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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2월6일의 정치 위기





1934년 2월6일 밤, 파리 시내 곳곳에서 출발한 시위대 수만명이 국회의사당이 위치한 콩코드 광장을 향해 몰려갔다. 시위대의 요구는 ‘금융 스캔들 진상 규명.’ 프랑스에 귀화한 유대계 우크라이나 출신 스타비스키가 저지른 금융부정과 횡령 사실이 밝혀지며 우익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눈엣가시로 여겼던 좌파 정부를 전복시킬 기회로 여겼던 것. 특히 극우단체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알려졌던 파리경찰국장 쉬아프에 대한 해임 조치가 과격 시위를 불렀다.

좌파 연립정부가 극우 성향의 파리 치안책임자를 해임한 이유는 사회당에 대한 일종의 구애(求愛) 작전. 극우 단체들은 집권당인 급진당이 사회당을 끌어들여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가에 충성하는 고위 경찰을 해임했다’고 믿었다. 극우 단체 연합체인 ‘애국 연맹(Patriot League)’에 소속된 ‘참전용사 연맹’과 ‘불의 십자가단’, ‘프랑스 행동단’ 등은 의사당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했지만 불발로 그쳤다. 경찰이 센 강변의 주요 다리를 봉쇄해 극히 일부만 강을 넘었을 뿐이다.

우익 시위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프랑스 행동단’은 진압 경찰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과격 시위는 이튿날 새벽 2시30분까지 이어지며 피를 불렀다. 무장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경찰 1명 포함, 17명이 죽고 1,435명이 다쳤다. 프랑스 국민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은 1871년 파리 코뮌 이래 63년 만에 일어난 참사였다. 대형 인명 사고가 발생하자 급진당의 달라디에 내각은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됐다’며 물러났다. 대신 들어선 두메르그 내각은 보수 색채가 뚜렷했다. 각료 20명 중에 급진당 소속은 불과 6명, 나머지는 우익 쪽 인사였다.

그렇지 않아도 2년 동안 다섯 번이나 정권이 바뀐 상황에서 프랑스의 정국은 더욱 혼미해졌다. 당장 공산당 주도로 9일 반대 시위가 열렸다. 6만명이 참가한 이날 시위에 새로운 정부는 ‘불허한 시위를 강행했다’며 진압 명령을 내려 9명이 목숨을 잃었다. 보수성향 내각의 출범과 시위 사망자 발생에 자극된 프랑스 좌파는 힘을 모았다. 서로 반목하며 적대시해온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이 공동 개최한 12일 전국 총파업에는 파리에서만 100만, 전국적으로 450만이 참가했다.

전체 인구 4,150만명의 13.2%가 깃발을 든 시위에 고무된 좌파 정당들은 생각을 바꿔먹었다. 분열보다 합치기로. 이탈리아에서 뭇솔리니가 집권하고 독일의 히틀러도 일당 독재 체제를 굳혀가는 상황, 프랑스에 파시즘 전파를 우려하던 좌파 정당 가운데 사회당과 공산당이 같은 해 7월 말 손을 잡았다. 우익 정당들이 공공연히 ‘공화정 대신 왕정이나 파시즘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급진당 역시 좌파 정당의 ‘빅 텐트’ 안에 들어왔다. 3대 좌파 정당과 반 파쇼 세력이 합쳐 1935년 7월 출범한 인민전선(Popular Front)은 1936년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프랑스 인민전선은 서구 정치·경제사에서도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인민전선이 발표한 강령을 보자. ‘준군사단체 무장 해제와 해산, 국회의원 겸직 금지,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법률과 긴급명령의 폐지, 평등한 방송권 보장을 위한 국영방송 창설, 노동조합 가입권 보장, 여성노동자 권리 존중, 의무 교육 확대, 주 40시간 노동…. 당시 포퓰리즘이라는 논란이 있었지만 현대 국가 정강정책의 모범 답안지를 제시했던 셈이다. 재계의 정화나 군수산업 국유화 등은 요즘도 유럽 좌파 정권의 정강 속에 전해 내려온다.

프랑스 인민전선은 스페인 내전과 베트남 독립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 좌파 정당 간 연대와 통합을 지켜본 스페인의 좌파와 공화주의자들은 ‘인민전선(People‘s Front)’ 이름 아래 통합했다. 스페인 인민전선은 1936년 집권했으나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군과 내전을 벌인 끝에 패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과 얘깃거리를 남겼다. 파블로 피카소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게르니카(1937)’는 공화파(인민전선) 마을을 무차별 폭격하는 독일 파시스트 지원군의 만행을 소재로 삼았다.





공화제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스페인 인민전선을 돕기 위해 결성된 국제의용군인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한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 경험을 토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를 지었다. 전쟁 사진의 최고 명작으로 평가되는 ‘어느 병사의 죽음(1936)’도 전설적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가 스페인 내전에서 실제로 총에 맞아 죽는 병사의 최후 순간을 렌즈에 담은 것이다. 인민전선의 태동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베트남의 민족적 각성 독립운동도 자극했다.



2월의 정치 공세에서 성과를 거두기는커녕 좌파를 결집시키는 결과만 낳았던 프랑스 우익연맹 조직들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 당시에 독일에 부역한 괴뢰정권인 비시 정부의 핵심을 맡았기 때문이다. 반역으로 처벌받은 우익단체들과 반대로 프랑스 인민전선은 종전 후 애국자로 칭송받았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대부분이 인민전선 출신이다. 프랑스에서 좌파정권이 전통적으로 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프랑스에서 극우정당이 다시 권좌에 앉은 것은 지난 2013년. 국민전선이 제 1당으로 부상하기까지 비시 정권 이후 63년 만이다. 극우정당의 성격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지만 파시즘의 뿌리가 길고도 깊다.

83년 전 이 맘 때 프랑스의 민심을 요동치게 만든 최대 요인은 경제침체. 대공황에서 회복하던 조짐이 보이던 다른 나라들과 달리 프랑스 경제는 갈수록 궁지로 빠져 들어갔다. 프랑스의 1930년 공업생산은 대공황 직전인 1928년보다 8.4% 증가를 기록했으나 1934년에는 대공황 전보다 20% 가량 감소했다. 농업 분야의 실질수입도 32% 줄어들었다. 철강과 중화학 생산은 대공황 전보다 40% 가량 감소했다. 같은 기간 중 화폐가치는 46%, 주식가격은 60% 떨어졌다. 당시 프랑스는 인구증가율도 유럽에서 가장 낮아 노인 인구가 많은 나라로 꼽혔다. 경제난·고령화에 정치 불안, 갈래 찢어진 국론까지…. 먼 나라의 옛날 일 같지 않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더 흘러야 갈등이 누그러들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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