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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통해 세상읽기] 쟁심징서(爭心徵書)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법을 악용해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혈안이 되는 일





사회가 복잡하고 발전할수록 분쟁의 가능성이 늘어난다. 원시시대에는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지만 일어난다고 해도 현자의 중재로 해결됐다. 역사시대로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의사와 판단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 이로 인해 분쟁은 전쟁과 같은 물리적인 충돌로 진행되곤 했다. 이를 막기 위해 현대의 법처럼 체계적이고 복잡하지 않지만 서로 지켜야 할 규범으로써 법의 제정을 생각하게 됐다. 기원전 536년 춘추시대의 정나라 자산(子産)도 사람들이 지키기로 한 약속을 어기면 어떤 처벌을 받는지 성문화를 하고 싶었다. 그는 약속과 처벌 내용을 종이 형태로 반포하지 않고 큰 솥에다 주조해서 공개하기로 했다. 왜 하필 종에다 새겼을까. 물론 당시 종이가 아직 발명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중요한 사실을 종에 새기는 관행을 따랐던 것이다. 종에다 새기면 권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 내용을 바꾸거나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춘추좌씨전’에는 자산의 이러한 정책을 주형서(鑄刑書) 사건으로 이름 붙였다. 형벌 조항을 종에 글씨로 새겨서 누구라도 보게 했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주형서는 분명 역사의 수레바퀴가 앞으로 굴러가는 흐름을 제대로 읽어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진보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제나라에서 현자로 알려진 숙향(叔向)이나 노나라에서 이름을 떨치던 공자는 생각이 달랐다. 주형서가 공개되면 자산이 생각하지 못한 사회현상이 생겨나리라고 예상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숙향의 반론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에는 현자가 일의 경중에 따라 처벌을 했지 범죄와 형량을 객관적으로 고정하지 않았다. 주형서에는 무슨 범죄는 몇 년 징역이라는 식으로 규정이 돼 있어 사안의 개별적 사정을 충분히 고려할 수 없다는 뜻이다. 둘째, 현자는 처벌 위주가 아니라 도덕 위주의 정치를 펼쳤다. 아무리 처벌을 강화해도 범죄를 근절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법률이 결코 만능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셋째, 주형서가 공개되면 사람이 범행했을 경우 자신이 잘못했다고 시인하기보다 자신이 잘못을 했는지 다투려고 하게 되고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을 주형서에서 찾아내서 요행히 법망을 피해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혈안이 된다(병유쟁심·병有爭心, 이징어서·以徵於書, 이요행이성지·而요幸以成之). 줄이면 쟁심징서(爭心徵書)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긴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면 숙향의 주장은 현자나 지배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또 법이 사람 사이의 갈등을 완벽하게 조정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법밖에 호소할 수 없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다는 측면을 간과했다고 할 수 있다. 숙향의 정치적 입장은 명백히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한 가지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주장에서 말한 대로 법이 있게 되면 사람은 법으로 가지 않을 사안도 법에 호소하게 될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범죄 사실이 확인되더라도 처벌을 피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다 강구하게 되는 현상이 생겨나게 된다. 법이 있으면 도덕적 양심과 지성의 판단이 존중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현재 국정농단 사건을 보면 혐의자들은 처음에 “물의를 일으켜서 미안하다”고 말하다가 막상 국정조사나 특별검사의 수사가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혐의가 인정될 만한 사항에 이르면 다들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저렇게 기억력이 약한 상태에서 막중한 책임과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국정을 운영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아마도 혐의자들은 자신에게 책임이 될 만한 말을 최대한 아껴서 처벌을 피하려 하고 처벌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책임을 지기 위해 쟁심징서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법에서 쟁심징서를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합리적인 전략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사회 시스템을 과거로 돌려놓고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않고 법의 보호망으로 숨으려고 한다면 스스로 국정을 운영할 능력과 책임감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게 된다.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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