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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통합법…안보냐 경제냐







1707년1월16일,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 시민들이 의사당을 에워싼 가운데 의회가 잉글랜드와의 합병 법안을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69대41로 가결.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도 놀랄만한 표 차이였다. 쌓이고 쌓인 적대 감정 때문에 부결될 수도 있다는 전망과 한참 달랐다. 멜 깁슨이 주연한 1995년 개봉작 ‘브레이브 하트’에서 보듯이 잉글랜드와 오랜 앙숙이었던 스코틀랜드는 왜 스스로 합병을 결정했을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국왕이 같았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1603년 방계 혈통인 스코틀랜드 국왕이 영국 왕으로 즉위한 순간부터 두 나라는 한 국왕을 모셨다. 공화정 시기에도 올리버 크롬웰은 군사적 강권으로 스코틀랜드를 강점했다. 동군연합(同君聯合) 아래 100년 넘는 세월 동안 교류가 늘어나며 이질감이 엷어졌다. 두 번째는 스코틀랜드의 경제 위기. 파나마 지역에 대규모 식민지를 건설한다는 계획이 실패하며 경기침체에 빠졌다. 40만 파운드나 되는 해외채무에 시달리던 스코틀랜드에게 잉글랜드가 빚을 갚아주겠다며 다가왔다.

물론 정반대의 해석도 있다. 국왕이 같았지만 오히려 국민 감정은 이전보다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왕실 통합 이후 역대 국왕들이 교회와 국가 통합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증오만 커졌다는 방증도 적지 않다. 국왕과 달리 기득권의 변화를 원치 않았던 두 나라의 귀족과 성직자들은 대놓고 통합 반대론을 펼쳤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대규모 해외 투자 실패에 따른 극심한 경제난의 원인마저 잉글랜드 탓으로 돌렸다. ‘사악한 잉글랜드인’들이 투자를 약속한 뒤 번복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명예혁명으로 잉글랜드의 권력을 잡은 윌리엄 3세가 스코틀랜드 귀족 가문 하나를 학살했다는 점도 국민 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본래 같은 종족(켈트족). 로마 침공 이후 끝까지 저항한 북부가 스코틀랜드로 떨어져 나갔다. 대립과 갈등을 지속하던 두 나라가 통합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18세기 초반 유럽 정세와 관련이 깊다. 사사건건 프랑스와 충돌하던 잉글랜드는 북방(스코틀랜드)의 안정이 급선무였다. 앤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해 독일 하노버 공국의 제후가 잉글랜드 왕위를 승계할 경우, 스코틀랜드의 이탈을 염려했다.

스코틀랜드 내부에서는 이 기회에 잉글랜드와 결별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프랑스와 ‘오랜 동맹(Auld Alliance·auld는 old라는 뜻의 게일어)’을 복원하고, 잉글랜드와 사이가 틀어져 가던 네덜란드와 연합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잉글랜드의 통합 찬성파는 ‘통합할 경우 경제적으로 손해 볼 것’이라는 반대파의 논리에 ‘안보론’으로 맞섰다. 북방의 위협을 제거하면 스코틀랜드에게 떼어줄 경제적 과실은 결코 손실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적극적인 통합찬성론자이자 영국 수상의 밀정이었던 대니얼 디포(Daniel Defoe)는 ‘스코틀랜드를 얻는 것이 묶어두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싸게 먹힌다’며 ‘만약 통합에 실패하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잉글랜드는 보다 적극적으로 통합에 나섰다. 스코틀랜드 내부 여론을 조성하고 반대파 의원들에 대한 매수 공작까지 펼쳤다. 통합법에 당근도 많이 집어 넣었다. 25개 조로 구성된 통합법(Act of Union 1707)에서 15개 조가 경제 관련 조항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채무(39만8,085파운드)를 잉글랜드가 변제한다는 내용이 우선 들어갔다. 도량형과 통화, 세금 체제를 단일화한 통합법은 두 왕국의 경제를 통합시켰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가 반세기 동안 구축한 해외무역의 인프라에 참여할 길을 얻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통합법 의결 100일 뒤에 잉글랜드 의회와 합쳐 영국 의회를 만들기 위해 해산했다. 나라를 잃은 스코틀랜드는 비탄에 잠겼을까. 그 반대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브리튼 왕국의 일원으로 제국의 발전을 이끌었다. 두 차례의 반란이 발생했으나 왕위승계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지 독립운동은 아니었다. 높은 교육수준과 낮은 교육 비용을 자랑하던 스코틀랜드는 무수한 인재를 쏟아냈다. 먼저 군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7년 전쟁에서 북아메리카 영국군 총사령관인 존 캠벨 장군, 최초의 캐나다 총독인 제임스 머레이 장군이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

군대 뿐 아니라 각계에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출신을 차별하지 않았다. 19세기 내내 영국 의사의 95%가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나왔다. 근대 경제학을 창시한 애덤 스미스와 시인 키츠, 셜록 홈스 시리즈의 작가 코난 도일이 모두 스코틀랜드 태생이다. 이영석 광주대학교 교수(역사학)의 저서 ‘근대의 풍경’에 따르면 통합 당시 인구비율이 8대1 정도였지만 1775년 이후 인도 식민지에 파견된 영국 관리의 47%가 스코틀랜드인으로 채워졌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초석을 깔았던 통합법 통과 310주년.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안보와 경제 목적을 위해 오래 묵은 갈등을 풀어나갔다. 오늘날 우리에게 안보와 경제를 묶어서 판단하고 종합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3세기 이전 사람들보다 생각이 짧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상치 않은 스코틀랜드의 움직임도 주목 대상이다. 스코틀랜드는 지난 1999년 의회를 부활하며 자치권을 되찾아 온데 만족하지 않고 독립을 추진할 기세다. 특히 영국이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EU)에서의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한 이후 독립의 당위성이 더욱 부각되는 분위기다. 역사는 과연 다시금 방향을 틀까.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추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으로 손해 보고 있다’는 의식 때문이라고 한다.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된 셈이다. 스코틀랜드의 경제 불안과 잉글랜드의 안보 불안감이 310년전 통합을 이끈 반면 작금의 잉글랜드 경제 불안이 분리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점만 다르다. 스코틀랜드와 유럽 대륙과 ‘오랜 동맹’ 관계가 다시 복원될지도 관심거리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인 대니얼 디포는 당대에는 소설가라기 보다 정치 평론가로 이름이 알려졌던 인물. 인생 역정도 다양하다. 사업가이자 투기꾼, 파산자였다. 최초의 경제평론가로 보는 시각도 있다. 1660년 출생인 그는 부친의 강권으로 신학을 공부했으나 신학대학 졸업 후에는 목사 대신 사업에 손댔다. 술과 담배, 의류와 향수 사업에 진출했지만 결과는 줄줄이 실패. 3,700파운드(요즘 가치 7억4,590만원)를 들고 시집온 아내의 지참금마저 날리고 32세에 1만7,000파운드를 빚졌다.

파산 선언과 소송의 와중에서도 디포는 투기 대상을 찾아 주식시장을 기웃거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30대 후반에는 소책자로 유명해져 국왕의 자문역을 맡고 벽돌공장까지 성공했지만 또 다른 시련이 그를 덮쳤다. 의회를 비판한 글 때문에 체포 당한 것. 수감기간 중 사업이 망하고 처자식 8명의 생계까지 어려워진 그를 풀어주며 집권당은 각 지방을 돌면서 여론을 감시하는 밀정 역할을 맡겼다. 정권 홍보수단이었던 격일간지 ‘리뷰’를 창간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신문사상 최초로 정치 사설과 경제 해설을 게재했던 ‘리뷰’는 무역과 상인의 도덕, 주식시장에 관한 기사를 빈번하게 실어 최초의 경제신문으로도 꼽힌다. 생전의 그가 쓴 통합 지지론 관련 저술은 모두 35편으로 순수 문학 저술보다 훨씬 많다. 특히 반대 여론이 극심했던 1706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 상주하며 그가 쓴 글들은 통합의 당위성을 퍼트리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나이 60세에 이르러서야 정치적 족쇄에서 풀려난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를 비롯한 10여편의 소설을 쏟아냈다. 소설의 성공에도 그의 말로는 불행했다. 빚쟁이를 피해 5년간 종적을 감췄던 디포는 1731년 런던 근교에서 객사했다. 사람은 죽어도 예술은 남는다고 했던가. 2003년 노벨문학상은 ‘로빈슨 크루소’를 풍자한 남아공 작가 존 쿠체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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