논쟁에 등장하는 주체들은 대부분은 명분과 실리를 챙겼다. 영국의 양당이 그렇고 로버트 필 수상 역시 그렇다. 경제학자들도 이름을 남겼다. 미국과 캐나다도 덕을 봤다. 곡물법 폐지 논쟁이 없었다면 과연 두 나라의 국경선이 평화롭게 확정될 수 있었을지 미지수다. 곡물법 논쟁 시기에 확연하게 피해 본 곳은 딱 한 곳. 수십만이 굶어 죽은 아일랜드는 어떤 보상도 얻지 못했다. 역사는 약자를 늘 비켜간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히틀러 몰락의 숨은 이유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12 06:00:00질문 하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의 기계화 비중이 가장 컸던 나라는 어디일까. 독일군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아니다. 답은 미국과 영국. 미국은 식민지인 필리핀에서 1개 기병연대를 운용했을 뿐이다. 영국도 전쟁이 본격화하기 전에 기병대를 기계화부대로 바꿨다. 영연방에서 말을 전투용으로 사용한 곳은 인도기병연대 등 식민지군 일부다. 여기서 당연히 의문이 생길 법하다. 그렇다면 독일은? 독일군은 전쟁 초반 전차를 앞세운 신속한 돌파로 ‘전격전(電擊戰·Blitzkrieg)’이라는 신화를 남겼으나 오히려 말의 힘에 의존한 군대로 손꼽힌다.* 보병사단마다 말 5,375마리를 편제한 독일군이 전쟁 내내 부린 말은 약 275만 마리. 평균 110만 마리가 보급품은 물론 탄약과 대포를 운반하고 심지어 현대 미사일의 원조라는 V-1, V-2 로켓까지 날랐다. 왜 그랬을까. 연료가 심각하게 부족했던 탓이다. 지도를 떠올리면 독일의 연료 수급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중동의 유전이 세 곳에서만 발견됐던 당시 원유 매장지는 북중미와 소련, 루마니아와 보르네오 정도.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식민지를 모두 상실한 독일 국내에서도 기름이 솟지 않았다. 대신 석탄은 풍부했다. 독일 공업생산의 30% 이상을 차지한 루르 지방은 유럽 최대의 탄광으로도 이름 높았다. 독일 과학자들은 일찍부터 유연탄으로 눈을 돌렸다. 원유와 석탄의 성분은 기본적으로 탄소. 원유는 수소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독일인들은 석탄에 수소를 불어넣으면 기름으로 바꿀 수 있다고 여겼다.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Friedrich Bergius)는 1913년부터 석탄을 먼지같이 부순 뒤 수소첨가물과 섞어 액화시키는 방식으로 합성석유(synthetic fuel)를 만들어냈다. ** 전쟁을 노리던 히틀러는 1933년 집권하자마자 석유 생산을 늘리는 방법부터 찾았다. 전쟁 직전까지 합성석유 생산공장 건설에 매진한 결과 독일은 연간 450만 배럴 생산시설을 갖췄다. 인공 석유공장으로는 세계 최대규모로 견줄 나라가 없었지만 전체 석유시장 기준으로는 말 그대로 조족지혈이었다. 1938년 미국과 독일의 석유 소비량이 10억 배럴 대 4,400만 배럴이었으니까. 전쟁 기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이 군사원조를 본격화한 1941년부터 종전(1945년)까지 유럽과 아프리카 전선의 연합국에게 제공한 석유만 약 60억 배럴. 독일과 이탈리아의 사용량은 13억 배럴을 밑돈다. 석유 부족은 독일이 승승장구하던 전쟁 초기에도 똑같았다. 1938년 합병을 위해 오스트리아로 진군하던 독일군 2개 전차사단은 예비 연료도 없어 민간 주유소에서 기름을 사서 썼다. 1939년 폴란드 침공의 숨은 원인 중 하나가 소규모 유전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나마 기름이 없어 진격이 늦어지는 통에 독일은 폴란드 유전의 30% 밖에 못 챙겼다. 나머지는 폴란드를 나눠 삼킨 소련의 차지. 만성적인 연료 부족을 겪던 독일군이 영국 유럽원정군과 프랑스군을 꺾으며 순식간에 유럽 서부를 점령한 수법도 비슷하다. 탈취.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독일군이 전리품으로 챙긴 석유만 2,000만 배럴이 넘는다. 연료를 크게 잡아먹는 전격전으로 소비한 1,200만 배럴을 빼도 800만 배럴이 고스란히 남았다. 문제는 딱 여기까지가 정점이었다는 사실. 이탈리아를 구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파병된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 군단은 가용 장비의 절반만 움직였을 만큼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반면 연합국들은 하루에 400만 배럴을 쏟아내던 최대의 산유국 미국이 제공하는 석유를 아낌없이 써댔다. 합성석유의 질에도 문제가 있었다. 승부처였던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에서 영국 전투기들은 미국이 제공하는 옥탄가 99 이상의 고급휘발유를 사용한 반면 독일 공군 전투기 연료는 옥탄가 87에 머물렀다. 양산을 위해 품질을 희생시킨 결과인 낮은 품질의 휘발유 때문에 독일 공군 전투기들의 런던 상공 체공시간은 길어야 15~20분에 불과했다. 공중전에서 밀릴 수밖에. 히틀러 최대의 오산이었다는 소련 침공도 석유자원 확보라는 차원에서는 이해가 가능하다. 루마니아 유전을 확보해 한숨 돌린 히틀러는 근처의 소련군을 꺼렸다. 더욱이 세계 2위의 산유국이던 소련 원유의 84%가 묻힌 코카서스 유전지대에 눈독을 들였다. 특히 전체 매장량의 72%를 차지하는 바쿠유전이 탐났다. 히틀러의 기대대로 파죽지세로 소련군을 격파하던 독일군은 예상하지 못하던 복병을 만났다. 연료가 부족하면 적의 보급품을 빼앗는다는 독일군 기갑부대의 눈물겨운 전통이 통하지 않은 것. 진격 속도가 워낙 빨라 소련군이 연료와 물자를 파괴할 틈도 없이 빼앗았으나 유종(油種)이 달랐다. 가솔린에 익숙한 독일군에게 소련군이 사용하던 디젤 연료는 그림의 떡이었다. 연료 부족 속에 동장군까지 만난 독일군은 수렁에 빠졌다. 전세는 이때부터 기울었다. 독일의 내리막길. 소련군에 밀려 루마니아 유전까지 내줬어도 독일은 기댈 구석이 있었다. 바로 합성석유 공장. 하루 생산량이 12만 4,000배럴까지 늘어난 합성석유는 독일군 전체 유류사용의 57%에 이르렀다. 항공기의 95%는 합성석유로 날았다. 일말의 기대도 잠시. 1944년 5월12일, 독일에는 절망이 찾아왔다. 미 육군항공대 *** 소속 B-17, B-24 대형 폭격기 886대의 융단 폭격으로 합성석유 대형공장이 쑥밭으로 변한 것. 피폭된 5개 도시의 생산시설을 돌아본 독일 군수장관 알버트 스피어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이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미군은 이날의 폭격으로 두 가지 목표를 다 이뤘다. ‘353 작전’이란 이름 아래 진행된 대규모 폭격의 첫째 목표는 대형시설 파괴, 두 번째 목표는 ‘합성석유 공장지대에 집중 배치된 독일 전투기들의 저항력 확인’에 있었다. 미 육군 항공대는 독일 공군의 저항이 거셀 것으로 보고 폭격기 편대에 모두 735대의 호위전투기(P-38 153대·P-47 201대·P-51 381대)를 딸려 보냈었다. 미군의 피해는 폭격기 46대, 전투기 7대 추락. 적지 않았어도 미군의 예상을 밑돌았다. 다음날부터 미군은 마음껏 합성석유 공장을 두들겨 팼다. 연료 생산시설을 폭격받은 독일은 더 극심한 연료 부족 사태에 빠졌다. 미국과 영국의 폭격기를 두 눈으로 보면서도 전투기를 띄우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연합군이 작은 합성석유공장까지 샅샅이 폭격한 통에 1944년 9월 항공연료 생산량은 4월 말 대비 6%에 불과한 하루 3,000배럴 수준으로 떨어졌다. 연료 부족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제트 전투기를 날릴 수도, 조종사를 훈련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6.6) 역시 합성석유 생산시설이 파괴되지 않아 독일 공군의 연료가 충분했다면 실패로 귀결됐을지도 모른다. 2차 대전 최후의 승부처인 벌지 대전투에서 독일군 기갑부대가 승리를 눈앞에서 놓친 것도 전차의 연료가 바닥난 탓이다. 결국 독일은 석유공장 피폭 1년 만인 1945년 5월 연합국에 손을 들었다. 일본의 패망 원인도 석유로 풀이할 수 있다. 일본은 기세 좋게 보르네오 유전을 점령했으나 유류 수송대책이 미비해 독일 이상의 연료 부족 사태를 겪었다.**** 히틀러의 생명줄을 끊은 폭격 이후 석유의 중요성을 더욱 중하게 인식한 미국은 석유 패권 유지에 사활을 걸었다. 석유자원이 가장 많이 깔린 중동지역에 총성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아랍과 이스라엘의 대립과 더불어 석유 헤게모니를 둘러싼 각축 탓이다.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은 유전 발굴과 대체에너지 개발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한국은 어디에 있을까. 중간도 못 된다. 석유 ‘자주’개발은 물론 ‘자주국방’ 구호에서 ‘자주’가 눈에 안 보인지 오래다. 동맹에만 점점 더 기대는 안보도 위험하고 아무리 저유가시대라지만 에너지는 치명적인 외통수다. 독일이 당했던 것처럼. 합성석유에 대한 관심 역시 그렇다. 언젠가는 필요해질 것이라는 인식 아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필두로 기술개발 전쟁이 한창이다. 석탄 액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자원으로 재활용하는 기술까지 선보였다. 시장규모가 수백조원대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은 어디쯤 있을까. 2030년까지 하루 10만 배럴의 생산시설을 마련한다는 청사진만 한 장 달랑 걸린 상태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독일보다 말을 더 많이 운용한 참전국은 소련 뿐이다. 350만 마리의 말을 병참과 전투용으로 썼다. 독소전쟁 개전 직전까지 소련군은 코사크 기병을 포함해 약 80개 기병사단을 운용했다. **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1884~1949) 이전에도 인공석유 추출 이론이 전혀 없지 않았으나 그의 연구결과는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합성 석유 추출 기술 고도화에 매달리던 베르기우스의 인생 정점은 1931년. 합성석유를 개발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조국 독일의 패전 이후 베르기우스는 목재의 사료 전환과 대용식 개발을 연구하다 1947년 아르헨티나로 이주, 2년 뒤 죽었다. *** 중(重)폭격기는 당연히 공군에서 운용하는게 상식이나 당시에는 공군이 창설되기 전이어서 육군이 공군의 기능을 맡았다. 미 해군의 항공전력은 아직 남아 있어도 전투기와 지원기 중심이다. 오늘날 전세계를 통틀어 본격적인 전략폭격기를 대량 운용하는 곳은 1947년 육군에서 독립해나간 미국 공군 뿐이다. **** 일본은 보르네오의 유전을 제대로 활용 못 했다. 첫째 이유는 철수하기 직전 네덜란드 기술자들의 파괴 탓. 두 번째는 미 해군의 잠수함대가 유조선을 비롯해 일본 상선대를 철저하게 격침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궁여지책으로 초대형 고무 튜브를 제작해 바지선으로 끌어오는 방법까지 동원했으나 모조리 실패하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조선을 더욱 짜냈다. 가정의 식기를 공출해가고 전투기의 기름을 만들겠다며 어린 학생들을 동원해 소나무의 송진까지 긁어갔다. 일제는 ‘소나무 뿌리 200개면 1시간 비행이 가능하다’며 조선의 산을 헤집었다. 조선의 송진은 어떻게 됐을까. 일제는 송진에서 뽑아낸 인조 기름 약 3,000 배럴을 최후의 자살공격용으로 비축해놓았다. 정작 종전 직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이 실험한 결과 연료로서 가치는 전혀 없는 것으로 판명났다. 시동도 걸기 전에 엔진에 달라붙었다고. -
비잔티움 천년제국의 탄생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11 04:00:00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즉위 25주년 기념축제가 한창이던 330년 5월11일,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 장장 40일간 계속된 축제의 절정에서 도시 전체가 들떴다.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 건설 공사 완공과 겹쳤기에 기쁨이 더욱 컸다. 작은 변방이던 도시 규모를 4배로, 성곽 규모는 6배로 늘리는 대역사에 걸린 시간만 4년. 성 이레네 성당의 미사에 참석한 황제는 도시 이름을 자기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로 바꾸고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다고 선언했다.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다. * 수도를 옮긴 이유는 새로운 구심점을 원했기 때문. 3세기 후반부터 4~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혼란을 친아들까지 죽여가며 수습하고 1인 체제를 구축한 마당에 새 출발의 상징이 필요했다.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역에 말라리아가 들끓었다. 동부의 경제력이 로마가 위치한 서부를 능가했다는 점도 천도의 요인으로 꼽힌다. 페르시아 같은 동방의 전제군주 체제도 평생을 권력 강화에 매진했던 콘스탄티누스의 마음을 끌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오랜 수도였던 로마를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절대권력을 꿈꾸던 그는 공화정에 대한 향수와 원로원의 입김이 강한 로마가 싫었다. 임종(337년) 직전에서야 개종했지만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기독교를 공인했을 만큼 종교를 정치와 통치에 적절히 이용했던 그는 다신교 숭배사상에 젖은 로마를 수도로 안고 있는 한 제국의 중흥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당초 천도 후보지는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 트로이 평원이었으나 비잔티움에 낙점이 찍혔다. 바다를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선정이 뛰어난 덕분인지 제국은 숱한 위기를 극복하며 오스만튀르크에 점령될 때까지 1,123년 18일을 존속했다. 예전의 로마와 달리 대외 정복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어도 전성기에는 오늘날 그리스와 터키·이탈리아·스페인 서남부·불가리아·유고·시리아·이스라엘·이집트, 아프리카 북부 해안 전역을 아울렀다. 지중해 주변의 땅이 모두 제국의 영토였다. 융성과 쇠퇴를 거듭했어도 동서고금을 통틀어 단일 정치체제 아래 비잔티움 제국만큼 오랫동안 영속한 나라도 없다. ** 비잔티움 제국을 오랫동안 지탱해준 요인은 경제력.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요충지여서 중계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서유럽이 중세 암흑기에 빠진 채 화폐제도까지 무너졌을 때 비잔티움 제국이 발행한 노미스마(헬라스어, 라틴어로는 솔리두스) 금화는 제국이 유지되는 내내 높은 순도를 자랑하며 당시 알려진 세계의 기축 통화로 통했다. ‘중세의 달러’였던 셈이다. 처음부터 권문세가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자영농을 적극 육성한 점도 탄탄한 경제 구조를 만들었다. 로마제국 시절 권력자들의 대농장(라티푼디움)에 눌려 몰락했던 소규모 자영농이 다시 살아났다.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와 달리 적극적으로 정복 사업에 나서지 않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농지를 떠나 전쟁터로 떠나기를 꺼리는 농민들이 병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존재는 우리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어떤 국가보다 컸다. 스스로 로마인이라고 인식하며 살았던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을 페르시아와 사라젠 제국, 몽골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낸 최일선 방파제이자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보관창고였다. 근대의 씨앗을 뿌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운동도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년) 이후 피란 온 비잔틴 학자들에 의해 지펴졌다. 비잔틴이 화폐경제와 교역을 통해 발전시킨 비단·섬유산업은 서유럽으로 이식돼 종국에는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기독교의 안식일(주일·일요일)도 비잔티움 제국을 세운 콘스탄티누스가 정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과 러시아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국 초기 펼쳐진 삼위일체론과 단성론간 논쟁 끝에 이단으로 몰려 동방으로 쫓겨난 단성론의 아리우스파 교리는 무함마드가 세운 이슬람의 교리와 닮은꼴이다. 러시아의 생성도 마찬가지.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정교회의 승계를 표방한 슬라브 귀족들이 종교적 열망으로 뭉쳐 국가로 발전한 나라가 러시아다. 건국 초 러시아는 로마-비잔티움 제국을 잇는 ‘제 3의 로마’라고 주장하며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유럽의 빗장이며 문화의 저장고이자 자양분이었음에도 비잔티움제국은 망각의 대상이다. 왜 그럴까. 서유럽 중심의 사고방식 탓이다. 15세기 후반 이후부터 세계사의 흐름을 주도한 서유럽 특유의 우월감이 착시와 망각을 낳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편향의 정도가 더욱 심하다.***/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비잔틴 제국의 건국시기를 330년보다 6년 앞선 324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러시아 태생의 유고슬라비아 사학자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는 ‘비잔티움 제국사(1940)’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비잔티움 제국 연구의 기본서로 꼽히는 이 책에서 게오르크 교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숙적이었던 동부 황제 리키니우스를 격파한 324년을 비잔티움 제국의 기원으로 간주한다. 여기에는 로마를 재통일했기에 서로마보다 동로마제국이 진정한 로마의 후예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 고조선이 더 오래 지속했으나 단일 정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비잔티움제국의 존속 기간은 로마를 빼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정한 이후를 합산한 것이다. *** ‘서구 안의 오리엔탈리즘(비서구권 비하)’으로 보일 만큼 서유럽의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와 같은 시대를 살며 ‘로마제국 쇠망사’를 저술한 에드워드 기번의 영향이 크다. 기번은 로마제국의 영광을 강조한 나머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서는 폄하로 일관했다. 옥스퍼드 사전에 실린 ‘byzantine mind’라는 표현은 음모와 막후공작에 능하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다. 황제 자리를 지키려 아들의 눈을 찌른 비정한 어머니와 40세 연하의 10대를 골라 공동황제에 올린 미망인 황제의 권모술수도 있었으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관심권 밖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15권짜리 ‘로마인 이야기’에는 비잔티움 제국은 극히 일부분만 나온다. 서구의 비잔티움 제국 폄하에는 다양성에 대한 시기심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 외교관 출신의 역사학자인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지은 ‘비잔티움 연대기’에 등장하는 역대 황제들의 이름에는 로마인의 후예 뿐 아니라 그리스인은 물론 아랍계, 심지어 히브리계까지 등장한다. 서양 문물의 뿌리인 그리스의 영역에서 로마를 승계한 비잔티움 제국까지 아래로 보는 시각은 편견으로 가득한 오리엔탈리즘의 단면이다. -
민족 배신과 왜곡, 승리... 세포이 항쟁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10 06:00:001857년 5월10일, 인도 북부 메루트시. 영국 동인도회사의 식민지군에 소속된 인도인 병사(Sepoy)들이 총을 들었다. 저항의 도화선은 신형 소총. 화약과 탄알을 따로 장전하는 구식 소총 대신 화약·탄알 일체형 탄약을 사용하는 ‘1853년식 엔필드 소총’을 세포이들이 꺼렸다. 소나 돼지기름을 묻힌 탄약포가 문제였다. 힌두교와 이슬람교도 세포이들은 동물의 기름이 묻은 탄약포를 입으로 물어뜯어 탄약을 꺼낸 뒤 장전해야 한다는 점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였다. 종교적 금기를 입과 맞추게 한 처사가 기독교로 개종을 유도하기 위한 술수라고 여겼기 때문. 가뜩이나 연간 400만 파운드씩 짜내던 영국의 경제 침탈로 불만이 높아진 상황. 세포이 병사들이 종교적 이유로 총기 수령과 사격 훈련을 거부하자 영국인 장교들은 군법회의를 열어 주동자들을 감옥에 보냈다. 징역 10년형. 세포이들은 여기에 분노했다. 메루트시에 주둔한 동인도회사 식민지군 3개 연대에 소속된 2,357명은 영국인 장교들을 죽이고 옥을 부숴 동료들을 구출해냈다. 세포이 병사들의 봉기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인도 전역에 퍼진 세포이 총병력 23만 8,000명 가운데 10만여명이 영국의 침탈에 항거하자 농부와 자영업자, 소규모 상공업자들이 따라 붙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사례가 잇따랐다. 세포이를 주축으로 하는 인도인 군대는 델리로 진격해 영국에게 폐위된 무굴 제국 황제를 옹립하며 인도 독립의 기치를 올렸다. 영국은 몸서리쳤다.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인도 침탈에 나서지 꼭 100년. * 크고 작은 저항이 있었어도 특유의 ‘분열을 유도하고 통치하는 방식(divide & rule)’으로 위기를 넘기며 인도의 지배권을 굳혀가던 터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으니 충격이 컸다. ** 세포이 항쟁으로 인도는 곧 독립을 회복할 것 같았으나 결과는 정반대. 세포이 항쟁은 실패하고 말았다. 영국의 신무기와 인도 상류층의 배신, 분열 탓이다. 결정적으로 시크교도와 네팔 쿠르카 용병이 영국 편에 붙었다. 봉기 1년 만에 주요 거점을 잃은 인도인들은 유격전을 벌였나 1859년 4월 최후 저항의 불씨마저 꺼졌다. 세포이 항쟁을 겪은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한 간접통치에서 정부의 직할 통치로 지배 방식을 바꿨다. 1873년 빅토리아 여왕은 황제의 관을 두 개 썼다. 대영제국 황제 겸 인도 황제. 황제 밑에는 왕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했을까. 변절한 인도 상류층이 영국에 붙어 호사를 누렸다. 인도의 경제는 더욱 망가졌다. 항쟁 이후 영국의 공업억제책으로 인구의 50% 수준이던 농민 비중이 75%로 늘어났다. 농민층의 증가에도 인도인들은 1890년까지 1,500만명이 굶어 죽었다. 독립 직후 파키스탄과 갈라진 것도,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시크교도 문제도 항쟁 이후 본격화한 영국의 지역과 종교ㆍ계층에 대한 이간·분열책 탓이다. 더욱 고약한 것이 있다. 인식과 사고방식까지 영국화한 것이다. 세포이 항쟁 발생 직후 6주간 한 줄도 보도하지 않던 영국 언론은 경쟁자였던 프랑스에서 사실을 알리자 보도를 쏟아냈다. 철저한 왜곡으로. 이옥순 인도문화연구원장(연세대 교수)의 저서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에 따르면 영국은 ‘인도인들이 고귀한 영국 여인들을 성폭행한다’는 보도를 연이어 올렸다. 여성을 내세워 세포이의 야만과 비겁을 강조한 영국의 논리를 이 교수는 ‘젠더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간파한다. *** 여성을 잔인하게 다루는 동양에 대한 서구의 응징은 의무라는 등식이 더욱 굳어졌다.**** 압제에 항거하던 인도 세포이 항쟁의 결과는 비극적이다. 인도는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세포이 항쟁은 무엇을 남겼을까. 오늘날의 인도는 내일의 세계를 주도하는 주역이다. 중국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인구 대국,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무수히 나온다. 인도의 미래를 밝히는 가치는 무엇일까. 영국 편에 섰던 사람들의 부귀영화일까. 세포이의 저항 정신일까. 네루의 ‘세계사 편력’에 답이 있다. 네루에 따르면 영국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잘못을 저질렀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국민이었던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가장 뒤떨어진 보수적인 계급과 결탁했다…(중략)…영국인들이 우리 내부의 불화를 이용한다면 서로 싸우는 우리가 나쁜 것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1757년 6월23일 인도 서부의 촌락 플라시에서 발생한 전투는 세계사의 변곡점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이 각축전을 벌이던 인도의 지배권이 영국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플라시 전투의 군세는 프랑스와 현지인 병력을 합쳐 5만명. 영국 동인도회사 군대는 인도 병사 2,100명을 합쳐서 3,150명에 불과했다. 대포도 프랑스측이 53문으로 9문 밖에 없던 영국 측을 앞섰다. 결과는 참호전을 철저하게 준비했던 영국의 승리. 영국은 이로써 인도 지배권을 굳혔다. 패배한 프랑스는 침략의 발길을 인도차이나(베트남)로 돌렸다. 플라시 전투는 경제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 최대의 면직공업국이던 인도는 이 전투를 계기로 영국 수출이 급격하게 늘어났으나 무역수지 방어를 걱정하던 영국은 인도 수탈과 산업혁명과 기술혁신 과정을 거쳐 면직 공업에서도 인도를 눌렀다. 세포이 항쟁은 100년 동안 참고 참았던 폭발이었다. ** 플라시 전투 이후에도 인도의 군사력은 영국을 압도했다. 6개 왕국으로 이뤄진 인도의 군사력은 영국 동인도회사 군대의 수십 배에 달했으나 항상 졌다. 분열됐던 탓이다. 인도는 ‘분할과 지배’ 정책을 교묘하게 악용한 영국에 늘 당했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앞잡이였던 인도의 귀족들과 상공인들은 부귀영화를 누린 반면 인도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었다. *** 동양인이 유럽 여성들을 농락한다는 성적 담론은 영국이 시초가 아니다. 근대 이후 구미 국가에서는 아시아인 남성이 백인종 여성을 성폭행하는 그림과 시, 소설을 쏟아냈다. 미국이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을 제정해 이민을 제한할 때도 문학과 예술은 정치적 수단의 전위부대였다. 이 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중국인들은 광산 개발에서 철도 부설까지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았다. **** 당시 영국 언론의 보도 성향은 서구가 동양을 고의적으로 왜곡한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물론 세포이 항쟁 시기 인도인들의 영국 여성에 대한 폭행은 없지 않았다.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력’에는 이와 관련된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인도인들의 영국인에 대한 가혹행위를 맹공격했던 네루는 ‘인도인의 잔인함도 있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잔혹성은 훨씬 더 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
2008년 글로벌 위기의 데자뷔, 1873년 공황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09 06:00:00대공황. 1929년 10월 월가의 주식 대폭락으로 시작된 1930년대 경기 침체를 일컫는 말로 굳어졌으나 원조는 따로 있다. 1873년의 공황이 바로 그 것. 1930년대를 강타한 대공황 이전까지 ‘대공황’이라고 하면 1873년 공황을 의미했다. 무엇을 대공황으로 분류할지는 1930년대 중반께부터 정리됐다. 먼저 ‘대공황’은 1930년대 공황을 지칭하고 1873년의 공황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장기공황(the Long Depression).’ 경기침체가 길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경기침체 여부를 판단하는 데 가장 권위 있다는 전미경제연구소(NBER)가 측정한 1873년 불황의 지속 기간은 65개월. 불황에서 벗어나는 데 114~176개월이 걸렸다는 시각도 있다. 어떤 경우든 대공황의 43개월보다 길다. 영국 경제는 무려 23년을 침체에 허덕였다. 1873년 공황을 더욱 주목해야 할 이유도 있다. 2008년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와 닮은꼴이라는 분석 때문이다. 1873년 장기공황의 성격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대공황보다 심각했다’는 평가 반대편에 ‘생산과 소비가 성장했기에 공황에 끼지도 못한다’는 시각이 상존한다. 무엇이 옳은지를 떠나 확실한 사실은 순식간에 세계로 전이됐다는 점이다. 중부 유럽의 한 점(點)에서 시작해 세계라는 여러 줄의 선(線)으로 퍼졌다. 시발점은 1873년 5월9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 빈에서 발생한 주가 대폭락. 철도 건설에 과도한 투자와 부실 대출 우려 탓으로 철도·금융관련주가 급락하더니 거래소가 문을 닫았다. 음악과 예술의 수도 빈에서는 거대한 탄식이 일었다. 마침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 번째로 개최(1873년 5월) 된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국운이 융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성장 동력을 잃었다. 빈 주식거래소가 이전 모습을 찾기까지 10년 동안 상장회사의 90%가 사라졌다. 빈에서 시작된 주가 폭락은 과잉 유동성과 공급 과잉, 난개발·중복 투자의 복합 산물.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프랑스는 배상금 5억 프랑을 내주며 경제가 휘청거린 반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중부 유럽국가들은 더더욱 철도 건설에 매달렸다. 공급도 넘쳤다. 후발산업국 독일과 미국이 쏟아내는 공산품이 쌓이는 데 수요는 프랑스 경제 위축 등의 영향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빈에서 촉발된 위기는 국경과 해협, 대양을 넘었다. 마침 영국과 미국 등이 철도 버블을 안고 있어 타격이 컸다. 미국이 특히 어려웠다. 금융통화 정책 잘못 탓이다.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받은 전쟁 배상금을 재원으로 1871년 은화 주조를 중단하고 금본위제도를 채택하자 미국인들은 몸이 달았다. 은(銀) 가치의 추가 하락을 걱정하던 미국은 1873년 4월 화폐주조법을 발표하며 금·은 복본위제도에서 은을 뺐다. 은 가격은 더욱 내려가고 미국의 통화공급도 줄었다. 이자율은 뛰어 농부와 채무자들은 상환에 어려움을 겪었다. 공황이 갑자기 도진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1869년 증시침체와 1871년 시카고 대화재, 1872년 말(馬) 인플루엔자까지 도는 등 불안 심리가 널리 퍼져 있던 상황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월 가의 큰 손, 제이 쿡(Jay Cooke)의 은행이 1873년 9월 도산한 것이다. ‘제이 쿡 은행 도산’ 기사가 실린 신문을 팔던 소년이 ‘유언비어 살포’ 혐의로 현지 경찰에 체포될 만큼 안전한 은행의 대명사였던 제이 쿡 은행의 도산은 미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무엇보다 철도 관련 기업들의 타격이 컸다.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인 1866년부터 장기공황 직전까지 총연장 9만㎞의 철도를 건설하며 ‘미래를 보장하는 블루칩’으로 대우받았던 철도기업들이 문을 닫았다. 불황이 시작된지 단 2년 만에 364개 철도회사 가운데 89개사가 부도나고 1만 8,000여개 사업이 실패해 쪽박을 찼다. 실업률은 14%까지 치솟았다. 살기가 팍팍해지는 가운데 이득을 본 사람들도 있다. 미국의 부호들은 사업을 확대 개편할 기회로 여기고 무한 경쟁에 뛰어드는 한편 덩치 불리기에 나섰다. 불황의 와중에서 거대 독점기업과 노동조합이 동시에 탄생한 것이다. 앤드류 카네기, 존 록펠러, J.P 모건 같은 자본가들은 불황의 시기에 생존을 위해 기업을 사들이거나 합종연횡하는 방법으로 독점 구조를 만들었다. 독일은 공황을 맞아 사회주의 사상이 퍼질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연금제도를 도입해 노동자들을 진정시켰다. 경제난 속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반유대인 감정이 깊어지고 러시아와 동유럽, 우크라이나에서는 유대인 박해(pogrom)가 더욱 심해졌다. 어느 국가보다 타격받은 나라는 영국. 1896년까지 23년간 장기침체에 빠졌으면서도 이렇다 할 대책도 없이 진이 빠지고 말았다. 산업경쟁력 우위를 자신하던 영국은 공황을 맞은 주요국들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관세를 올리는 동안에도 자유무역 정책을 고수하고 오히려 자본수출을 늘려 결과적으로 경쟁국들을 도왔다. 자본이익률이 떨어지는 영국을 빠져나온 자금은 미국과 독일에 투자돼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후발주자들의 추격으로 선진국 수출시장에 대한 영국 상품의 점유율이 떨어지자 영국은 속국이나 다른 변경국가로 수출선을 돌려 규모는 이어나갔으나 속으로부터 병들어갔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경험한 전 지구적인 장기 불황은 최초의 장기적이고 세계적인 전쟁을 낳았다. 불황의 타개책을 대외팽창에서 찾은 유럽과 미국은 식민지 경쟁을 펼쳐 새로운 시장을 열고 경제 회생에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으나 결국은 전쟁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떠오르던 독일과 지는 해인 영국 간 식민지 쟁탈전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작금의 글로벌 경제위기가 대공황보다는 장기공황과 닮은꼴이라는 점. 버블이 그렇고 단일자본주의 체제라는 점이 그렇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 시립대 교수는 ‘현대 경제사에서 대공황으로 분류할 수 있는 위기는 1857년과 1929년 두 번뿐’이라며 ‘제3의 대공황에 대비하라’고 경고한다. 일본의 경제 관료 출신인 ‘미스터 엔’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사카키바라 야오야마 카쿠인대 교수도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금융부실과 과도한 신용으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지금과 1873년 장기공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려운데 얼마나 더 긴 터널을 지나야 할지 아득하다. 한 가지 위안은 생존할만한 기업이나 국가는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기업이 사라졌어도 IBM이나 GE 등과 같이 장기공황 시기에 태동해 살아남은 세계적 기업도 적지 않다. 청바지 업체인 리바이스도 1837년 대공황과 생일이 같다. 크루그먼의 경고가 현실화한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의 좌표는 어디쯤 있을까. 세계의 무역규모가 줄어드는 가운데 선진국에 대한 수출 경쟁력보다 중국 특수라는 요인에 매달리는 구조가 179년 전 영국과 비슷해 보인다. 당시의 어려움을 독일과 미국은 2차 산업혁명, 즉 전기와 철강 분야의 기술 혁신으로 넘었다. 한국 경제에 그런 극복 요소가 있을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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