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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씨의 #오늘도_출근] "왜 취미를 취미라 말하지 못하니?"





연초 이것저것 하다 보니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벌써…흑흑, 요즘은 시간이 LTE의 속도군요;;;)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도 없고, 세웠던 계획도 채 3일을 버티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산산이 조각내 버리기도 했죠.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1월의 중순의 어느 날. 어떤 취미를 가져야 하나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남들 다 하는 운동은 끌리지 않고, 컴퓨터 교육을 받자니 하루하루 반복되는 제 ‘지옥 같은 엑셀의 늪’을 퇴근 후까지 되풀이하는 것 같아 두려움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한 토막!

“그래, 미래를 대비하는 나 같은 ‘스마트 직장인’이라면 제2외국어 하나쯤은 거뜬히 할 수 있어야겠지?”





성질 급하기로 유명한 저는 퇴근 후 곧바로 강남역 뒤 한적한 언덕에 위치한 프랑스어 학원으로 향했습니다. 프랑스어로 아라비아 숫자도 모르는 저는 초급반에 등록했고, 그날이 개강 날이었기에 가자마자 같이 수강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공부를 시작했죠.

바쁘게만 돌아가는 회사 생활에 지쳐 학원에 들어서면 ‘봉주르~’란 인사말과 함께 행복까지 느껴졌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죠.

“언어는 진정 즐겨야 빠르게 실력이 늘 수 있다”고. 그 말이 정말 피부로 와 닿더라니깐요.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기초부터 배워가니 조금씩 나 자신이 이 수업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수강생들과도 금방 친해져 각자 회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만히 내 자리로 다가온 송 차장이 뭔가 굉장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제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송 차장 : 서경 씨, 요새 퇴근하고 어디 다니는 거야? 항상 바쁘게 어딜 가는 것 같던데?

나 : 아~ 그냥 요새 뭔가 해야 되겠다 싶어서 프랑스어 배우고 있어요.

송 차장 : 오~ 프랑스어? 어디서 배우는데? 나도 요새 저녁 시간에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찾아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같이 할 수 있으면 같이하자!

나 : 네?(아… 이 인간 뭐라는 거야) 차장님과 같이 할 수 있으면 좋죠. 저는.

송 차장 : 그래 좋아! 오늘부터 같이 가는 거다! 퇴근 후 1층 로비에서 봐.

나 : 네! 차장님!(ㅠㅠ 뭐야 이건??)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 주변을 둘러보니 ‘아, 안됐다. 서경 씨’라는 ‘연민’ 가득한 눈빛들이 저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왜 그때 순발력 있게 ‘몸이 피곤해서 병원에 다니고 있다’, ‘별로 하는 것 없다’ 등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는지 자기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습니다.

6시 30분, 퇴근 후 전 지하철로 30분 걸리는 학원까지 송 차장과의 불편한 ‘등원길’을 함께 하게 됐습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시시콜콜한 송 차장의 개인사에 일일이 ‘영혼이 없는 리액션’을 보내며 학원으로 향했죠.

학원에 도착해 수업을 듣는 와중에도 이 ‘불편한 동거’는 계속됐습니다. 토론식으로 진행되는 수업 탓에 한 조에 묶인 송 차장과 전 프랑스어로 “밥은 먹었어?”, “오늘 날씨가 참 좋은 것 같아” 등의 어색한 대화를 계속해야만 했죠.



2시간의 수업을 끝내고 송 차장이 저에게 뒤풀이를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같은 취미를 공유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술이나 한잔 하고 집에 들어가자며!

(강남역 인근 한 맥줏집)

송 차장 : 아~ 서경 씨. 오늘 뭔가 이 대리 덕에 대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어. 고마워. 아주 칭찬해(한 종편 예능 프로그램에 꽂힌 송 차장이 매일 부하 직원들에게 쏟아내는 유행어).

나 : 저도 혼자 공부하기 외로웠는데, 차장님과 같이 다닐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야근도 해야 하고 이번 달에는 일이 많아서 자주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당신 혼자 다니다 보면 금방 그만두게 될거야? 그렇지?)

송 차장 : 서경 씨,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학원 나가는 날에는 야근 빼줄게. 부하 직원이 자기 계발하겠다는데 상사로서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암~

나 :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제발 그렇게는 하지 말아줘. 차라리 야근을 하겠어!!)

송 차장 : 아냐아냐. 우리 작심삼일로 끝내지 말고, 회화가 가능할 때까지 꾸준히 다녀보자.

나 : (아놔) 네, 차장님. 파이팅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송 차장과의 ‘러닝(Learning) 메이트’ 생활. 매주 화요일, 목요일마다 수업에 대한 걱정보다 송 차장과의 대화에서 어떤 ‘리액션’을 보여야 하냐가 새로운 고민거리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수업에서 배우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아지게 됐죠.

송 차장 : 서경 씨, 내가 서경 씨보다 언어 능력이 굉장히 좋은가봐. 하하하하

나 : 아… 그런 것 같아요. 차장님.

송 차장 : 내가 서경 씨보다 2주 늦게 수업에 참여했는데, 벌써 조금씩 입이 틔고 있어. 아 이 정도면 애초에 동시통역사나 해볼 걸 그랬어. 아하하하~

나 : 그러게요. 차장님. 항상 차장님을 보면 놀라고 그렇습니다. (당신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내가 공부를 못해요.)



이렇게 전 연초에 새롭게 잡은 취미 하나를 허공으로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재미있던 수업과 토론도 송 차장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덧없게 느껴지게 됐습니다. 점점 ‘기발한’ 핑계를 대가며 학원 수업에 빠지게 됐고, 결국에는 수강을 포기한 채 다시 맥주 한 캔을 들고 집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고 ‘멍 때리는’ ‘의식 없는 직장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뒤늦게 저와 송 차장의 소식을 접한 직장동료들이 제게 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직장 내에서 자신의 개인사나 취미에 대해서는 ‘홍길동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었던 홍길동처럼 자신의 개인사나 취미에 대해서는 직장 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불문율’을 지키지 못한 저에게 취미를 잃어버리는 형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 같은 것이겠죠.

그렇게 조용히, 남 몰래 세우려고 했던 저의 ‘율도국’은 강한 햇빛에 녹아내린 눈처럼 속절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이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젠 절대 취미는 마음속에만 고이 품고 살아가겠다” 구요~

/이종호기자 philli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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