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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공황의 그림자

쇼와공황의 그림자





예금인출 소동과 77개 보통은행 도산. 1927년 일본 쇼와(昭和) 금융공황의 결과다. 전체 보통은행(시중은행)의 10%가 문을 닫았다는 쇼와금융공황이 속으로 남긴 상처는 훨씬 컸다. 파산한 은행의 대부분이 중소 규모여서 피해는 주로 중소기업에 집중됐다. 재벌 산하의 대형 과점 은행이 관료의 지위를 받는 일본 특유의 선단식 경영 형태가 이 때부터 나타났다. 일반인 사이에서는 시장 경제와 금융은 불안정하고 불공평한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결국 1930년대 일본은 급속하게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조선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공황의 배경은 경기과열과 관동대지진. 가장 먼저 반동공황(反動恐慌)이 찾아왔다. 유럽이 전화에 휩쓸린 1차세계대전의 반사 이익에 따른 활황이 꺼져갈 무렵인 1920년 봄부터 과열 투자와 물가 폭등, 주가 하락, 예금 인출이 차례로 일어났다. 1923년 9월에는 관동대지진까지 발생해 경제가 더욱 망가졌다. 진재공황(震災恐慌:지진 피해로 인한 공황)이 봉착한 일본 정부는 피해 복구를 위한 어음 할인 지원 형식으로 특별자금을 방출했으나 효과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 국회는 규모가 급증한 ‘재난 극복용 특별어음’을 정리하기 위한 국채를 발행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합의 단계에서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주로 대만은행을 통해 지원한 대규모 자금이 지진 피해 기업보다 여당과 친한 독과점 대기업 ‘스스키 상회’에 집중적으로 흘러 들어간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야당은 국채 발행 계획이 ‘정상모리배(政商謀利輩)와 불량 은행 구제를 위한 것’이라며 반대로 돌아섰다. 국채 발행에 동의하되 ‘정부와 일본은행 지원금의 정확한 규모 및 지원 기업 명단을 제출하라’는 조건도 달았다. 여당과 대장성은 이를 거부하자 의사당에서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여야의 대립 속에 시간만 흐르고 예금 인출 조짐이 나타나는 가운데 다소 고의적인 실수가 나왔다. 일부 대형 은행들까지 돌아오는 어음을 막기 힘들다고 호소하자 대장성 장관은 엄살을 부렸다. 야당의 협조를 압박하려고 ‘도쿄와다나베은행(東京渡邊銀行)마저 지금 어음 결제 불능 상태”라고 중의원에서 밝힌 것. 이때가 1927년 3월 14일. 정작 이날 도쿄와다나베은행은 무사히 어음교환결제를 넘겼다. 은행 중역들이 대장성에 찾아가 ‘자금부족으로 어음 결제가 지체돼 휴업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을 뿐 지급 불능은 아니었다.

모두가 쉬쉬했지만 일부 지방은행들이 사실상 휴업 상태였던 상황. 도쿄에서도 은행들이 지불 불능에 빠졌다는 현직 대장성 장관의 폭탄 발언은 금융가에 지진에 버금가는 피해를 안겼다. 이튿날부터 은행마다 예금을 빼가려는 인파가 장사진을 치고 44개 은행이 휴업에 들어갔다. 아예 파산하는 은행도 줄을 이었다. 문제의 정경 유착업체인 스스키 상회도 폭탄 발언 3주 뒤에 문을 닫았다. 대만은행도 휴업하고 대출로 연계된 조선은행과 일본은행까지 흔들리는 상황에서 지급정지와 은행 휴업령이 발동됐다. 내각도 물러났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뒤늦게 특별 자금 지원책을 발표하고 돈을 마구잡이로 찍어 풀었다. 얼마나 사정이 다급했는지 뒷면이 백지 상태인 지폐까지 발행했다. 뒷면 도안이 없어 ‘우라지로(裏白·이백:속이 하얗다는 뜻)’라고 불린 화폐가 일으킨 돈이 홍수는 인출 사태를 가까스로 막았다. 일본은행은 ‘우라지로’ 200엔권을 500만장(10억엔) 인쇄했으나 1억6,000만엔이 풀린 시점에서 시장이 안정돼 발행을 멈췄다. 긴급 발행된 200엔권은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일본은행이 열심히 거둬들였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화폐사를 통틀어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반쪽짜리 지폐인데다 빨리 회수한 통에 이 화폐는 수집가 사이에서 166만엔 이상에 거래된다고 한다. 상태가 좋은 것은 400만엔도 호가한다고.







일본은 안도했으나 무작정 풀린 돈은 후유증을 낳는 법. 물가고가 찾아왔다. 식민지 조선도 고통받았다. 소작료를 현물(쌀)이 아니라 돈으로 받은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다. ‘窮民(궁민)’으로 불리던 도시 빈민도 이 시기에 급격히 늘어났다. 쇼와금융공황 2년 뒤에는 더 큰 파장이 밀려왔다. 뉴욕 발 세계대공황이 겹쳐 일본은 극심한 불경기에 시달렸다. 쇼와금융공황과 1930년대초 세계공황에 따른 일본 공황을 합쳐 ‘쇼화공황’으로도 부른다.

경제가 나빠지면 세상이 극단적으로 흐르는 법인지 공황에 빠진 일본에서는 민주주의의 퇴행이 일어났다. 하종문 한신대 교수(일본학)의 연구논문 ‘일본의 쇼와공황과 민주주의 엇박자’에 따르면 일본의 경제 위기는 민주주의의 파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황과 금본위제도 복귀·이탈을 거듭하는 혼란 속에 사람들은 군부가 고의로 일으킨 만주침략에 열광하고 나라는 파시즘으로 내달렸다. 청년 장교들이 백주대로에서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살해하는 가운데 일본의 정당제도 역시 무너졌다. 메이지 시대 이후 반짝했던 ‘다이쇼 데모크라시’ 속에서 탄생한 정당정치가 8년 만에 막 내리고 군부가 권력을 잡았다. 그 끝은 광적인 전쟁과 패망이었다.

파시즘과 결합한 일본 경제는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중공업 우선 정책 아래 선택과 집중, 규모의 경제가 강조되며 재벌들의 힘이 더욱 커졌다. 조선에는 더욱 큰 영향을 미쳤다. 대형화·건실화를 명분 삼아 조선에서는 일본보다 엄격한 은행법을 적용, 민족 자본의 형성을 억눌렀다. 세계적인 공황을 맞은 일제가 타개책의 일환으로 밀어 부친 만주 개발과 중일전쟁을 타고 조선의 청년들은 만주로 떠났다. 독립운동이 아니라 일본 군인, 공무원이 되기 위해 만주행을 택했던 조선 청년들의 만주 인맥은 해방 후 한국 현대사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90년 전 오늘, 방아쇠가 당겨진 일본의 쇼와공황의 흔적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없어졌을까. 글쎄다. 만주 군맥의 중심이던 고 박정희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나며 짙게 드리웠던 만주의 그림자도 사라지는 것 같지만 한 가닥 우려가 남는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성향이 짙어지고 우리 사회도 거꾸로 간다. 성장에 목 매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광폭해진 일본을 닮아서일까. 우리 내부의 극단성이 마구 드러난다. 견해가 다르면 적이 되고, 일본의 쇼와공황,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자유당 시절에나 횡행했다던 ‘백주의 테러’가 고개를 든다. 우리를 좀 더 아꼈으면 좋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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