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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사와 에이이치 … 최초 은행권 속 일본인





질문부터 시작하자. 근대적 종이돈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행된 시기는 언제인가. 답은 1902년. 최초의 은행권 3종(1원·5원·10원권)이 선보였다. 이어지는 질문, 지폐 도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다. 최초의 지폐에 민족의 영웅이나 명승지 대신 일본인의 초상이 박힌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의 국립 제일은행이 찍은 돈이기 때문이다. ‘국립’이라 불렸을 뿐 제일은행은 민간은행이었다. 국법에 의해 설립되고 인가받았다는 의미에서 ‘국립’이라는 말이 들어갔을 뿐이다.

어떻게 민간은행이 남의 나라의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을까. 불법과 강권, 무력에 의해서다. 제일은행이 지폐 발행을 추진한 것은 대한제국이 금본위제도 채택과 외국 돈의 유통 금지를 골자로 하는 자주적 화폐조례를 발표한 1901년 2월부터. 조선에 진출해 일본 거류민들과 거래하던 제일은행은 무리한 요구를 대한제국에 들이밀었다. 통용이 금지될 일본 은화 대신 한국에서 사용할 돈을 찍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대한제국은 이를 간단하게 물리쳤다.

일본인들의 입김이 날로 강해지던 시절, 제일은행은 일본 대장성으로 달려갔다. 대장성이 제일은행에 내려준 특전은 사실상의 은행권인 ‘무기명식 일람불(一覽拂) 어음’의 발행 허가. 유통 지역도 일본이 아니라 한국으로 국한시켰다. 준비금 적립 등의 책임은 지지 않고 한국의 화폐주조권을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제일은행권은 대한제국의 경제를 뒤흔들었다. 일본에 맞서 청나라 상인들도 비슷한 ‘어음’을 유통시켰다. 외국 정부도 아닌 상인들이 발행한 불태환지폐, 신용도가 어음이나 마찬가지인 종이돈이 가뜩이나 취약한 대한제국의 신용경제를 문란하게 만든 것이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대한제국 정부는 제일은행권과 청의 어음에 대한 유통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안 지나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다. 군함 3척을 동원한 일본의 무력시위와 협박에 굴복한 것이다. 강제로 준 법정화폐의 지위를 차지했음에도 막상 은행권의 사용량은 크게 늘지 않았다. 민간의 저항 덕분이다. 보부상 단체와 인천지역의 배격운동이 특히 강했다. 덕분에 한국은 적어도 러일전쟁 이전까지 화폐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일은행권에서 또 하나 웃지 못할 사실은 화폐 도안. 일본의 유명인사나 왕족, 궁궐이나 풍경이 아니라 민간기업인의 얼굴이 도안으로 쓰였다. 주인공은 제일은행을 소유한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조선에서 제일은행권이 발행되던 시절 에이이치의 나이가 62세.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91세까지 장수하며 수많은 흔적을 남겼다. 일본 경제기획청장 출신 평론가 겸 작가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는 고대부터 현대까지를 통틀어 일본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12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에이이치를 지목했을 정도다.(‘일본을 이끌어 온 12인물’, 1997년 출간)





1840년 3월16일, 도쿄 인근의 부농(富農)이자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유학을 익힌 후 막부의 재정 확충에 힘을 쏟았다. 공을 인정받아 참가한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증기기관과 방적기계 등 서구 문물에 충격받은 그는 방문 일정을 연장해가며 회계법과 주식시장·은행제도를 익혔다. 귀국 후 대장성에 근무하며 일본군의 대만 출병 예산 계획안 등을 짰던 그는 관직을 버리고 창업과 교육의 길로 들어섰다. 상업강습소(훗날 히토쓰바시 대학으로 발전)를 차려 유럽식 복식부기와 주식시장 제도를 소개하고 은행을 세웠다. 국립 제일은행과 국립 77은행 등은 명칭만 국립이었을 뿐 사설은행이었으나 에이이치는 이를 기반으로 거의 모든 사업 영역에 뛰어들었다.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와 제지·방적·제철·철도·해운·항공기 제작·비료·호텔업·인형 공장 등 1931년 91세로 사망할 때까지 직접 설립하거나 설립에 참여한 기업이 모두 500여개. 아직도 남아 있는 삿포르 맥주와 임페리얼 호텔, 도쿄경제대학교, 히토쓰바시대학교, 도쿄전철 등의 출발점도 에이이치다. 유례를 찾기 어려운 그의 창업 및 신규 사업 리스트에는 한국의 경인·경부철도가 포함돼 있다. 다이치의 ‘일본을 이끌어 온 12 인물’에 따르면 에이이치는 창업에도 매진했지만 근본적으로 조직을 만들고 컨설팅하는 데 보람을 느끼고 일생을 바쳤다.

에이이치는 창업자 뿐 아니라 일본 재계의 설계자로서 더 큰 흔적을 남겼다. 국내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해도 해외에서는 그렇지 않고 정부의 지시에 순응하는 특유의 일본 기업 문화가 그로부터 시작됐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기업 총수끼리 머리를 맞대는 ‘재계 협조주의’가 이 때 생겼다. 유교와 자본주의를 결합한 기업 경영 사상을 만든 점도 유명하다. 76세(1916년)에 저술한 ‘논어와 주판’에서는 ‘경제·도덕합일설’을 주장하며 ‘유교자본주의’와 일본 특유의 노동·경영관의 기초를 깔았다. 에이이치를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년의 에이이치는 ‘부를 이루는 근원은 인의와 도덕’이며 ‘아무리 돈을 벌어도 의가 서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는 논지를 퍼트리는 데 힘을 쏟았다. 정작 본인은 85세 나이에 18세 여성과 혼외정사로 아들을 낳았어도 그의 도덕경영론은 일본 기업에 깊게 뿌리내렸다. 에이이치는 재벌이 되지 않아 일본인들에게 더욱 존경받았다. 기업을 모아 재벌을 형성했던 다른 창업자들과 달리 ‘돈을 모으는 것은 공익을 위해서일 뿐 사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그의 후손들도 따랐다고 한다. 후손 중에는 일본은행 총재와 대장성 장관을 지낸 뒤 민속학 연구에 뛰어들어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일본어로 번역한 시부사와 게이조가 유명하다.

일본 적십자사를 조직하고 논어의 도덕률을 중시했던 그는 인간적인 면모도 보였다. ‘결과의 평등’과 ‘공공협조’를 중시해 직원들의 급여를 올려주고 중국에서 대기근이 발생한 1920년대 중반 구호에 앞장서 1926년 1927년 연속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개항과 근대화의 여명을 맞이한 일본에서 수많은 씨앗을 뿌렸으나 정작 자신의 치부에는 크게 관심 갖지 않았던 에이이치. 한국 기업인 가운데 그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은 얼마나 될까. 김명수 계명대 교수(국제지역학부)의 연구논문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와 기업가의 탐욕:국익과 사익의 경계에서’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 기업인들의 ‘성공 방식’은 에이이치와 정반대다. 오늘날은 얼마나 다를지 모르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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