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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씨의 #그래도_연애] 300㎞ 딱 그만큼 외로웠던 우리의 연애

예고된 난관? '장거리 연애'에 대하여





아무 이유 없이 문득 외로운 날

생각이 많아서 잠들 수 없는 밤

찾아갈 곳 하나 없는 쓸쓸한 밤

평범한 하루 끝 그런 밤

- 그런 밤 by 어반 자카파

# 그런 밤, 아무 이유 없이 문득 외로운 밤





그런 날이 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가슴 한 켠이 시리도록 외로운 날.

아련아련 열매를 먹은 듯 가슴 한 켠이 말랑말랑한 날.

친구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에 온몸이 타들어 갈 것만 같은 날.

아무 말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날 부서지도록 안아줬으면 하는 그런 날.

밤 11시, 오늘이 그런 밤이다.

참다못해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속상할 걸 알면서도, 짜증 나고 서운할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전화가 사서함으로 넘어가기 직전쯤 그러니까 1분 남짓의 통화 연결음을 내게 들려주고 난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서울-대구의 거리만큼 아주 멀지는 않지만 그리 가깝지도 않은 거리가 전화에서도 느껴지는 듯했다.

남자친구 : “어어, 맞아 맞아. 하하. 응 서경아? 여보세요?”

나 : “…여보세요? 왜 이렇게 시끄러워?”

남자친구 : “아, 지금 후배 녀석들하고 밥 먹으러 왔어~ 나 대구 왔다고 하니까 다들 연락해서 찾아왔더라고.”

나 : “…아, 그래? 그래, 재밌게 놀아~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남자친구 : “응응, 알겠어. 이따가 집에 들어갈 때 전화할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끊고 나니 눈물이 핑 고였다.

‘보고 싶다고’

‘나 보고 싶지 않냐고’

‘지금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여기로 달려올 수 없느냐고’

꿀꺽.

입술을 맴돌던 말을 또 삼키고 말았다.

‘어떤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는지… 넌 아마 평생 모르겠지’

6개월 전부터 그가 속상할까봐 꺼내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 둘 쌓이기 시작했다.

애정 어린 투정으로는 도무지 극복하기 힘든 현실의 무게가 서서히 나를 버겁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2011년 겨울, 졸업을 1년 앞둔 우리는 캠퍼스 커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마음껏 즐겼다.

서로의 24시간을 공유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심지어 출구 없는 긴 터널과도 같았던 힘겨웠고, 지겨웠고, 지난했던 구직 활동까지 함께 했다.

매일 밤 수백 개의 입사지원서를 쓰고 인·적성을 준비하고 주말마다 면접 스터디를 하던 쳇바퀴 같은 일상에 그가 있어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존재만으로 위로가 됐으니까.

처음 우리 관계가 삐걱대게 된 건 내가 6개월 먼저 취업을 하면서다.

운이 좋게도 졸업과 동시에 서울의 중견기업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기뻤지만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줄줄이 낙방 소식만 접하고 있는 남자친구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 떨쳐낼 수 없는 미안함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썼다.

그는 분명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

약간 소원해졌던 우리 관계는 그로부터 6개월 후 그가 작은 컨설팅회사의 RA(Research Assistant)로 입사하면서 회복됐다.

“서경아! 나 드디어 됐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흥분과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음의 빚을 떨쳐낸 듯 홀가분하고 행복했다.

어쩌면 내가 합격통보를 받았을 때보다 더 기뻤던 것 같다.

RA 업무 특성상 그는 일주일에 2~3일씩 밤샘근무를 했지만 우리의 연애 전선에 문제는 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짬을 내서 그의 회사로 찾아갔고 그 역시 점심시간에 샌드위치를 사 들고 우리 회사 앞으로 나를 보러 오곤 했다.

짙은 애틋함이 묻어나던 우리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조로웠다.

그렇게 4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진지하게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기 시작할 때쯤, 그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 서로 어디에 있든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서경아?”

#프러포즈 대신 그가 내게 선물한 건 ‘300㎞’라는 길고 긴 거리



그가 청혼할 거라고 생각한 그 날,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고백을 들어야만 했다.

원하던 직장으로 이직하게 됐다고.

그런데 그 직장이 대구에 있다고.

KTX로 2시간이니까 그리 멀지 않다고.

오히려 정시퇴근하면 지금보다 더 자주 볼 수 있을 거라고.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했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연애의 끝은 결혼 아니면 이별 아닐까. 나는 그의 청혼을 원했지만 그가 꺼낸 건 꽃다발이 아니라 300km라는 아주 멀고 먼 거리였다.


그렇게 우리의 장거리 연애가 시작됐다.

우려와는 달리 첫 3개월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주로 오가며 알콩달콩한 연애를 이어갔다.

오래된 우리의 관계가 ‘롱디’라는 전환점을 맞으면서 다시 팽팽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마치 통금시간이 정해진 고등학생처럼 돌아오는 기차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1분 1초가 소중했다.

하지만 시간의 제약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우리는 새로운 뭔가를 함께 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아니, 흔했던 일상의 소소한 재미도 함께 할 여유가 없었다.

‘바람 쐬러 갈까?’ 한 마디에 한강으로 달려나가 함께 자전거를 타던 옛 추억은 흐린 기억으로만 남았다.

토요일 아침 기차를 타고 대구에 도착해 함께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나면 지친 몸을 기차에 맡겨야 했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패턴으로만 데이트가 이어졌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자 그를 만나는 순간에도 아주 잠깐이었지만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마 그때부터 아니었을까.

아주 서서히 우리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때가…

주말을 항상 널 위해 비워둬야 한다는 압박감이 어느새부턴가 날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 “난 모든 주말을 항상 널 위해 비워뒀는데…가끔은 그게 날 지치게 만들어”



친구 : “서경아, 다음 주 주말에 우리 다 같이 놀러 갈까?”

나 : “아…주말에? 주말은 좀 힘들겠다…”

친구 : “남친 보러 가는 거야? 다음 주는 좀 쉬고 우리랑도 놀지~ 너무 알콩달콩한 거 아니니? ㅎㅎ 알겠어, 담에는 꼭 같이 가자.”

나 : “응, 미안해~”

한 달에 딱 네 번.

정해진 시간에만 그를 만날 수 있어서 늘 비워놓는 주말.

선배나 친구의 결혼식을 못 간 지 꽤 오래됐다.

그나마 토요일 점심 결혼식이라면 얼굴만 비추고 기차를 타는 게 가능하지만, 요즘은 저녁에 하는 결혼식도 꽤 많은 편이라 곤란한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거 한번 안 보면 어떠냐고들 이야기하지만.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게 날 자꾸 망설이게 만든다.

어쩌면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그를 어떻게든 보려고 발버둥 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하고 싶은 걸 포기하고 그와 함께 있을 때 치미는 짜증까지 내가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티를 안 내려고 해도 치미는 짜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다툼은 잦아졌다.


나 : “뭐 재밌는 거 없어? 재밌는 거 하자”

남자친구 : “응? 영화 보러 가기로 했잖아”

나 : “대구 올 때마다 자기 집 아니면 카페, 그도 아니면 영화관이잖아. 다른 거 뭐 할 만한 거 없어?”

남자친구 : “(살짝 짜증을 내비치며) 영화 예매 다 해놨어. 보고 싶다고 했던 영화 아니었어? 갑자기 왜 그래?”

나 : “아니, 매번 똑같으니까 뭔가 다른 걸 자기가 준비할 수도 있잖아. 왜 그런 노력을 안 해?”

남자친구 : “………알았어. 다음 번에 할 만한 거 미리 생각해 볼게.”

나 : “매번 이런 식이지….”

남자친구 : “…너 진짜 오늘 왜 이래? 불만이 있으면 제대로 말해야지. 이런 걸로 트집 잡지 말고.”

나 : “트집? 내가 언제 트집 잡았다고 그래? 트집은 지금 자기가 잡고 있잖아.”

남자친구 : “그래, 미안해. 말을 말자.”

그만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터진 서운함은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모든 남자들이 절대 듣고 싶지 않다는 그 말을 꺼내고 말았다.

나 :“잘못했다고? 뭘 잘못했는데? 어?”

이런 서운함이 극에 달한 건 그가 나 대신 누군가와 만날 약속을 주말에 잡았을 때였다.

‘나는?’ 이 생각이 제일 먼저 들면서 짜증이 아니라 서러움이 차올랐다.

‘나는?’ 나한테 묻지도 않고 대구행을 결정하더니 주말까지 아주 멋대로구나 싶었다.

아…지친다.

연애를 하고 있지만 외롭고 지친다.

그게 순전히 그와 나의 물리적 거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참을성이 없어서 일수도.

지나치게 그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서 일수도.

그것도 아니면 모든 관계의 끝이 결혼 또는 이별이라는 단순한 공식에 대입했을 때

결혼을 하더라도 늘 그래 왔듯 내가 희생하거나 양보할 수 밖에 없을 거란 결론이 나를 체념케 만들고 있는 걸지도.

연애의 끝이 결혼 아니면 이별 이라는데. 나는 왜 자꾸 이별을 생각하고 있는걸까.


이대로라면 이별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을까.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가족·친구·직장동료 등 내게 중요한 모든 걸 내던질 만큼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사실 오늘은 그런 밤이었다.

몇 달간 나를 괴롭히는 이런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외로운 밤.

그가 갑자기 내가 보고 싶다고 반차나 휴가를 내서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날 보러 달려와 줬다면

이런 의문은 사그라들지 않았을까.

비겁한 변명일 뿐이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우리의 관계를 위해 ‘난 최선을 다했어’라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다.

체한 것처럼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하다.

길고 사랑스러웠던

가끔은 아팠지만

돌이켜보면 아련함과 애틋함이 짙게 묻어나는

우리의 연애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물론 희생과 양보의 결실로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롱디커플도 많겠지.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어느 한쪽의 희생만을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것 아닐까.

결국 관계란 둘이 만들어 가야 하는 거니까.

이런 저런 생각에 밤을 꼬박 샜지만 결국 그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런 밤’이 지나 동이 터온다.

집에 들어갈 때 연락하겠다던 그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내일 오전 중에나 ‘그 시간이면 잘 것 같아서 연락 못 했다고, 잘 잤느냐’는 카톡이 올 테지….

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잠깐 고민하다 이내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거야 하는 결론을 내 멋대로 내렸다.

이제 정말 우리는 끝인가 보구나.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눈꺼풀이 무겁다.

갑자기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이 파도에 내 몸을 자연스럽게 맡기려 한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하다.

아주 오랜만에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매일밤도닦는여자 sednews@sedaily.com

[서경씨의 #그래도_연애]는

서울경제 2030 여기자들이 다양한 주제의 연애 경험담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sednews@sedaily.com으로 애정 어린 격려와 따끔한 질책 모두 감사히 받겠습니다. 은밀한 연애담이니만큼 매주 금요일 익명으로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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