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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을 장악하라...바쿠 전투





전상자 약 2,200명(오스만 튀르그 2,000명·영국군 200명). 1918년 바쿠 전투의 인명 피해 규모다. 전투 기간도 불과 19일. 사상자가 상대적으로 적고, 전투 기간이 짧은데다 영국군이 물러난 싸움이어서 그런지 바쿠 전투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그러나 바쿠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의 막판 흐름과 중앙아시아 민족 분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쿠 전투 종료 20일 만에 독일은 연합국에 휴전을 요청하고 다시 38일이 지난 뒤에는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군대를 가동할 기름이 없어서다. 노벨 형제가 19세기 말부터 본격 개발하기 시작한 바쿠 유전은 당시 세계 석유의 15%를 차지하던 거대 유전 지역. 바쿠를 확보해 군대의 연료난을 해결하려던 독일은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뒤부터 연전연패하고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바쿠 전투는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깊은 상처를 입혔다. 사상과 이념, 종교와 민족에 따라 바쿠에서 얽히고 설키어 싸웠던 탓이다. 바쿠 전투를 전후해 벌어진 복수의 악순환 속에 기독교를 신봉하는 아르메니아와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은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이 지역의 민족 간 학살 행위는 소련군이 적백 내전에서 승리하고 지역을 완전 평정한 1920년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바쿠 지역이 혼란의 전장으로 바뀐 근본적인 이유는 러시아 혁명. 1917년 3월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폐위 당하자 연합국은 두려움에 빠졌다. 러시아가 전선에서 이탈할 경우 동부에 배치된 독일군 병력이 서부전선으로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정부는 독일과 전쟁을 지속했으나 볼세비키가 권력을 잡으며 바쿠에 찾아왔다. 독일·오스만 튀르크 동맹군과 러시아군이 대치하던 상황에서 볼세비키가 1918년 3월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자 전선의 백계(반혁명 왕당파) 러시아군은 적군(공산군대)과 싸우러 떠났다.

러시아군이 철수한 흑해·카스피해 인근 지역은 무정부 상태가 되어 버렸다. 독일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르메니아를 압박해 전쟁 물자를 사들였다. 독일은 특히 카스피해 서안 바쿠유전에 눈독을 들였다. 독일의 동맹인 오스만 튀르크도 마찬가지. 바쿠 유전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만 노렸다. 오스만 튀르크은 백계 러시아군이 바쿠에서 철수했다는 소식에 고무돼 병력 1만 6,000여명을 보냈다.

오스만의 입장에서도 220만명이 넘은 대병력을 유지하려면 유전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전황이 불리해지는 마당에 유전을 갖고 있으면 연합국과 휴전회담에서 보다 우위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계산도 앞섰다. 오스만군이 바쿠를 향해 진격하자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우려하던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은 미리 이슬람을 믿는 아제르바이잔인 학살에 나섰다. 오스만의 진격을 겁내던 볼세비키도 학살을 거들었다.



‘1818년 3월의 학살’로 불린 종교적 광기는 아제르바이잔 회교도 약 1만2,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오스만군의 진격에 따라 이슬람 군대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아르제바이잔인들은 보복 학살에 나서 5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죽거나 집을 잃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이후에도 터키 혁명과 반혁명을 겪으며 80~150만명이 학살 당했다. 가뜩이나 반목하던 두 민족의 관계는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틀어져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다.

점령지를 넓혀 나가던 오스만군은 바쿠를 포위한 채 1818년8월26일 오전 10시, 본격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양측의 전력은 1만4,000여 보병과 500여 기병, 대포 40문을 갖춘 오스만군이 다소 앞섰다. 방어군은 숫자는 동등 이상이었으나 구성이 복잡했다. 전력의 핵심인 영국군은 규모가 작았다. 1,000여 보병에 1개 포병 중대, 장갑차 3대와 경폭격기 2대가 전부였다. 여기에 6,000여 아르메니아 민병대, 러시아 공산 혁명에 반대하는 코자크 기병대 600기가 방어군에 붙었다. 바쿠 현지의 러시아인들도 공산당과 왕당파를 가리지 않고 6,000여명을 모아 방어전에 나섰다.

문제는 영국군만 분전했을 뿐 나머지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는 점. 영국군 할당 구역을 빼고는 차례 차례 방어구역이 무너졌다. 결국 바쿠 전투는 개시 19일 만에 영국군의 철수로 끝났다. 동맹군이 승리를 따냈지만 전투 기간 내내 독일은 발을 동동 굴렀다. 바쿠 유전이 호주머니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영국군이 철수하면서 유정을 계속 파괴했기 때문이다. 오스만군이 바쿠를 점령했을 때는 거의 모든 유정이 파괴된 상태였다. 결국 군대를 움직일 석유 공급선이 모두 막힌 독일은 바쿠 전투 직후 강화회담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바쿠 전투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의 항복을 강요한 숨은 공신이었던 셈이다. 세계 각국은 바쿠 전투를 계기로 석유를 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말의 머리 숫자로 평가되던 군대의 기동력이 1차대전 중반부터는 기름으로 움직이는 자동차 대수로 바뀌었던 상황. 영국과 프랑스는 석유 부존 가능성을 예측하고 전쟁이 끝난 뒤 오스만의 땅을 제멋대로 분할해 중동 분쟁의 씨앗을 뿌렸다. 이슬람국가(IS)가 최근 준동하는 지역과 영국·프랑스가 바쿠 전투 이후 각각의 세력권으로 편입한 지역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역사는 과연 반복되는 것인가. 바쿠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유전지대는 오늘날에도 언제든지 전쟁이 터질 수 있는 잠재적인 화약고에 다름 아니다. 구 소련 해체로 생긴 힘의 공백에 들어선 것은 민족 감정과 외세의 개입. 총칼을 앞세워 지배하려던 과거와 달리 자본의 힘이 전면에 나섰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국제 유가가 회복된다면 중앙아시아 일대 유전의 가치도 높아져 자원 쟁탈전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경쟁이 격화하더라도 과거와 같은 민족 간 반목과 복수의 악순환만큼은 되풀이되지 않으면 좋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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