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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하우스에서 영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1689년 2월21일, 영국 정부의 관보(官報)인 런던 가제트에 이색 광고가 실렸다. ‘고급 시계 5개를 훔쳐 간 도둑을 신고하면 사례하겠다’는 도난 광고였다. 범인의 인상착의와 함께 신고시 상금으로 금화 1 기니(Guinea)를 걸었다. 노동자 임금 상승률을 기준으로 환산한 요즘 가치는 약 1,995파운드(원화 약 286만 원). 특이한 대목은 신고 및 연락 장소를 ‘타워 스트리트에 있는 에드워드 로이드의 커피하우스’로 정했다는 점이다.

사흘간 실린 이 광고는 신문 사상 최초의 별지 인쇄로도 꼽힌다. 광고주는 왜 로이드 커피하우스를 신고·연락 장소로 정했을까. 신문을 읽을 정도의 런던 시민이라면 로이드의 커피하우스를 알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로이드 커피하우스는 오늘날 세계적인 보험 집단으로 발전한 로이드 보험의 원조. 근대 해상보험이 시작된 로이드 커피하우스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사고와 관련된 광고라는 점이 흥미롭다.

메리야스 공장의 숙련공 출신인 에드워드 로이드가 템스강 부근에 커피점을 연 것은 1687년. 입장료로 양초 한 자루 가격인 1페니를 받던 커피하우스가 유행으로 번지던 시절이다. 음료나 술을 파는 여관이나 선술집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조용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어 인기가 높았다. 커피 한 잔을 놓고 신문을 읽거나 토론하고, 트럼프도 즐겼다. 지식인들도 커피하우스를 많이 찾았다. 사람들은 책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다고 여겼다.

신분의 고하, 재산의 유무를 떠나 자유로운 토론이 벌어지는 커피하우스를 ‘페니 대학’으로 부르던 당시 런던에만 3,000여 개 커피하우스가 성업했다. 이은섭 부산대 교수(무역학부)의 연구논문 ‘로이즈의 발전에 대한 연구(1994)’에 따르면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도 500개 이상의 커피하우스 이름이 확인 가능하다. 당시 런던의 거리가 2,000개, 인구는 57만 명 남짓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이 40세 넘어서 업을 시작한 에드워드는 번창 가도를 달렸다. 꼼꼼하게 위치를 선정하고 차별화 전략을 구사한 덕분이다. 템스 강 선착장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그의 가게에는 자연스레 선원과 선주, 화주 등이 자주 모였다. 주변에는 해군성과 세관, 수로안내인 협회도 있었다. 실명할 때까지 쓴 일기로 유명한 새뮤얼 피프스(Samuel Pepys·1633~1703)도 커피하우스에 자주 들렀다. 선원과 화주, 상인과 모험자본가들로 북적거리는 그의 가게는 얼마 안 지나 항해와 무역, 대외 전쟁에 관한 정보의 집산지로 떠올랐다.



에드워드는 1691년 가게를 런던 중심지인 롬바르드 스트리트의 널찍한 건물로 옮겼다. 영업은 여전히 호황을 달렸다. 직원을 5명 고용하고 고액 납세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만큼 잘 나갔다. ‘칠판 서비스’도 선보였다. 가게의 칠판에 적히는 화물선의 출발과 도착 예정일 등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에드워드는 1696년 아예 정보지 ‘로이드 뉴스’를 발행한다. 구독료 1페니인 이 정보지에는 외국 사정과 전쟁 소식, 재판, 의회 사정, 항해 정보가 실렸다. 1713년 에드워드의 사망(65세 추정) 이후 딸 들도 연달아 죽는 바람에 사업은 사위들을 거쳐 전혀 다른 성씨로 넘어갔으나 ‘로이드’라는 이름만큼은 살아남았다.

로이드의 후계자들은 1734년 ‘로이드 리스트’를 창간, 항해와 해상보험 소식만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로이드 커피하우스는 1760년부터 선박 등기 업무로 손을 뻗었다. 세계 상선의 4분의 1이 등록돼 있다는 로이드 선박등기소의 시발점이다. 로이드의 가게를 터전 삼아 일하던 보험업자 79명은 1771년 100파운드씩 출자해 로이드 클럽을 만들었다. 손해보험의 대명사인 로이드 보험이 이렇게 생겨났다. 영국의 증권거래소 역시 인근 ‘조나단 커피하우스’를 통해 주식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고급인력 100만 명이 종사하는 오늘날 영국 금융서비스산업은 커피하우스에서 비롯된 셈이다.

자본주의의 엔진 격인 금융산업뿐 아니라 민주주의 역시 커피하우스에서 자양분을 얻었다. 찰스 2세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비판하는 문화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커피하우스 폐쇄령(1675년)을 내렸으나 집단 반발에 봉착해 취소하는 해프닝을 겪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커피를 일찌감치 기호품으로 마신 중동과 오스만튀르크에서는 술탄의 한 마디에 수많은 커피하우스가 문을 닫았다.

영국에서 커피하우스는 토론과 소통을 넘어 언론 기능까지 맡았다. 정동준 대진대 교수(사학과)의 연구논문 ‘17세기 런던 커피하우스의 발전 요인’에 따르면 로이드는 물론 이름 난 커피하우스마다 독자적으로 신문을 발행했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요구와 목소리가 신분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오가며 지식이 쌓였다. 커피하우스의 자유 토론 속에서 무역과 보험, 언론까지 발전하며 영국은 자본주의(산업혁명)와 민주주의를 어느 나라보다 먼저 겪었다. 무엇인가를 알거나 추구하려는 시민들의 갈망과 조직된 힘이 커피하우스에서 배양되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앞당긴 셈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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