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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 성장의 비결…‘기부’





1636년 북미 대륙에 최초의 대학이 들어섰다. 위치는 건설된지 10년을 갓 넘은 뉴 타운(New Town). 영국 식민지 매사추세츠 북부 뉴 타운은 인구라야 고작 천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나 교육열이 강했다. 매사추세츠 식민지 중앙위원회를 설득해 대학 설립을 인가받았다. 신생 대학의 이름은 ‘뉴 칼리지(New College)’. ‘칼리지 오브 뉴타운(the college at New Towne)’으로도 불렸다. 시간이 흘러 1641년, 이 대학 졸업생이 처음 나왔다. 북미 최초의 대학 졸업자는 달랑 9명. 그러데 졸업장은 뉴 칼리지 대신 다른 이름이 있었다. ‘하버드 대학(Harvard College).’

뉴 칼리지가 하버드로 이름이 바뀐 이유는 간단하다. 31세에 사망하며 유산과 장서를 뉴 칼리지에 기부한 존 하버드(John Harvard:1607~1638) 목사를 기리기 위해서다. 1638년 9월 폐렴으로 사망한 그는 대학 친구인 너대니얼 이튼이 초대 학장으로 재임 중인 뉴 칼리지에 유산의 절반인 779 파운드와 도서 400권을 남겼다. 779파운드는 큰 돈이었다. 임금 상승률을 기준으로 환산한 요즘 가치는 약 26억1,532만원. 뉴 칼리지는 이 돈으로 교사를 새로 꾸미고 도서관을 지었다.

돈도 돈이지만 존 하버드 목사가 기증한 도서의 가치는 더욱 컸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었거니와 존 목사의 소장 도서는 제본 상태가 최상급 고전이었다. 세익스피어의 후원자였던 외삼촌에게 물려받았던 책을 존 목사는 죽음을 앞두고 신생 대학에 넘겼다. 뉴 칼리지의 이튼 학장은 요절한 친구 존 목사가 사망한지 6개월 뒤인 1699년 3월13일 교명을 바꿨다. 하버드 대학으로. 주지하듯이 하버드 대학교의 위상은 존 목사 시절과 비할 바가 아니다. 졸업생 9명이던 학교가 4만2,200명(대학 2만1,000명·대학원 2만1,200명)으로 커졌다. 재산도 345억 달러가 넘는다. 전 세계 대학 중 재정 1위.

하버드가 1위를 기록하는 분야는 이 뿐 아니다. 노벨상 수상자 134명(졸업생+교수)으로 1위. 미국 대통령도 8명을 배출했다.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도 126명이 나왔다. 존 하버드 목사의 서재로부터 출발한 도서관은 73개 도서관으로 분산돼 1,985만권을 소장하고 있다. 대학을 기준으로는 이 역시 세계 1위에 해당된다. 국내 1위인 서울대의 소장도서 536만권을 훨씬 웃돈다. 하버드대 도서관의 연간 경비는 1억6,000만 달러 이상으로 국내 대학의 도서관 전부를 합친 금액보다 많다.



신설 대학을 세계 1위로 발돋움하는 데 자신의 유산이 기여했다는 사실을 존 하버드 목사의 영혼이 알 수 있으면 좋겠다. 안타까운 생을 살았으니까. 그는 일생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푸줏간과 여관업을 영위하며 9남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부친을 18세 되던 해에 페스트로 잃었다. 형제·자매 3명도 이 때 죽었다. 두 번 재혼한 어머니와 남은 동생들 마저 전염병으로 죽어 가는 동안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며 시름을 잊었다. 석사학위를 받은 직후 28세에 결혼한 그는 북미 식민지로 이주해 짧은 행복을 누렸다. 신혼의 그는 매사추세츠 찰스타운에서 부목사로 지내며 주변 교회에 강연도 자주 다녔지만 갑자기 폐렴이 도져 숨을 거뒀다.

존 하버드 목사의 기부금으로 꾸민 교사와 기증 도서는 오늘날 흔적도 남지 않았다. 1764년 대화재와 독립전쟁의 와중에서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버드 목사의 친구 이튼 학장은 진작에 잊혀졌다. 교명을 바꾼 직후 학생들에게 가혹한 매질을 가한다는 이유로 주민과 학부형들에게 쫓겨났다. 그러나 존 하버드의 이름은 교정 곳곳에 살아 있다. 그의 동상도 명물로 손꼽힌다. ‘존 하버드의 왼쪽 구두를 문지르면 합격한다’는 속설로 인해 동상의 왼쪽 구두코는 항상 반질반질한 상태다. 존 하버드의 이름은 하버드 대학이 없어지지 않는 한 영원히 살아 숨 쉰다.

하버드 대학 이전의 식민지 개척민들이 뉴 칼리지를 세웠던 목적은 성직자 양성. 배한극 교수(대구교대 사회교육과)의 연구논문 ‘17세기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학문과 교육’에 따르면 이성과 지식을 중시하는 청교도적 교육은 오늘날 미국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하버드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초기 대학들은 성직자 뿐 아니라 대중을 계도하려 애썼다. ‘무지(無知)는 신앙의 원천이 아니라 이단의 원천’으로 여겼다. 책의 출판과 판매에서 영국보다 앞섰다는 뉴잉글랜드의 책 읽는 풍토는 미국 사회의 성장을 이끈 셈이다. 하버드대학의 초기 학풍을 세우는데 기여한 존 목사의 기부는 종교가 지식의 전파에 앞장섰던 시대의 상징이자 현재와 미래의 자양분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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