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산업 경계 사라지는데...20년째 꿈쩍않는 은산분리 장벽

롯데, 카카오뱅크와 유통·금융부문 협약 체결 등
기존산업, IT업체와 손잡고 금융시장 진출 줄이어
"대기업 사금고 전락 우려" 해묵은 트라우마 여전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 마저 수년째 국회서 방치

  • 김기혁 기자
  • 2017-06-27 17:54:04
  • 금융가
금융-산업 경계 사라지는데...20년째 꿈쩍않는 은산분리 장벽
국내 유통 1위인 롯데그룹과 정보기술(IT) 업계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카카오뱅크가 유통·금융 부문 융합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는 등 기존 산업이 IT업체와 융합해 금융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앞으로의 산업경쟁력은 페이먼트(지급결제) 빅데이터가 좌우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IT 업체들과 잇따라 제휴에 나서는 것이다.

27일 산업·IT 업계 등에 따르면 롯데와 카카오뱅크는 최근 MOU를 맺고 공동으로 계좌기반 결제모형을 개발하기로 했다. 지급결제는 지금까지 금융산업의 영역이었지만 이를 IT 기반의 제조·유통업체들이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 MOU로 3,700만명의 회원과 2만5,000여곳의 엘페이(L.Pay) 가맹점을 보유하고 있는 롯데멤버스와 카카오뱅크의 금융데이터를 활용해 새로운 금융상품을 개발하는 것은 물론 ‘앱투앱(app-to-app)’ 결제가 가능한 계좌기반 결제모형을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앱투앱 결제는 신용카드사가 이용하는 VAN사(결제대행업체) 등을 이용하지 않고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고객과 판매자를 직접 연결, 결제가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결제를 위해 신용카드가 필요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롯데와 카카오뱅크의 제휴는) 금융과 유통이 결합되고 패키지화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면서 “결국에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만나 빠른 시간에 새로운 재화, 서비스로 혁신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내 1위의 제조업체인 삼성전자나 LG전자 역시 ‘삼성페이’와 ‘LG페이’를 통해 자사 스마트폰에 탑재해 자체 결제망 구축에 나섰다. 은행권 관계자는 “앞으로 제조업의 경쟁력은 고객 지급결제 정보를 누가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는 것에 달렸다”며 “미국의 아마존이 구글보다 더 가치를 평가받고 있는 것은 바로 전 세계인의 결제정보를 갖고 있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내 유수의 IT 기업인 KT는 이미 인터넷은행에 진출했다. 선진국에 비해서는 한발 늦었지만 IT 업체가 은행의 영역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SK텔레콤 역시 지난해 10월 하나금융지주와 합작법인 ‘핀크(Finnq)’를 설립했고 이르면 다음달 중 인공기능(AI) 기반 챗봇(채팅 로봇)을 탑재해 소비자가 챗봇과 문자메시지를 하며 금융서비스를 이용하는 서비스를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신세계그룹도 각종 금융사와의 적극적 제휴를 통해 모바일 간편결제 서비스인 ‘SSG페이’를 통해 고객 확보에 나서고 있다.

미래에셋대우와 네이버도 최근 1조원 규모의 지분 맞교환을 하면서 디지털금융 사업을 공동 추진하기로 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은 “구글이 금융업계의 최대 경쟁자”라며 사실상 IT나 제조·유통산업과 금융산업 간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졌음을 시사했다.

국내 제조·IT·유통업체들이 잇따라 금융영역인 결제시장에 진출하는 것은 아마존이나 구글 등 글로벌 그룹이 금융·IT·유통 등 분야로 영역을 넓히면서 급격히 칸막이를 허물고 있는 데 따른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기존 정통 산업의 경쟁력을 금융의 영역인 결제 빅데이터가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누가 더 많은 결제정보를 확보하느냐의 경쟁을 놓고 국내 제조·유통·IT업체들이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의 이 같은 흐름은 ‘은산분리’ 규제라는 벽에 부딪혀 영역파괴는 물론 산업 간 융합 노력도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은산분리 규제를 통해 산업자본의 경우 은행지분을 10% 이상 보유할 수 없고 의결권은 이보다 훨씬 낮은 4%로 제한해놓고 있다. 사실상 삼성이나 LG·현대차 등 대기업의 금융산업 참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다 보니 미국 등 선진국처럼 구글이나 아마존과 같은 혁신을 시도할 수 없는 환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이 은행을 소유하면 사금고로 전락할 수 있다는 트라우마에 갇혀 20년 넘게 은산분리 규제를 하다 보니 정작 IT 강국에서 인터넷은행이나 핀테크 등의 실험이 선진국에 비해 초보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때문에 인터넷전문은행에라도 특례법을 적용해 IT 기업의 경우 지분제한을 최대 50%까지 허용해 주자는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20대 국회 들어서도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최공필 금융연구원 미래금융연구센터장은 “지금 산업구조가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데 재벌기업의 사금고화를 우려한다는 등 옛날식의 잣대로 (은산분리 완화에) 반대하는 건 지금 시대에 맞지 않다”며 “과거 틀에 안주하면서 변화를 두려워하게 되면 우리나라가 (해외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차이가 생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기혁·박성호기자 coldmeta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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