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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17> 에펠탑의 매력에 빠졌던 그녀, 세계 요리 사업에 뛰어든 사연

박현린 인디고네프 대표

박현린 인디고네프 대표




초등학교 시절 처음 밟은 이국 땅에서 마주한 에펠탑은 멋지다는 표현을 넘어 경이롭기조차 했다. 중학교 때는 뉴질랜드, 고등학교 때는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고, 철이 들면서는 해외 생활이 집에 있는 것보다 편하기조차 했다. 외국 문화를 접하면서 서울대 미학과 진학을 목표로 했지만 수시 전형이 너무 적다는 담임 선생의 만류에 서울대 철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3학년 때 프랑스로 배낭 여행을 하면서 외국 생활에 대한 동경심은 커져만 갔다. 바로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고, 문화비평을 전공으로 파리1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다른 국적의 친구들과 스스럼 없이 대화를 하면서 삶의 한 부분을 나누는 것.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음식을 가져와 다 함께 식사를 음식에 대한 관심이 덩달아 높아졌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후 부친의 사업을 돕다가 우연히 에어비앤비 활동을 하면서 공유의 개념을 접했다. 이를 음식 문화에 접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기억에 남는 한 끼 식사’를 표방하는 원파인디너의 시작이자 박현린(36·사진) 인디고네프 대표의 창업 도전기다.

에펠탑을 보고 전율을 느끼다



아버지는 경남 남해 출신, 어머니는 서울 토박이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성장해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서울교대에 재학 중이던 시절 아버지와 만나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박 대표가 태어나기 전에 사업을 시작해 늘 바빴고, 어머니 역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3살 위 오빠와 박 대표는 공릉동(노원구) 외할머니의 손에 컸다.

유치원생 시절 여행지에서 오빠와 함께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박현린 대표.


“할머니댁 근처에서 살았는데, 오빠는 할머니가 아예 데리고 살면서 키웠습니다. 그래서인지 몇 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오빠는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어요. 당신 아들을 직접 키우지 못해서인지 엄마가 저는 데리고 살면서 직접 키웠지요. 물론 엄마가 출근했을 때는 할머니가 챙겨 주셨지만, 엄마가 데리고 주무시곤 해서 저는 엄마와 애착 관계가 잘 형성된 것 같아요.”

사업으로 항상 바쁜 아버지였지만 삶에서 1순위의 가치를 두는 건 가족이었다. 박 대표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고, 오빠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온 가족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박 대표에게는 생애 처음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나간 순간이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지금까지도 그때 봤던 에펠탑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어요. 어린 나이에도 장엄한 건축물이라는 사실에 무척 놀랐던 것 같아요. 유럽에서 돌아온 후에도 에펠탑이 제가 준 문화적 충격은 오래도록 남아 일종의 동경심이 생겼습니다.”

1994년 8월초 여름 방학을 맞아 가족들이 함께 떠난 유럽 여행. /사진제공=박현린 대표


어머니는 그녀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아들 딸을 잘 키우고 싶다며 직장을 그만 뒀다. 자신들에게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인 것을 잘 알았지만, 박 대표는 같은 여자로서 아쉬움이 더 컸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하계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아무래도 주변이 교육열이 남다르다 보니 엄마가 직장을 그만 두겠다는 결심을 한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다른 친구 엄마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데, 우리 엄마가 커리어 우먼인 게 자랑스럽고 좋았거든요. 엄마가 대학까지 나왔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인데 그 아까운 걸 그만 두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죠.”

평범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연수를 떠날 기회를 갖게 됐다. UCLA 안에 있는 어학당에서 2주간 영어 연수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입시를 준비를 해야 할 때라 담임 선생님은 반대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외국에 나가고 싶었던 그는 연수 신청을 했고, 남들은 국영수를 공부하는 고2 여름 방학에 자유롭게 로스앤젤레스를 경험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있는 박현린 대표.


“고등학교 성적이 전교권에 들어서 담임 선생님 입장에서는 2주라도 떠나 있는 게 불안하셨나봐요. 하지만 다녀오고 나서 2학기 첫 모의고사에서 오히려 성적이 올랐더니 아무 말 안 하시더군요. 미국 생활이 길진 않았지만 외국이란 곳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익숙한 게 좋았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도 통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괴짜들이 모인 곳, 서울대 철학과에 들어가다



외국 문화를 동경하면서 서울대 미학과를 지원하고자 했지만, 당시 미학과 수시 전형이 단 한 명이라는 이유로 담임선생님이 만류했다. 예술철학으로 넓히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대 철학과를 지원했고 99학번으로 캠퍼스를 밟았다.

대학에 와서는 문화적 충격이 컸다. 중고등학교 시절 비슷비슷한 친구들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저는 정말 평범하게 자란 사람이더군요. 동기 중 한 명은 잠이 너무 많아서 고등학교를 때려 치우고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들어왔고, 나이 많은 선배 중 한 분은 스님 출신이구요. ‘블루맨’이라고 저희 단과대에서는 유명한, 항상 파란색 옷만 입고 다니는 선배도 있었어요. 서울대 안에서도 정말 괴짜들만 모인 곳이었죠.”

대학 1학년 때 동기, 선배와 함께 계단에 쭉 앉아 사진을 찍고 있는 박현린 대표의 모습.


대학 1학년 여름 방학에는 사촌동생과 일본 오사카와 교토 등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처음 떠난 여행이었던 데다 부모의 동행 없이 사촌과 함께 했던 일정인 만큼 자유로웠던 첫 번째 여행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한다.

“일본을 택한 건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가 일어라서 현지에서 소통이 가능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지요. 자유롭게 여행하자는 게 모토였기 때문에 항공 티켓은 물론 숙소를 알아보고 현지 이동 교통 수단을 알아보는 것도 모두 제가 직접 했죠. 숙소는 게스트하우스로 정했는데, 저와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들을 만나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어요. 제 인생에 있어서 제대로 된 첫 번째 여행이라고 할 수 있지요. 좁은 게스트하우스 거실에서 10여명의 젊은 친구들이 모여 영어와 일어로 얘기했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한국 사람끼리가 아니라 다른 나라, 다른 문화에서 온 사람끼리도 이렇게 편하게 말을 주고 받으면서 통할 수 있다는 게 놀랍고 신기했어요.”

대학 3학년 겨울 방학에는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에는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스페인을 두루 도는 일정을 잡았다가 여러 곳을 돌면 오히려 제대로 문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에 프랑스를 낙점한 것. 그런데 왜 프랑스였을까?

“미술사에 관심이 많아서 미술관 투어를 해야겠다는 게 1차적인 목적이었어요. 파리와 남부 지역인 니스, 파리 동쪽 알자스주 지역인 스트라스부르 등에 숙소를 잡고 보름의 일정으로 다녀왔어요. 아버지에게는 여자애 혼자 배낭 여행 간다고 하면 100% 허락을 안 할 게 뻔해서 엄마한테만 말했죠.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저 혼자 여행 다녀온 줄 모르셔요.”(웃음)

보름이라는 여행 일정이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해질녘 레스토랑 바깥쪽 테라스 한 구석에 앉아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와인을 음미했던 기억은 오래도록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냥 이렇게 이곳에서 이방인처럼 살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도록 했다.

파리지앵의 삶을 꿈꾸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그러한 열망이 더욱 커졌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프랑스로 가려고 애썼고, 프랑스 유학 길에 올랐다. 하지만 불어를 하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처음부터 파리 입성은 불가능했다.

언어를 우선 익히기 위해 2003년 3월 프랑스 리옹에 있는 불어 어학당인 알리앙스프랑세즈에 들어갔다. 그 해 여름에는 리옹 2대학에 자리한 어학원에 입학했다.

박현린 대표는 프랑스 리옹에서 처음 불어를 배울 때 베스트프렌드 마치코와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기억이 오래 남는다고 한다.


“어학원은 저처럼 불어를 배우기 위해 오는 학생들이 많았기에 다양한 문화권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어요. 일본 친구, 이태리 친구와 친하게 지냈는데, 공통 언어가 영어가 아닌 불어였던 거죠.”

2003년 9월부터 1년간 아비뇽대 컬처앤커뮤니케이션과에 다니다 파리1대학 예술대 안에 있는 문화사회학과에 편입했다. 그토록 원하던 파리 입성이 현실이 됐지만 수업을 따라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문화사회학이라는 학문이 모국어로 들어도 어려운데 가뜩이나 서투른 불어로 들으니 힘들더군요. 수업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할 때가 태반이었어요. 프랑스는 특히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편인데, 교수들도 자기네 나라에 배우러 왔으니 프랑스 학생과 똑같이 공부하고 성적을 내라고 요구했어요. 그래도 현지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수업 내용을 녹음하고, 친구의 노트를 빌려 복사해서 복습을 했었죠. 그래도 몰랐으니까 용기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테니까요.”

박현린 대표가 아비뇽에 머물 때 집주인 가족들과 정원에서 파티를 하고 있다. 이날 박 대표는 김밥을 직접 만들어 대접했다.


언어가 서툰 상황이니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힘들었고, 석사 논문을 준비할 때는 지도 교수가 모욕적인 언사로 상처를 주는 일도 적지 않아 스트레스가 많았다. 멀리 이국 땅에서 겪는 상처는 모욕감을 넘어 깊은 외로움으로 다가왔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가끔씩 여러 국적의 유학생들과 함께 한 저녁 파티 자리였다. 각자음식을 한 가지씩 준비해 오는 포틀락(Potluck) 방식으로,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서 이태리나 스페인, 터키, 일본의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음식을 갖고 가야 하니까 저도 안 하던 한국 음식을 요리하게 되더군요. 처음에는 불고기나 잡채를 했고, 이후에는 된장찌개나 김밥도 준비해 갔습니다. 원래 요리라는 것에 관심이 없었는데, 포틀락을 하면서는 각 국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음식 맛에 대해서도 서로 품평을 하면서 호기심이 많이 생겼어요.”

그렇게 파리에서 보낸 1년 만인 2006년 8월 석사 학위가 나왔다. 파리의 매력에 푹 빠진 박 대표는 현지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다. 원래 패션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명품 브랜드 끌로에(Chloe)에서 인턴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패션의 도시’ 파리에서 패션이란 산업의 소비 문화에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브랜드가 됐든, 디자인이 됐든 떴다가도 금방 소비자의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묘하게도 패션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지속 가능한 일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고 우연치 않게 주프랑스한국대사관에 정직원 자리가 생겨 통역과 번역 일을 맡게 됐다.

박현린 대표는 파리 기숙사에서 지낼 때 세계 각국 친구들과 포틀락 파티를 열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사관에 2008년에 들어가 이듬해 가을까지 일했으니 1년 넘게 지낸 셈이네요. 대사관 일은 너무 재미 있었어요. 문화는 물론, 경제나 국방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우리나라 사람들과 따뜻한 안부를 전하며 지낼 수 있다는 점도 유학 생활로 지쳤던 저에겐 큰 위로가 됐지요.”

다시 한국으로, 우연히 만난 에어비앤비



대사관 일을 하면서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에 들어가고 싶다는 꿈을 키웠지만 6년이나 타국에서 지내는 딸을 아버지는 곁에 두고 싶어했다. 결국 아버지의 간절한 뜻을 외면하지 못해 고국 땅을 밟았고, 부친의 사업을 도우며 서울에 정착했다.

“아버지가 하시는 스테인리스 스틸 무역업이라는 게 산업이 성장하는 시기에는 블루오션이었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는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경쟁자가 너무 많아지면서 아버지도 힘에 부치신 거죠. 제가 옆에서 조언을 해드리면서 의지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오래도록 있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도 제게 ‘가족이 어려울 때는 힘이 되는 게 맞지 않겠냐’고 하셨는데 그게 가슴에 깊이 와 닿더라구요. 도와드릴 수 있을 때 돕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파리에서 충분히 자유롭게 나의 생활을 즐긴 만큼 이제는 가족을 위해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죠.”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붙들어 매면서 부모와 함께 산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 시절에도 자유를 옥죄는 모든 것에 몸부림을 쳤지만 파리에서 자유를 맛본 후에는 이러한 갈망이 더욱 커졌다.

그러던 중 대학 시절부터 남에게 말 못할 고민을 털어 놓으며 정을 쌓았던 두 학번 위 선배가 그의 반려자가 됐다. 고국에 돌아온 지 1년 만인 2010년 결혼을 했고, 2011년에는 아들도 얻었다.

그렇듯 평범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가슴 한 구석 허전한 게 한 번씩 진하게 밀려왔다. 프랑스에서 글로벌하게 잘 지냈는데, 그런 국제적 교류가 딱 끊긴 채 우물 안에 머물러 있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었다.

글로벌 교류에 대한 갈증을 어떻게 해소할까 고민하던 중 그녀의 눈에 세계 최대 숙박 공유 사이트인 에어비앤비(Airbnb)가 들어왔다.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유럽으로 출장 갈 일이 있었는데, 혼자 가는 거라 현지인 집에 머물고 싶었죠. 그때 에어비앤비에 가입해서 이용했는데 너무나 만족스러운 거에요. 파리의 제가 살던 집 근처에 빈 방이 검색돼 이 곳에 며칠 머물렀는데, 공유의 가치를 이렇게도 실현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감탄했었죠. 제가 갈 때는 그 집의 주인인 대학생이 고향으로 떠날 때라 서로 메시지만 주고 받았지만, 정말 친근하고 따뜻한 느낌이었어요. 이후에도 종종 에어비앤비를 이용했는데, 이런 공유의 콘셉트를 갖고 뭔가를 한다는 게 정말 의미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아요.”

몽골 음식을 주제로 원파인디너를 진행한 후 몽골 호스트 뱜바씨와 함께 표즈를 취하고 있는 박현린 대표.


출장을 다녀와서는 당장 비어 있는 오피스텔을 갖고 호스트로 활동했다. 업무상 출장차, 혹은 단기 여행차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었는데, 이들이 어떻게 하면 한국에서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 어떤 음식을 소개해야 만족할까 고민하고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게 즐거웠다. 처음에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의 평범한 가정집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이들과 집밥을 연결시키는 서비스를 구상했다고 한다. ‘공유’라는 콘셉트와 세계인의 공통 언어인 ‘음식’을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글로벌 문화를 ‘요리’로 연결하다



2013년 가을 비슷한 고민을 하던 대학 선배인 박세현 이사와 뜻이 맞아 공동 창업에 나섰다.

“당시 박 선배도 음식을 소재로 창업을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제 생각을 얘기했더니 너무 재미있겠다며 당장 같이 해보자고 했죠. 박 선배는 사람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문화를 이어주는 일이 궁극적인 꿈이었는데, 그 가장 밑단에 있는 게 바로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음식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세계 각국 친구들과 ‘음식’으로 강한 유대감을 경험했던 박현린 대표는 직접 음식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2014년 봄부터 사업 준비를 거쳐 그해 7월말 ‘인디고네프’라는 법인으로 창업에 나섰다. 인디고네프는 개개인의 활동(Individual+Go)을 네프(Neuf·불어로 ‘새로운’이란 뜻) 방식으로 지원하는 회사란 뜻을 지녔다.

궁극적으로는 개개인의 재능을 발굴하고 그 열정과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도전으로 ‘기억에 남는 한 끼’라는 뜻을 갖는 ‘원파인디너’를 2016년 2월 선보였다.

박 대표는 “200만에 가까운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원파인디너는 음식을 통한 문화교류 플랫폼을 지향한다”며 “한국에 거주하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 가운데 요리에 재능과 열정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그 분들의 음식을 직접 먹어보고 배워볼 수 있는 식사를 중개하거나 레시피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해당 지역이 사람을 만나 현지 음식을 먹어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식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일반 고객이 참여하는 소셜 다이닝의 형태로 진행되거나 가족, 친구 단체모임 혹은 기업체에서 디너나 쿠킹클래스를 신청하고 있다. 현재 스페인·이탈리아·몽골·중국·일본·프랑스·그리스·터키·체코 등 현재 10여개국 16명의 호스트(음식을 제공하는 사람)가 참여하고 있다.

이국 문화를 경험하는 플랫폼이다 보니 젊은 세대가 많고 자연스럽게 오프라인에서 진행되는 저녁 모임도 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레시피를 동영상 형태로 올리면서 외국 요리를 배우는 사이트로도 명성을 얻어가고 있다. 현재까지 120개 이상 레시피가 올라 있는데, 각 음식에 스토리를 담기 위해 호스트의 인터뷰도 올려 놓았다.

이처럼 ‘원파인디너’를 통해 음식을 통한 교류의 장을 열었다면, ‘원파인박스’는 그 동안 축적한 레시피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요리 재료와 레시피를 배송해 주는 서비스다.

“원파인디너가 음식을 통한 문화교류 플랫폼을 표방했다면 원파인박스는 음식과 문화를 함께 배달한다는 콘셉트를 갖고 있어요. 박스 안에는 2인용 요리 레시피와 그에 맞게 식재료, 그리고 그 음식을 둘러싼 여행 및 문화 이야기를 담은 저널이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기존에 반재료 중심의 레시피가 주류가 됐다면 저희는 온전히 원재료를 중심으로 소스 만드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알려 드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온전히 해당 국가의 음식을 이해하는 방법이라 믿었기때문이죠.”

원파인박스에 각 국 문화를 담다



그가 원파인박스를 내놓은 계기는 원파인디너를 통해 세계 요리를 맛본 이용자들의 요구가 컸기 때문이다. 집에서 가족과 요리해 먹고 싶은데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고, 특정 마트를 찾아가 향신료나 소스 등을 구한다 해도 필요한 양보다 많아 버리는 재료가 더 많다는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착안해 필요한 만큼 덜어 담아 보내주는 서비스를 선보인 것이다.

원파인박스에는 그날 요리해 먹을 만큼 분량의 재료와 레시피 등이 담겨 있다. /사진제공=인디고네프


“원파인디너를 이용한 고객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러더군요. 집에서도 직접 요리하면 좋겠다구요. 그런데 재료가 문제였던 거죠. 향신료를 구하기도 힘들 뿐더러 애써 구해도 너무 분량이 많아 한번 사면 찬장에 1년 이상 두게 되니까요. 그래서 이런 아쉬움을 해소할 수 있도록 쿠킹 박스를 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2016년 9월 신규 서비스를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론칭했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어요. 펀딩이 끝난 후에도 더 사고 싶다는 피드백이 있어서 사업으로 키우겠다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현재는 이국 음식의 레시피와 원재료를 소개하는 수준이라면 조만간 간편 버전도 만들어 요리할 시간이 적은 맞벌이나 1인 가구에게 어필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음식을 넘어서 음식을 둘러싼 테이블웨어 등에서도 각자의 개성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발휘할 수 있도록 식기 등 키친 소품 시장에도 도전한다는 생각이다.

글로벌 문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창업에 뛰어든 박현린 대표, 그에게 창업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창업은 자기 자신이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일을 파고드는 일종의 ‘기회’ 같은 것 같아요. 창업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뛰어든 게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까 창업으로 연결된 셈이죠.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창업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관심이 있는 것, 좋아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으면 합니다. 저도 제가 잘하진 않지만, 좋아하는 것이기에 배우고 노력했던 과정을 거쳤던 것 같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관심사와 좋아하는 것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하면 저보다 빨리 창업이란 세계에 진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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