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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11> 네일샵에서 일하던 홍대 미대생, 매출 15억 브랜드컨설팅사 키운 사연

김남희 오리지널웨이브 대표





부족한 것 하나 없는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미술 재능을 살려 홍익대 회화과에 무난히 입학했다. 누구보다 자유롭게 20세 젊음을 만끽했고, 삶의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하지만 안정적인 직장에 다녔던 아버지가 창업에 나서면서 가세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었다. 부모가 가정 형편에 대해 함구한 탓에 집안 사정이 얼마나 악화됐는지 짐작조차 못했다. 해외 연수를 떠날 때 편도 티켓을 건네며 ‘네 힘으로 버티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듣고서야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스스로 생활비를 해결해야 했던 만큼 뉴욕 5번가 네일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손톱을 정리해 주는 일이 자존심이 상했지만 미국에서 버티려면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게 1년을 지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동료 아티스트를 모아 아트 옥션을 열어 활로를 찾기도 했지만,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분야에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브랜드 컨설팅 전문기업을 세워 매출 15억원 알짜배기로 키웠다.

풍요롭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



김남희(38·사진) 오리지널웨이브 대표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그의 집은 항상 따스한 빛이 감쌌던, 부족한 것 하나 없는 풍요 그 자체였다. 수출용 의류 검사원으로 근무했던 부친 덕에 살림살이는 넉넉했고, 아버지가 공장에서 받아오는 샘플 덕에 그녀의 옷장은 갭이나 랄프로렌 등 유명 브랜드로 가득했다. 어머니 역시 동대문에서 의류 부자재 도매업을 하면서 경제 활동을 했던 만큼 강동구 명일동에서도 부촌에 살았다고 한다.

“당시 집에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계셨고, 월풀 식기세척기가 있을 정도로 꽤 풍족했던 기억이 있어요. 국내 의류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업체들이 사이판 등지에 공장을 운영했던 덕에 해외 출장을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사이판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어요. 외갓집과 교류가 활발했는데 이종사촌들이 자주 놀러와 집에는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맛난 음식이며 즐거운 수다가 가득했던 것 같아요. 그냥 행복했고, 풍요로웠던 유년시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지요.”

유복했던 어린 시절 온 가족이 사이판에 해외 여행을 떠났다. 1993년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시절의 모습. /사진제공=김남희 대표


그의 부모는 초등학교 동창 출신이다. 친가는 논산, 외가는 익산이었는데 그 중간쯤 되는 곳에 자리한 흥왕초등학교를 나왔다. 남다른 미모의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인기가 많았고, 오랫동안 연정을 품고 있던 아버지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프러포즈를 하면서 두 분의 인연이 시작됐다. 3년의 뜨거운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고 김 대표가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가 가까워서 시골에 내려가면 사촌형제랑 뒷동산에 올라가 깜깜해질 때까지 놀았어요.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겨울에는 논두렁에서 썰매를 탔던 기억도 생생해요. 근처에 유적지가 많아 부모님이 저랑 남동생을 데리고 여행을 많이 다니셨구요.”

어릴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김남희 대표는 그림일기에도 항상 ‘나중에 커서 화가가 될 거야’라고 쓰곤 했다. /사진제공=김남희 대표


어릴 적부터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미래의 화가를 꿈꾸었다. 그녀는 “6살 때부터 그림 일기를 썼는데, 일기를 보면 항상 ‘나중에 커서 화가가 되겠다’고 쓰여 있다”며 “한글을 일찍 깨쳤는지 또박또박 글씨를 썼고, 그 나이치고는 그림도 꽤 잘 그렸던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미대생의 꿈, 홍대 회화과에 입학하다



화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컸지만 그녀의 부모는 가난하게 살게 된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예술고를 포기하고 일반고에 들어가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화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포기가 되지 않았다. 끈질기게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고2가 되어서야 미술입시학원을 등록할 수 있었다. 타고난 재능 덕분인지 재수도 하지 않고 홍익대 회화과 98학번으로 입학했다.

홍익대 미대 재학 중이었던 1998년 학교 주최 가요제에서 베스트프렌드 2명과 홍보물을 들고 있었던 김남희(가운데) 대표의 모습. /사진제공=김남희 대표


하지만 그 즈음부터 가세는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그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 아버지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창업에 나섰던 것. 의류 검사원을 하면서 제조공장을 두루 알고 있었던 터라 의류제조업에 뛰어들면 승산이 있을 거라 믿었던 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쏟아 부어 공장을 세웠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동대문 지하 상가에서 오랜 시간 장사를 하면서 호흡기에 문제가 생겨 늑막염에 걸렸다. 당시 9번이나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할 정도로 어머니의 건강은 크게 악화됐다.

“어머니가 장사를 못하시니까 아버지는 사업을 해서 돈을 더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20여년 직장 생활로 의류 분야에선 인맥도 탄탄하니 공장만 세우면 모든 게 잘 돌아갈 거라 믿으셨던 거죠. 하지만 평생 ‘갑’으로 살아오신 아버지가 사업을 하는 게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정 형편은 조금씩 어려워졌고, 제가 대학에 입학하니까 어머니는 저에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네 용돈은 알아서 했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더군요.”

홍대 미대생이라는 타이틀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입시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중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입시학원은 한 달에 300만원 이상 벌 수 있는 고소득 아르바이트였다. 집에서 매달 수십 만원에 달하는 재료비와 교통비를 받았고 한 학기에 400만원에 달하는 등록금까지 지원 받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모두 용돈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때는 제가 정말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등록금에다 용돈, 재료비, 교통비까지 또박또박 받았으니까요.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은 모두 제가 사고 싶은 옷이나 구두, 화장품 등을 구입하는 데 썼어요. 그 동안 풍족하게 살아왔기 때문인지 엄마는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저희한테 그런 말을 한 번도 안 하셨죠. 그때 벌써 아버지 공장이 문제가 생겼는데도 말이죠.”

지난해 결혼하기 전에 가장 친했던 대학 동기 2명과 태국 후아인에 여행을 갔을 때 김남희(가운데) 대표의 즐거웠던 모습.


가장 친했던 대학 동기 2명과 즐겨 찾은 곳은 홍대와 압구정동으로, 당시 유행이 가장 먼저 왔던 곳이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돈을 벌었고, 번 만큼 다 썼던 시기였다. 조금 뜬다 싶은 브랜드는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렸고, 압구정동에 나가면 매장 언니들이 먼저 얼굴을 알아보고 신상(신제품)을 권할 정도로 나름 ‘거리의 큰 손’이었다. 당시 같이 다니던 단짝 친구 중 한 명은 현재 패션 디자이너가 됐고, 다른 친구는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뉴욕 5번가 네일샵에서 일하다



그녀의 표현을 빌면 미친 듯이 돈을 쓰고 다녔던 시기였지만,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바로 어떤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어필하는지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 즉 브랜드를 보는 안목을 키운 것이다.

“몇 년간 명동을 다니다 보니까 어떤 브랜드가 잘 되고, 또 어떤 브랜드는 왜 안 되는지 눈에 보이더군요. 같은 브랜드라도 매장에서 어떤 콘셉트로 인테리어를 하면 고객의 눈에 더 잘 띄는지도 알게 됐죠. 그런 안목이 창업 과정에서 중요한 자산이 된 것 같습니다.”

김남희 대표가 2007년 완성한 유화 작품 ‘2002년 2월’, 그녀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은 종암동 집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의 회사는 계속 경영난을 겪었고, 그런 사정을 까맣게 몰랐던 김 대표는 대학 3학년이 되자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고 싶어졌다. 가정 형편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는 딸의 부탁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뉴욕에 살고 있는 사촌오빠의 지인을 통해 그녀가 지낼 집이 해결되자 어머니는 비행기 티켓을 끊고 인천공항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김 대표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공항에서 건네 받은 편도티켓 한 장을 잊지 못한다.

“어머니가 백방으로 알아본 덕에 거처할 집은 구했지만 당장 미국에서 한 달을 버틸 생활비도 해결이 안 된 상태였어요. 어머니는 미국에 도착한 후에는 어떻게는 네 힘으로 버티라고 당부하시면서 티켓을 주셨는데, 그게 왕복티켓이 아니라 편도티켓이었던 거에요. 왕복티켓을 사줄 돈도 없었던 거였죠. 그때 엄청 울면서 비행기를 탔습니다. 제가 미국으로 떠나고 2주 후에 아버지 회사가 부도가 났어요. 엄마가 전화를 하셔서 너한테 학비를 보내줘야 하는데 아버지 회사가 부도가 나서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한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흐느끼더군요.”

그가 신세를 지게 된 집은 뉴욕 5번가에서 네일샵을 운영하고 있었다. 손재주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그녀는 네일샵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큰 소리치면서 돈을 벌 수 있었던 학원 아르바이트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갑’으로 살아왔던 그녀는 철저한 ‘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금발 여성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발톱 손질을 해야 하는 일이 굴욕적으로 느껴졌다. 난생 처음으로 자존감이 무너졌다.

“꽤 규모가 크고 럭셔리한 네일샵이라 상당수 손님이 부자였어요. 그런데 그들이 저를 보는 시선은 뭐랄까, 너 따위가 대학이나 제대로 나왔겠냐는 식의 무시하는 눈빛이었죠. 게다가 영어도 제대로 못했으니 얼마나 깔봤겠어요.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베트남과 비교하면서 한국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는 손님도 있었구요. 미국은 서비스를 잘 할수록 팁을 더 많이 받는 시스템이라, 부자 손님들에게 아양을 떨어야 제 수입이 많아지거든요. 저를 무시하는 시선을 모르는 척 하고 아부를 떨어야 하는 제 자신이 처량하기도 했어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기가 많이 죽었던 시기였죠.”

5개월 네일샵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재미교포 2세 아이들을 모아 미술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게 됐다. 몸도, 마음도 편해지긴 했지만 이 곳에서 자신은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잇따른 도전 실패, 아트 옥션으로 활로를 찾다



그렇게 1년을 악으로 버티고 한국에 돌아왔다. 공항에 마중을 나온 부모의 얼굴을 보자마자 김 대표는 숨이 턱 막혔다. 1년새 너무 많이 늙으셨던 것이다. 1년 전 그랜저를 타고 딸의 미국행을 배웅했던 부모는 이번에는 마티즈를 타고 마중을 나왔다. 부도로 집도, 차도, 가전제품도 남은 게 없었다. 그나마 운이 좋아 마티즈 한 대는 건졌다는 게 어머니의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부모는 수십 년 살면서 정들었던 명일동 아파트를 떠나 성북구 종암동 낡은 주택으로 살림을 옮겼고, 아버지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계셨다. 고가 바로 옆이라 트럭이 지나면 집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웠다. 그런 곳에서 부모님이 1년을 지냈다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입시학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눈 앞에 닥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미래를 준비해야겠다고 결심한 것. 그녀 역시 여느 미대생처럼 유학을 준비했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무대 디자인에 관심이 높아졌기 터라 예일대와 뉴욕대 무대디자인과에 지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커머셜하게(상업적으로) 접근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접점을 가질 수 있는 예술 영역이라는 점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회화를 전공했지만, 현대 미술을 배우면서 공간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고, 특정한 주제에 깊이 있게 접근하는 방법론도 훈련 받았으니까요. 그러면서 제가 평면보다는 입체에 관심을 많다는 사실도 깨달았죠.”

하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친한 대학 동기들이 하나 둘씩 해외 유학을 떠났지만 그에게는 유학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졸업까지 하자 미래가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 흔한 토익 점수도 없었고, 포토샵 같은 이미지 툴을 다룰 줄도 모르니 그래픽 디자이너로 취업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던 지인이 그에게 칵테일 바의 인테리어 콘셉트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전공을 살릴 수 있었던 첫 번째 일다운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게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이었죠. 빈 공간을 보고 무엇을 채워 넣을지 상상한 후엔 스케치를 했어요. 한국적 느낌의 이미지를 제안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실제 인테리어가 끝날 때까지 맡아서 했죠. 물론 아르바이트라 학원 알바보다 박봉이긴 했는데 제 상상이 현실로 구현되니까 정말 신이 나더군요.”

미국 유학이 꿈이 무위로 끝났지만 그녀는 전업 작가로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004~2005년은 미술 시장이 최악의 불황을 겪었을 때였다. 신진 작가들은 전시할 공간조차 얻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고, 작품을 판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작품을 시장에 팔 수 있는 판로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그는 온라인을 통해 작가를 모아보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친한 대학 동기 몇 명과 술을 마시면서 제안을 하니 뜻밖에 다들 뜨겁게 호응했다. 싸이월드에 작가 커뮤니티 ‘스튜디오 유닛’을 개설한 후 함께 시작한 친구들과 함께 운영진을 맡아 전시장 섭외에 나섰다.

스튜디오 유닛에서 주최한 오프라인 경매에서 사회를 진행하고 있는 김남희 대표의 모습. /사진제공=김남희 대표


2005년 봄 연희동의 작은 갤러리를 빌려 전시와 경매를 병행했다. 스튜디오 유닛의 첫 전시였다. 참여한 작가들한테는 첫 회에는 작품을 기부하고, 두 번째부터 판매 수익금을 나누자고 제안했다. 전시 공간 임대료가 만만치 않아 일정 정도는 작가의 부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신 작품 판매를 활성화하기 위해 시작가는 6만원, 상한가는 50만원으로 낮게 잡았다.

“첫 옥션에서 35개의 작품을 내놓았는데 완판이 됐어요. 다들 엄청 신이 났죠. 그 돈으로 갤러리 임대료를 해결했고, 2회차도 준비할 수 있었죠. 5년간 진행했는데 나중에는 작가가 4,300여명까지 늘어났어요. 단순히 모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작가들에게 작품 포트폴리오를 받아 싸이월드 메인에 걸어주는 방식으로 온라인 전시까지 진행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진행한 경매만 7번이었고, 나중에 스튜디오 유닛이 유명해지면서 낙찰가가 500만원을 넘는 작품까지 등장했답니다.”

하지만 봉사를 원칙으로 운영진을 꾸렸던 만큼 스튜디오 유닛 대포로서 생업을 이어가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5년이 지나자 운영진 1기 사이에서 후배들에게 물려주자는 제안이 나왔고 자연스럽게 운영진 구성이 바뀌었다.

브랜드 컨설팅에 눈을 뜨다



작품 활동은 물론 전시와 경매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김 대표는 사업에 직접 뛰어드는 게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몇 년 전 칵테일 바 브랜드 컨설팅을 맡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재능을 상업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스튜디오 유닛 활동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박형진 전 알로(ALO) 대표로부터 매장을 예술적으로 꾸며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 김 대표는 “경영학을 전공한 분이라 젊고 획기적인 브랜드로 알로를 키우고 싶어했다”며 “당시 영국 등지에서 유행했던 레트로하면서도 빈티지한 느낌을 제안 드렸는데 처음에는 너무 파격적이지 않느냐며 망설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설명을 하니까 동의했다”고 소개했다.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명동 중앙로 노른자리 알로 매장 디자인을 맡았다. 디자인 콘셉트를 잡는 일부터 시작해 로고 제작과 매장 인테리어까지 모든 프로세스를 4주 안에 마쳐야 했다. 주변 친구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밤 잠 안 자고 한 달을 매달렸고, 결국 그녀가 상상했던 디자인 콘셉트로 문을 열 수 있었다.

“당시 알로 명동 매장이 대박이 나면서 같은 디자인 콘셉트로 다른 매장에도 적용이 됐어요. 나중에 들으니까 이후 2년간 매출 증가율이 1,000%에 달했다고 하더군요. 디자인 콘셉트이 얼마나 중요한지 온 몸으로 느꼈던 계기였죠. 당시 박 대표도 회사에 들어오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오히려 저는 제 능력으로 창업하고 싶다는 열망이 커지더군요.”

오리지널웨이브, 세상에 나오다



그때가 2010년이었다. 뜻이 맞는 친구와 함께 ‘오리지널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법인을 세웠다. 그는 “오리지널디자인이라는 뜻은 전쟁에서 전략을 짤 때의 초안을 말한다”며 “전투에 어떤 마음으로 임할지, 즉 본질적인 사명감 혹은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에게 맡긴 소명 같은 것을 통칭하는 기독교의 용어”라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2년간 신명 나게 일했다. 동업하던 친구와 각자 다른 길을 가기로 의견을 모으면서 2012년 지금의 사명인 ‘오리지널웨이브’로 새로 법인을 등록했다. “본질(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을 파도(웨이브·wave)처럼 세상 곳곳으로 퍼뜨리자”는 의미를 담았다.

김남희 대표는 중국 고객과 일할 때는 위챗을 자주 활용한다고 한다. 2015년 위챗을 활용해 중국측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모습. /사진제공=김남희 대표


“브랜드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명동거리를 활보하면서도 내가 로열티를 갖고 찾게 되는 브랜드는 따로 있으니까요. 톱 브랜드를 카피할 수는 있지만 그 브랜드가 갖고 있는 본질까지 카피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그리고 브랜드의 오리지널리티를 갖고 있는 우리의 고객이 사업적으로도 잘 되게끔 하는 것도 중요하구요. 그래서 저희의 모토도 ‘우리는 당신을 오리지널로 만든다(We make you original)’랍니다.”

오리지널웨이브는 브랜드 로고나 매장 인테리어 콘셉트에 그치지 않는다. 음악이나 향기 등 브랜드 디자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에 대해서도 관여한다.

오리지널웨이브가 다른 디자인 컨설팅 전문기업과 차별화되는 점 중 하나는 순수 미술 전공자를 적극 활용한다는 점이다. 실제 이 회사에서 근무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15명 중 6명이 순수 미술 전공자다. 전업 작가의 아트적 감성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정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 오리지널웨이브가 확보한 아티스트 포트폴리오와 매칭해 가장 적합한 아티스트를 찾고, 협업을 진행한다. 이 회사가 네트워킹을 맺고 있는 작가만 700~800명 선으로, 사진 작가·영상 작가·설치 작가·패션디자이너 등 분야도 다양하다.

지난해 오리지널웨이브의 첫번째 중국인 클라이언트인 북경 동흥당으로부터 받은 감사패. /사진제공=김남희 대표


“제 자신이 순수 미술 전공자이기 때문인지 이 작업 어디서 봤다는 식의 말이 가장 듣기 싫더군요. 새롭기만 하고 호소력이 없으면 안 되고, 보기에도 좋아야 하는데 그런 모든 조건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아티스트의 감성과 직관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봅니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방향이 흔들릴 때마다 김 대표가 항상 가슴에 새기는 말이 하나 있다. 대학 때 지도 교수의 말이다.

“순수예술가의 사회적인 목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해 안테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는 경영학을 전공한 사업가는 과거의 수치를 기반으로 시장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현재 시장의 흐름을 잘 파악하지만 그 다음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잘 모른다고 본다. 반면 예술가들은 과거와 현재를 분석하는 능력은 떨어지는 게 단점이지만 특유의 직관과 감각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의 경우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작가들이 모이면 그 동네 땅을 사들이는 경향이 있어요. 실제로 제 주변에서도 작가 친구들이 뜬금 없이 롱스커트를 입고 다니면 2년쯤 지나서는 유행하기 시작하죠.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예술가한테는 나름의 ‘촉(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행이나 트렌드에 다른 사람보다 예민하고, 새로운 것을 본능적으로 찾는 사람들이죠.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선 숫자로 지표화된 정확한 분석도 필요하고, 아티스트의 ‘촉’이란 감각도 필요합니다. 우리 회사는 그 두 지점을 브릿지로 연결해서 브랜드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어가는 데 가장 최적화된 인적 자원으로 구성됐다고 자신합니다.”

지금까지 오리지널웨이브의 손을 거쳐 탄생한 프로젝트는 정관장 HUB, 토즈스터디센터 등 50여개에 달한다. 현재 중국의 톱3 화장품 업체로부터 수주한 대형 프로젝트도 진행하면서 연간 매출은 15억원을 넘어서고 있다.

아티스트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김 대표가 창업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20대 초반까지는 세상의 모든 일이 내 맘대로 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죠.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오히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곳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에 제가 토익 점수라도 있어서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으면 이렇게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살 수 있었을까, 또 무대디자인과에 합격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면 지금 얼마나 박봉에 시달리면서 고생을 하고 있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어요. 사업의 매력은 제가 직접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점 같습니다. 대신에 제가 감당해야 할 부담감과 책임감은 엄청나죠. 과연 이게 될 수 있을까 하는 불확실성에 두려움이 밀려들기도 하구요. 그럴 때마다 인디언의 기우제를 생각합니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올리면 100%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에요. 사업도 그렇게 간절하게, 끝까지, 그리고 될 때까지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인디언의 간절함을 갖고 전쟁터와도 같은 창업 시장에 도전하기를 바랍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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