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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甲한 소개팅

[식담객 신씨의 밥상] 스물세번째 이야기 ‘달걀 부침’





“우리 학교 출신들이 잘나가잖아요. 그래서 엄마가 저도 결혼은 거기에 맞는 사람이랑 하라세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소개팅 시작한 지 5분도 안 돼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래 전 가을 어느 일요일 오후, 커다란 머그잔 앞에 앉은 스물아홉 청년 신대두는 머쓱하게 웃습니다.

“네, 부모님께서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그 학교 너 입학할 때 대량 미달사태 난 거 기억한다.)

자리를 주선한 선배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중요한 V.I.P.의 처제라며, 얘기만 잘 들어주라고 당부했습니다.

심지어 데이트 비용도 다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형이 돈까지 내줘요? 좀 이상한데?”

“그럴 만하니까 그래. 맛있는 거 사주고, 기분만 잘 맞춰주고 와. 나중에 형이 근사하게 한 잔 살게.”

‘이래서 그랬던 거였구나. 두고 보자 이 인간...?’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자화자찬을 이어갑니다.

본인의 지성과 교양부터 집안 사람들의 사업과 차종까지 참 다양합니다.

형부가 새로 뽑았다는 BMW에 추임새를 넣고 있는 스스로가 웃깁니다.

슬쩍 시계를 봅니다.

만난 지 20분 지났으니, 20분만 더 버티고 일어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밝은 표정으로 좋은 인상을 주는 게 중요합니다.

‘버티자... 칼바람 불던 연병장에서 연대장 영감의 훈화 말씀도 한 시간 동안 들었던 나다!’

“제가 좀 늘씬해서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은 다들 큰 편이었거든요. 180cm 아래는 그쪽이 처음이네요.”

“아이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클걸. 죄송해서 어쩌죠?” (어머니, 180이 안 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식 웃는 그녀의 표정에, 좋아할 만한 말을 이어갑니다.

원래 칭찬이란 건 상대방이 뿌듯해 하는 부분을 찬양할 때 약발이 받는 법입니다.

사실 그녀는 예쁩니다.

늘씬한 몸매에 베티 데이비스처럼 크고 반짝이는 눈망울, 거기에 눈부신 싸가지...

“길거리 캐스팅 제안도 자주 받으셨겠어요? 외모 때문에 불편한 일은 없으셨어요?”

이제야 내 미모를 알아봤냐고 나무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대답합니다.

“뭐, 어디 가나 항상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처음엔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해요. 길거리에서 연예기획사 명함은 몇 번 받았었구요.”

“와, 오늘 일기장에 써야겠어요. 올해 들어 가장 예쁜 여자 만났다고.” (집 앞에 천일염 뿌리는 날이라고.)

“어머, 일기도 쓰시네요? 안 그래 보이는데.”

“하하, 이런 날엔 꼭 써야죠.” (그 일기장 제목이 ‘데쓰노트’다. 김세연, 김세연, 김세연. 100번은 쓰고 잘 거다. 그것도 빨강색 싸인펜으로! 그 옆에 너 소개한 선배 이름도 쓸 테다.)

어느덧 시간은 40분을 넘었습니다.

이제 적당히 그녀의 매력을 치하하고, 내가 당신과 어울리기엔 부족해서 아쉽다는 인사를 건네면 미션은 끝입니다.

“술이나 한 잔 해요.”

앗, 그녀가 먼저 얘기를 꺼냅니다.

“네?”

생각지 못한 얘기에 머리가 뒤죽박죽입니다.

‘내가 맘에 안 드는 게 분명해 보였는데, 웬 술? 술을 좋아하나? 아니면 집에 쌀이 떨어졌나?’

오후 네 시, 해가 저물려면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문을 연 술집이 눈에 띄지 않아 헤매다가, 작은 일식 선술집을 발견해 들어갑니다.

대충 빨리 먹고 빨리 집에 보내야겠다는 마음에, 소주랑 가장 빨리 되는 안주를 주문합니다.

“대두 씨 얘기 좀 해주세요. 저만 말하려니 힘들어요. 내 스타일이 맘에 안 들어서 그래요?”

그녀가 푸념하듯 얘기합니다.

말투가 아까보다 조금 부드럽습니다.

“예뻐요. 올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답다는 말, 진심입니다.” (하지만 네 얘기는 참 짜증나.)

그 말에 멋쩍어졌는지 그녀가 소주를 털어넣습니다.

“천천히 드세요. 안주도 아직 안 나왔는데.”

“빨리 집에 가고 싶잖아요? 그래서 빨리 마실래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 술 좋아해요.” (너 무속인이냐?)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일류 대학을 나오지도, 키가 크지도 않은 나와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싶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혼자만 마시게 할 수 없어 같이 잔을 부딪칩니다.



크... 공복의 소주는 찰나의 천국을 선물해 줍니다.

시덥지 않은 얘기를 안주 삼다 보니, 어느새 두 병째 소주를 주문합니다.

살짝 취기가 오릅니다.

낮술을 마시면 태양광선이 알코올분해효소의 분비를 막아, 부모님 식별마저 저해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녀도 얼굴이 노을빛으로 타오릅니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아빠라고 부르면 안 되는데...

“나 싸가지 없죠?”

“에이... 뭘요. 가식적인 것보단 솔직한 게 나아요.” (너도 아는구나.)

“그런데 왜 솔직하지 못해요? 맘에 안 들면 안 든다, 기분 나쁘면 나쁘다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랬다간 조만간 내 선배가 예리하거나 둔탁한 걸로 나를 가격할 거다.)

그녀가 술잔을 다시 기울입니다.

이거 자칫하다간 집까지 바래다 줄까봐 두렵습니다.

잽싸게 마시고 얼른 취해버려야겠습니다.

노을빛이 사라진 하늘엔 달빛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세 병째 소주도 절반 가까이 비었습니다.

노가리 하나에 많이도 먹었습니다.

오르는 취기에 긴장감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갑니다.

“그런데 왜 술 먹자고 그랬어요? 세연 씨야말로 나 별로잖아요?” (이 술쟁아!)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도도한가 궁금해서 그랬어요. 왜요? 집에 가게요?”

“뭐가 도도해요? 무슨! 내가 얼마나 깍듯하게 대했는데~” (오늘 너 만나서 내가 집에 가져갈 간이랑 쓸개가 없다!)

“다른 남자들은 내 관심 끌려고 있는 자랑 없는 칭찬 자자한데, 대두 씨는 묻는 말에만 대답했잖아요. 그것도 짧게!”

이 사람, 뜻밖에 귀엽습니다.

어린 아이 같은 투정이 밉지 않습니다.

“내가 대두 씨 얘기 좀 해달라고 했는데, 왜 나만 말하냐고? 그러니까 홀짝거리다가 이렇게 됐잖아요.”

그녀의 얼굴에 비친 달빛이 곱습니다.

예쁜 여자가 귀여워지면 가공할 파괴력이 생긴다는 걸 깨닫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서비습니다. 속도 좀 채워가면서 드세요.”

사장님이 서비스 안주로 달걀부침을 주십니다.

석쇠 접시에서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괜스레 정겹습니다.

“대두 씨, 그거 알아요? 계란이 노른자가 닭이 되면 노란 닭이 되고, 흰자가 닭이 되면 하얀 닭이 돼요. 몰랐죠?”

“에이, 노른자가 병아리 되는 거죠.” (술 취했냐?)

“무슨 소리에요, 나 학교 어디 나온지 알잖아요?”

“학교를 어디 나왔든, 병아리는 노른자에 있는 배아가 자라서 부화하는 거에요.” (생물시간에 영어공부 했냐?)

“무슨 바보 같은 소리래? 흰 자는 흰 닭, 노른자는 노란닭도 몰라요? 우리 집안 식구들 다 잘나가요!”

아, 살살 짜증이 올라옵니다.

잠시나마 그녀를 귀엽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밉습니다.

“그럼 오골계는 뭔가요? 흰색도 노란색도 아니잖아요.” (이 까막눈 같은 자야!)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레 대답합니다.

“혹시 까만자도 있지 않을까요?”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옆 테이블 주문을 받던 사장아저씨와 손님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나는 술에 젖어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습니다.

집에 가는 길, 선배에게 전화를 겁니다.

“얘기도 잘하고, 집에도 잘 바래다줬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래, 고맙다. 우리 다음주말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냐?”

잠시 여러가지 산해진미를 떠올리다가,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오골계!” /식담객 analogoldman@naver.com





<식담객 신씨는?>

학창시절 개그맨과 작가를 준비하다가 우연치 않게 언론 홍보에 입문, 발칙한 상상과 대담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어원 풀이와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업 알리기에 능통한 15년차 기업홍보 전문가. 한겨레신문에서 직장인 컬럼을 연재했고, 한국경제 ‘金과장 李대리’의 기획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PR 전문 매거진 ‘The PR’에서 홍보카툰 ‘ 미스터 홍키호테’의 스토리를 집필 중이며, PR 관련 강연과 기고도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홍보 바닥에서 매운 맛을 본 이들의 이야기 ‘홍보의 辛(초록물고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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