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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세계화





1602년 3월20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특허장을 받았다. 46개 조항으로 구성된 특허장의 핵심은 21년 동안 아시아 교역권 독점. 국가를 대신한 외국과 전쟁 선포권에서 종전조약 체결권, 화폐발행권까지 누렸다. 설립자본금은 650만 길더. 1년 3개월 전에 출범한 영국 동인도회사(HEIC)보다 10배나 많았다. 출범할 때 정식 명칭은 ‘통합 동인도회사(VNGOC)’로 회사 이름이 말해주듯이 VOC의 설립 취지는 통합에 있었다.

아시아항로 개척을 위한 네덜란드 회사들끼리 과당 경쟁을 막자는 목적으로 설립된 VOC는 세계 경제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유럽과 아시아 시장을 연결하고 세계화의 기초를 열었다. 명저 ‘근대세계체제’를 지은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에 따르면 VOC를 내세운 네덜란드의 약진은 지구촌을 핵심부와 주변부로 나눴다. 고 찰스 킨들버거 교수는 ‘경제강대국 흥망사’에서 네덜란드의 발흥으로 촉진된 세계화가 국가 간 계급과 서열, 즉 계서제(階序制·hierarchy) 성립으로 이어졌다고 봤다.

VOC가 남긴 성과는 기적으로 손꼽힌다. 당시 네덜란드의 인구라야 달랑 20만 명 수준. 정세도 불안정했다. 더욱이 세계 최강국인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펼치는 와중이었다. 주요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였으나 스페인은 여전히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던 상태였다. 해외로 나가는 항로 역시 봉쇄 상태. 특히 아시아 항로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포르투갈은 다른 유럽 국가의 진입을 철저하게 막았다.

네덜란드가 불리한 여건에서도 아시아 무역에 나섰던 이유는 위기 의식. 먼저 포르투갈과 베니스 등을 통해 반입되는 동양산 후추 등 향신료를 취급하는 중개상 지위가 흔들렸다. 독일 퓨거 가문 등 국제적 재벌들이 중간 도매시장 독점 체제를 굳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었다. 새 항로 발견 및 개척에 실패했던 점도 아시아를 찾았던 이유다. 유럽에서 북극해를 지나면 아시아와 교역하는 단거리 무역항로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고 북서항로 및 북동항로 개척에 나섰으나 줄줄이 실패했던 것.

아시아로 가려면 포르투갈과 경쟁하는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네덜란드인들은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쳤다. 고 페르낭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네덜란드의 아시아 항로에 대한 정보 수집과정을 최초의 근대적 산업스파이 활동으로 간주했다. 여행가와 포르투갈 선박에 승선했던 선원 등의 여행기, 지도제작자, 수학자 등에 의해 아시아 항로와 항해정보가 축적되고 나서야 항해 길에 올랐다. 네덜란드 배가 처음 아시아로 떠난 것은 1595년. 4척의 배에 240명이 출항했으나 성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30개월이 지나서야 선원 87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수익도 투자비용 29만 길더를 겨우 맞추는 선에 그쳤다.

사업은 성공하지 못했어도 아시아 무역의 가능성이 보이자 네덜란드 전역에서 투자 바람이 불었다. 약 77만 길더의 투자금으로 8척이 1598년 출항한 2차 선단은 대성공을 거뒀다. 최초 출항 이후 6년간 네덜란드에서는 15차례에 걸쳐 66척의 선박이 아시아를 향해 떠났다. 문제는 네덜란드 회사 간 과당 경쟁. 아시아 산지의 향신료 구매 가격은 올라가고 유럽 판매 가격은 계속 떨어졌다. 대부분의 원거리 무역회사들은 적자를 보고 대형 회사만 겨우 버텼다.

공멸 위기 속에 통합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잠재적 경쟁자인 영국 동인도회사가 칙허장을 받았다는 사실도 통합 무역회사 출범을 재촉했다. 막상 합의는 쉽지 않았다. 각 주의 주도권 다툼 속에 정부가 나서 극적으로 타결 본 시점이 바로 415년 전 오늘. 어렵게 출범한 VOC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 출범 50년이 안돼 20여 곳에 상관을 설치하고 포르투갈은 물론 영국도 훨씬 앞섰다. 영국이 무역 대상을 인도로 정한 이유도 향신료의 주산지인 인도네시아 확보 경쟁에서 네덜란드의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VOC가 순식간에 세계 무역을 휘어잡은 데는 비결이 있었다. 세계 조선량의 4분의 3을 차지하던 조선산업과 항해술의 발달, 청어잡이 등 어업과 발트해 무역을 통한 자본 축적 등이 먼저 일어났다. 아시아 항로 개척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달성할 역량을 쌓아왔던 셈이다. 결정적으로 도전 의욕에 불타는 인적 자원이 넘쳐났다. 유럽 경제의 중심지인 앤트워프시가 스페인 함락(1585년) 이후 신교도 학자와 자본가, 기업인, 기술자 10만여 명이 탈출해 네덜란드 각지에 흩어져 앞선 문화와 지식을 전하며 나라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VOC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네덜란드가 점령당한 1799년까지 197년 동안 연평균 18%씩 배당했다. 16~18 세기 동안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았다는 네덜란드가 연평균 2.54%, 나머지 국가들이 1% 대 성장에 머물렀던 점을 감안하면 기록적인 배당률이다. 다른 나라의 교역과 비교하면 VOC가 거둬 들인 실적은 독보적이다. 1602년부터 1796년까지 VOC가 아시아로 내보낸 유럽인이 약 100만명. 4,785척의 선박이 250만t의 아시아 물품을 유럽에 실어날랐다. 반면 네덜란드를 제외한 영국과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에 보낸 유럽인은 88만 여명 수준에 머물렀다. 다른 국가들이 보낸 선박의 총합계는 2,680척으로 VOC보다 훨씬 적었다.

VOC가 두각을 나타내자 다른 유럽 국가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동인도회사를 세웠다.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를 비롯해 ‘동인도회사’라는 이름을 가진 무역회사는 모두 11개에 이르렀으나 VOC에 견줄만한 회사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VOC의 비결은 무엇일까. 시장을 보는 재빠른 선택과 국가의 지원 덕이다. 네덜란드는 외국과 조약, 전쟁 등 아시아 지역에서는 VOC가 정부를 대신하도록 하되 간섭을 전혀 하지 않았다. 총독이나 상관장 등의 인사는 물론 핵심 의결 기구인 17인 위원회는 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움직였다.

VOC의 최대 돈벌이는 아시아 내부 교역망을 통한 중계무역. 인도산 면직물을 일본에서 은과 구리로 바꾼 뒤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1대6~1대11(유럽은 1대13)로 낮았던 중국에서 금으로 교환해 인도에서 후추를 사서 유럽에 파는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중국과 일본산 도자기도 이때 유럽에 퍼졌다. 전성기에 직원 5만명과 병력 2만명을 거느렸던 최초의 거대 주식회사 VOC의 끝은 좋지 않다.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사들여 회사를 장악한 대주주들이 고배당을 받아가며 재원을 고갈시킨 탓이다.

VOC의 최대 수혜자는 따로 있다. 일본. 나가사키의 VOC상관이 전파한 난학(蘭學) 덕분에 서구문물을 일찌감치 접하며 1854년 미국의 페리 함대에 의해 반강제 개항될 때까지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VOC가 일본에 보낸 선박은 770척에 이른다. 반면 조선은 기회를 놓쳤다. VOC는 제주도에 표류해 조선에서 14년간 억류 끝에 탈출했던 하멜의 보고서에 따라 1,000톤급 상선 ‘꼬레아호’를 건조하며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일본의 방해와 조선 조정의 무지 탓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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