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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2> 노점서 시작해 걸그룹 '잇템' 수제화로 대박

임재연 아크로밧 대표

구제의류 떼다 팔던 소녀, '서현 신는 수제화'로 유명세

아름다우면서도 편안한 수제화로 글로벌 시장 진출할 것





시장에서 구제 의류를 떼다 친구들에게 팔던 여고생이 15년 만에 트와이스·씨크릿·에이핑크 등 걸그룹이 앞다퉈 찾는 수제화 브랜드 대표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프랑스·이탈리아 등 패션 선진국 유학파가 주류인 구두 업계에서 ‘고졸 출신’이라는 약점을 넘어서며 ‘스펙보다 실력’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다.

구제 의류 사입으며 빈티지 패션에 눈뜨다



수제화 전문 브랜드 ‘아크로밧’의 임재연(34·사진) 대표는 부산 토박이다. 어릴 적 그는 집 앞 공터에서 흙과 나뭇가지로 인형이나 집을 만드는 놀이를 가장 즐겨 했다고 한다. 데레사여고에 입학한 후에는 미대 진학을 목표로 입시미술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입시에만 전념하기에는 17살 소녀의 피가 너무 뜨거웠다. 학원을 땡땡이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해운대나 광안리, 남포동으로 놀러 다녔고 그때마다 사복으로 갈아 입으며 패션에 차츰 눈을 떴다.

“교복을 입고 다니면 날라리로 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아예 사복을 싸갖고 다녔어요. 사복을 자주 입으니 남포동 같은 핫플레이스에서 여대생이나 직장 언니들의 패션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더라구요. ‘저렇게 입으니 스타일이 사는구나!’ 감탄도 하게 됐구요.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에 맞게 국제시장 구제 골목에서 리사이클(재사용) 의류를 사서 입기 시작한 게 패션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아닐까 싶어요.”

‘철없는’ 여고생으로 지냈던 그에게 뜻밖의 위기가 닥쳤다. 중국을 오가며 건설업을 하던 부친이 사기를 당하면서 빚더미에 앉게 된 것. 세간살이에는 말로만 듣던 ‘빨간 딱지’(압류물 표목)가 붙으며, 태평하게 미술학원을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난생 처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제 힘으로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는데, 문득 구제 의류를 사다가 친구들에게 팔면 어떨까 생각이 스쳤던 거죠.”

부산 국제시장은 6.25 전쟁 이후 해외에서 각종 구제 의류가 들어오면서 싼 값에 좋은 퀄러티의 구제 의류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구제 의류를 사 입으며 ‘빈티지 패션’에 눈을 떴던 임 대표는 자신에게 패션 코디를 문의하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사업 가능성을 본 것이다.

“당시 저의 전 재산인 5만원을 갖고 구제 의류랑 신발, 스카프 등을 샀어요. 한 벌에 몇 천원 밖에 되지 않아 다양한 제품을 살 수 있었죠. 세 가지 스타일로 코디를 해서 친한 친구에게 입혔고, 여러 포즈로 촬영을 해서 저만의 카탈로그를 만들었어요. 스타일별 특성과 옷의 소재, 원산지 등을 빼곡하게 써 놓은 ‘핸드 메이드’ 카탈로그를 1반부터 12반까지 돌렸고, 사고 싶으면 포스트잇에 본인 이름이랑 원하는 제품을 써 붙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하루 만에 완판된 거예요. 그렇게 1년 동안 친구들을 상대로 구제 의류 장사를 하니까 몇 개월 만에 200만원이 넘는 돈을 모을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부터 장사에 재능이 있긴 했나봐요.”(웃음)

임재연 대표가 고등학교 시절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카탈로그’. /사진제공=임재연 대표


하지만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옷을 판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톨릭 학교라서 더욱 엄격한 규율이 적용됐기에 옷을 팔다가 걸리면 엄한 처벌을 받을 게 뻔했다.

“선도부 간부들이 6시 55분부터 교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래서 주문 받은 옷을 가방 깊숙이 숨겨 오전 5시에 등교했어요. 구매할 친구와는 화장실에서 몰래 접선해 주고 받았지요. 아슬아슬하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스릴도 있고 나름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게다가 한번 샀던 친구들은 단골 고객이 됐고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곤 했는데, 아마도 입소문의 위력을 알게 된 게 당시 얻은 귀한 깨달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구제 의류로 국제시장을 주름잡다

2001년 11월 7일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임 대표는 바로 다음 날 구제 의류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끌고 서면시장으로 향했다. 고등학교 시절 모은 돈이 200만원에 달했던 덕분에 대학 입학은 가능했지만, 안정적인 대학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그는 현장에서 패션 트렌드를 터득하겠다고 결심했다.

“구제 의류를 구입할 때도 소재나 원산지, 브랜드, 바느질 상태 등을 꼼꼼하게 살피는 편이었어요. 어디서,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알아야 팔 수 있으니까요.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인터넷으로 검색하면서 패션과 관련된 정보들을 스스로 터득했죠. 제 사업이 성공하면 나중에 하고 싶은 패션 공부도 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임재연(오른쪽) 대표가 창업의 시작이었던 서면시장 리어카에서 친구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임재연 대표


임 대표는 서면시장에서도 유동 인구가 유달리 많았던 롯데백화점 맞은편 상권을 찍었다. 은행이나 성형외과 등이 밀집해 젊은 여성들의 이동이 많았던 만큼 빈티지 패션에 대한 관심도 높을 거라 판단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해 리어카 한 가득 실어온 옷들이 매일 완판될 정도로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리어카에서 시작한 그녀의 소박한 창업은 대박을 쳤고, 몇 개월 만에 국제시장 구제 골목에 한평 짜리 점포를 얻을 수 있었다. 점포의 이름은 ‘재동씨’였다.

“고3때 국제시장에 물건을 떼러 다니면 상인 분들이 씩씩한 제가 보기 좋다며 제 이름 ‘재연이’ 대신 ‘재동이’라고 불러주셨어요. 시장통에서 친숙하게 불린 그 이름이 좋아서 첫 사업장의 이름을 ‘재동씨’라고 지은 거죠.”

20~30대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빈티지 의류를 팔았던 노점상 시절과 달리 ‘재동씨’는 중고등학생부터 60대 어르신까지 트렌디하게 입을 수 있는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당시 젊은 감각으로 빈티지 제품을 구비한 매장 자체가 없었던 시절인 만큼 ‘재동씨’는 부산은 물론 서울까지 입소문을 타며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

편하면서도 아름다운 수제화를 꿈꾸다



물론 젊은 아가씨 혼자 장사했던 만큼 적지 않은 고충이 따랐다. 장사가 너무 잘 되니 상대적으로 손님이 없었던 주변 점포 상인들의 뒷담화가 들려왔고, 사소한 일로 시비도 붙였다. 하지만 특유의 싹싹함과 낙천적인 성격으로 위기를 넘기며 매장을 넓혀갔으며, 2호 부산 남포동점, 3호 홍대점을 잇따라 내며 서울 입성에도 성공했다.

임재연 대표의 ‘빈티지샵 재동씨’


이처럼 사업이 확장한 데는 2살 아래 남동생인 임동헌 씨의 힘이 컸다고 한다. 전기공학 전공인 남동생은 자주 매장에 들러 사업을 거들곤 했는데, 제대한 후에는 아예 재동씨의 온라인 사업을 도맡아 홈페이지 구축과 운영은 물론 카탈로그 촬영까지 담당했다. 남매가 힘을 합쳐 선보인 온라인몰 ‘빈티지샵 재동씨’는 기존 구제 의류 제품뿐만 아니라 각종 신발과 의류, 가방 등을 직접 제작해 판매하면서 독특한 감성의 쇼핑몰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사업 규모가 커질수록 자체 브랜드에 대한 임 대표의 갈증은 커져만 갔다. “몇 년간 빈티지 편집샵을 운영하면서 유럽에서 1970년대 제작된 구두를 구입해 직접 신어봤어요. 그런데 30년이 넘는 세월에도 제품이 너무 견고하고 멋스러운 거예요. 나도 언젠가는 오랜 세월을 견뎌낼 수 있는, 소장 가치가 있는 명품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었던 게 그때부터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왜 그동안 익숙했던 의류가 아니라 구두를 택했던 것일까. 그는 우선 희소성을 고려했다고 한다. 국내 패션업계에서 의류를 다루는 디자이너는 많지만 제대로 된 구두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없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 특히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의류와 달리 구두는 인체 특성을 제대로 이해한 장인의 손을 거쳐야만 완성도를 담보할 수 있다는 점도 임 대표의 결단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수제화 제작의 제1원칙으로 ‘편안함’과 ‘아름다움’ 두 마리 토끼를 잡기로 했다. “국내 구두 시장은 보기에는 예쁘지만 좁은 앞 코와 높은 굽으로 상징되는 스틸레토 힐과 발은 편하지만 디자인은 밋밋한 캐주얼화로 양분되거든요. 저는 미적으로도 아름다우면서도 편안함까지 담보한 수제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편안한 착화감을 위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신발을 직접 신어봤고, 편하다고 느낀 신발 200여 켤레를 구입해 일일이 뜯어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봤지요.”

자유분방한 철학을 담은 ‘아크로밧’ 탄생하다



그의 지독한 철학을 담아 지난 2010년 선보인 브랜드가 바로 ‘아크로밧’(Acrobat·곡예사)이다. 셀럽(celebrity의 줄임말·유명인) 사이에선 소녀시대나 트와이스, 에이핑크 등 인기 걸그룹 스타라면 하나 이상 소장하고 있는 브랜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여러 브랜드를 놓고 고심하다가 ‘곡예사’란 뜻을 갖고 있는 ‘아크로밧’을 선택했어요. 신발을 만들 때 편한 것도 좋지만, 자신의 패션 감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디자인과 미적 감성도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곡예사가 곡예를 하듯이 ‘웨어러블’(Wearable·착용하기 편한)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브랜드 정체성(BI·Brand Identity)를 나타내기 위해 로고도 서커스 천막을 그려 넣어, 온갖 곡예가 가능한 서커스처럼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구두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생각보다 컸다. 우선 이러한 수제화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를 찾는 게 힘들었다. “성수동 수제화 골목을 샅샅이 뒤졌어요. 여러 장인 분들을 만나 설득했는데, 그런 신발을 어떻게 만드냐는 질문부터 실컷 개발하고 나면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생산 공장을 옮길 것 아니냐며 강한 불신을 보이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내로라 하는 중견 제화업체에 납품하다가 여러 차례 배신당하면서 쌓인 불신이더라구요. 우선 신뢰부터 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1년 가까이 성수동 공장으로 출근을 했어요. 바로 옆에서 가죽을 자르고, 밥도 나르고, 뒷정리하는 걸 도와드리면서 조금씩 친해졌고, 나중엔 제 진심을 알아주신 분들이 합류하면서 2011년에야 비로소 ‘아크로밧’ 구두가 탄생할 수 있었던 거죠.”

그렇듯 힘든 과정을 거쳐 세상의 빛을 보게 됐지만, 가격도 비싸고(아크로밧의 평균 가격은 20만~30만원 후반대다) 브랜드까지 낯선 아크로밧을 찾는 고객은 거의 없었다. 출시 후 2~3년은 한 달에 두 세 켤레 밖에 팔리지 못하면서 사업을 지탱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진행되는 아크로밧 제작 과정. /사진제공=아크로밧


임 대표는 ‘빈티지샵 재동씨’를 통해 모은 2억원에다 전세 보증금과 재동씨 임대 매장 보증금 등 수억 원을 아크로밧에 쏟아 부었다. 한때 잘 나가던 편집샵 사장으로 남 부러울 게 없던 그는 한 끼 5,000원을 아끼겠다고 점심을 거르는 일도 잦았고, 잠 잘 곳이 없어 찜질방을 전전하기도 했다.

“배가 너무 고프고 잠잘 곳까지 없어 찜질방을 들락거릴 때는 왜 이렇게까지 사서 고생하고 있을까 하며 깊은 후회가 밀려왔어요. 그냥 편하게 빈티지 편집샵을 했으면, 먹고 사는 걱정 같은 건 안 했을 텐데 하면서요. 솔직히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크로밧을 버리고 싶은 유혹이 들었지요.”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어려운 도전에 함께 해준 팀원들과 아크로밧의 철학을 이해하고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구매해준 단골의 믿음을 저버릴 수 없어서다.

아크로밧, 드디어 날개를 펼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201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글로벌 패션브랜드 ‘H&M 패션쇼’에서 1등을 수상한 디자이너 김민주 씨와의 협업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고, 지난 해에는 하이패션 브랜드인 박승건 디자이너의 ‘푸쉬버튼’과 서울 컬렉션에서 합작 무대를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개성 넘치는 디자인에다 착화감까지 뛰어나 소녀시대 서현의 공항 패션으로 이름을 날린 것을 비롯해 트와이스, 씨스타, 에이핑크 등 유명 걸그룹이 무대에서 격한 안무를 소화할 때 신는 구두로도 유명하다.

임 대표는 “회사 규모가 아직 작아 협찬은 물론 PPL조차 해본 적은 없지만 ‘편하면서도 예쁜 구두’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셀럽들이 직접 주문하고 있다”며 “최근에는 중국의 한류 팬 사이에서 유명해지면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일부러 합정동 매장까지 와서 몇 켤레씩 구매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소녀시대 서현이 아크로밧 슈즈를 착화한 공항 패션 사진이 아시아팬 인스타그램 페이지에 포스팅됐다. /사진제공=임재연 대표


아크로밧을 찾는 발길은 중국은 물론 미국, 홍콩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영국이나 프랑스 등 패션 선진국 고객들의 구입도 줄을 잇고 있다. 임 대표는 “기성화와는 달리 사전 주문을 하기 때문에 실제 배송까지 열흘 정도 소요되지만 온라인 매출이 꾸준히 늘고 있다”며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SNS에 아크로밧을 태그하면서 입소문에 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중국 알리바바그룹이 운영하는 오픈마켓 ‘타오바오’의 B2C전문몰인 ‘티몰’에 입점하면서 중국 사업이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우리나라 슈즈 브랜드 가운데 ‘티몰’에 입점한 곳은 아크로밧을 포함해 딱 두 곳이다. 이렇듯 사업이 순항하면서 아크로밧의 내년 매출액은 3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된다.



임 대표는 ‘아크로밧’을 어떤 브랜드로 키우고 싶을까. 그는 ‘100년 기업이 되겠다’고 말한다. “천천히 가더라도 100년을 내다볼 수 있는 브랜드가 되길 희망합니다. 100년 명품 기업으로 가는 길에 어떤 난관이 생길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동시대 사람들에게 ‘좋은 브랜드’로 기억되고, 더 나아가 후대 사람들에게도 기억되는 수제화 브랜드가 되길 바랍니다.”

창업을 준비하는 여성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창업하겠다는 후배들한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앞으로 5년간 배고픔을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이 있는가, 5년을 버틸 자금을 갖고 있는가, 자신의 철학을 함께 실행할 파트너가 있는가 등입니다. 자신의 아이템을 확신하고 창업에 뛰어 들었겠지만 창업 과정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심과 자금이 꼭 필요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할 파트너(팀원)가 있어야 합니다. 헌신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동료가 없으면 혼자서는 어떤 사업도 성공할 수 없으니까요.”

고졸 출신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실력으로 스펙을 넘어선 임 대표. 그는 말한다. “금수저가 아니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실력을 갖고 도전하면 언젠가는 문은 열린다. 열릴 때까지 지치지 말고 도전하자!”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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