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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달리자...포니 익스프레스





약 6시간 10분. 미국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LA)까지 여객기로 가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다. 애초에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하는 데는 6개월 걸렸다. 미국인들이 캘리포니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해는 1848년부터. 거대 금광 발견 소식을 타고 1만5,000여 명 남짓하던 캘리포니아 인구는 3년 만에 25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사람들은 어떻게 캘리포니아로 갔을까. 세 가지 수단이 있었다. 첫째는 육로. 산과 강, 사막을 건너는데 6개월이 소요됐다. 두 번째 이동 경로는 바다. 뉴욕 항을 떠나 미주 대륙 남단을 돌아 마젤란 해협을 지나 다시 북상, 샌프란시스코에 닿는 데도 반년이 걸렸다.

세 번째 경로는 파나마 경유 코스. 뉴욕에서 파나마까지 배편으로 이동한 다음, 육로를 지나 다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코스를 택하면 일정을 70일로 당길 수도 있었다. 첫째 방법은 육체적으로 고된 데다 인디언들의 습격 위협이 컸고 둘째 코스는 편했지만 비쌌다. 결국 파나마 코스가 가장 많이 활용됐다.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된 금을 동부로 보내는 경로도 마찬가지. 금(金)과 사람의 이동이 다음 세기에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파나마 운하 개통(1914)을 촉발한 셈이다.

남북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859년 캘리포니아주의 인구는 38만명 선에 이르렀다. 사람이 늘어나며 운송 및 의사전달에서도 더욱 빠른 수단이 나타났다. 말 네 마리 또는 여섯 마리가 끄는 역마차 운송이 지역 곳곳에서 생겨나기 시작해 1859년 3월부터는 대륙 횡단 역마차가 시작됐다. 서부의 초입인 미주리주(동부-미주리간은 이미 다른 역마차 노선이 많았다)에서 캘리포니아까지 19일 15시간이 걸렸다. 대륙횡단 역마차 사업은 규모가 컸다. 크고 작은 업자끼리 활발한 합병으로 한창때에는 직접 고용 6,000명에 말과 황소 7만 5,000 마리, 역마차와 우편마차 수천 량, 물류 창고와 은행, 보험회사까지 갖췄다.

개척지에서 활동했던 당시 사업자들을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물류·금융회사 겸 부동산 개발사업자 집단. 모험자본의 성격도 갖고 있던 이들은 새로운 사업 영역을 찾았다. 대륙횡단 역마차의 운임이 고액(6일 동안 100달러·요즘 가치 1만 8,200달러)이어서 여객보다는 편지나 선물 발송 등에 주로 활용된다는 점을 중시한 사업가들은 역마차의 기능은 그대로 수행하되 비용은 크게 줄인 새로운 사업을 구상해냈다. 말 4~6마리가 끄는 동력은 기수 한 사람과 말 한 마리로 바뀌었다. 대신 역마차 역시 극단적인 간략형으로 변했다. 안장 겸 우편 행낭 ‘모칠라(Mochila)’가 크게 무거운 역마차를 대신한 것이다.



‘포니 익스프레스(Pony Express)’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 사업에는 조랑말보다 날랜 말들이 동원됐다. 사업의 생명이 속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1860년 4월3일 미주리주를 출발한 속달 우편은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까지 3,145㎞를 11일 만에 주파했다. 링컨 대통령의 취임연설문을 전할 때는 7일17시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기수들이 평균 24㎞ 마다 설치된 역(驛 ·보급기지)에 도착할 때마다 새 말로 갈아타고 달린 결과다. 기수 한 명은 맡는 거리가 보통 120㎞. 부산과 대구 간 거리(109.4㎞) 이상을 달렸다. 나이 20세의 기수가 이틀 동안 496 ㎞를 달렸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도 있다. 당연히 위험도가 높았다.

포니 익스프레스는 이런 구인 광고를 냈다. ‘사람 구함:깡마르고 죽음의 위험도 불사할 만큼 강인한 18세 이하의 승마 도사. 고아 우대.’ 살벌한 구인 광고에도 소년들이 밀려들었다. 이유는 돈. 12시간 노동으로 잘해야 0.5~1달러를 받던 시절에 주급 25달러가 걸렸다. 소년이 아니라도 기수가 될 수 있었지만 절대적인 조건이 있었다. 체중 57㎏ 이하를 내걸었다. 안장과 결합된 우편 행낭의 무게(9㎏)를 감안할 때 말이 최고 속력으로 달리려면 작고 가벼운 기수가 필요했다. 요즘의 경마 기수처럼.



위험한 일이었으니 소년 기수들이 적지 않게 죽었다. 16명이 사망하고 말 150 마리도 죽거나 강탈 등으로 회사의 장부에서 지워졌다. 포니 익스프레스의 운송료로 14g(0.5온스) 당 5달러의 운송료를 받았다(점차 인하해 나중에는 이 요금이 1달러까지 내려갔다). 가격이 떨어지자 고객이 적지 않았지만 사업 시작 18개월 뒤에 문 닫고 말았다. 사업 기간 내내 지출이 20만 달러로 수입 9만 달러를 크게 앞섰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막강한 경쟁자가 나타났다. 대륙횡단 전신선의 샌프란시스코 가설 사흘 뒤에 포니 익스프레스는 사업권을 팔았다.

포니 익스프레스는 적자 속에 단명했어도 주주들은 막대한 수익을 챙겼다. 우선 대륙횡단철도의 노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정할 수 있었다. 곧 건설될 대륙횡단철도가 겨울철 폭설을 피하려면 남부를 통과해야 한다는 남부 자본가들의 주장을 누를 수 있었던 것. 남부가 우려한 겨울철 폭설 지역에서도 소년들은 말을 타고 속달 우편을 전했다. 결국 철도 노선은 북부와 신흥 서부 자본가들이 원하던 대로 중앙 노선으로 정해졌다. 소년 기수들은 북부 자본이 선호하는 철도 노선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포니 익스프레스의 대주주들은 크게 두 가지를 내세워 수익을 얻었다. 우선 앞서 말한 철도 노선. 대륙횡단철도가 지나는 철길 주변을 불하받아 개발 이익을 노릴 수 있었다. 포니 익스프레스 사업도 그냥 접은 게 아니라 당시로서는 거금인 150만 달러를 받고 팔아 치웠다. 인수자는 현금 호송업체였던 웰스 & 파고. 회사의 상징물로 포니 익스프레스를 내세웠던 웰스파고는 오늘날 글로벌 금융자본으로 커졌다. 포니 익스프레스는 우표와 신용카드, 고속도로 이름은 물론 동상과 유원지의 말 형상 놀이기구에도 남아 있다. 거친 황야를 달리던 소년들의 육신은 백골을 거쳐 흙으로 돌아갔을지언정 그 용기와 모험은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정신과 근육의 힘으로 극한을 뛰어넘는 도전은 인간 만이 누릴 수 있는 자산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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