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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폭스의 위대한 삶





1980년 4월12일, 캐나다의 동쪽 끝 뉴펀들랜드주 세인트존스 바닷가. 오른발을 바닷물에 적신 만 21세 청년 테리 폭스(Terry Fox)가 뛰기 시작했다. 목표지점은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빅토리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캐나다 국토를 가로질러 8,400㎞를 뛸 심산이었다. 대서양 연안에서 출발한 테리는 캐나다 지도가 그려진 옷을 입고 뛰었다. ‘희망의 마라톤(Marathon for Hope)’ 종착점에서는 태평양에 발을 담글 생각이었다. 굳건한 의지에도 첫날의 달리기는 쉽지 않았다. 강한 맞바람에 비까지 내렸다.

테리는 얼마 안 지나 힘을 얻었다. 주민 1만여명이 테리를 응원하고 후원금도 1만 달러를 모았다. 무엇이 주민들을 움직였을까. 위대한 도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테리가 출발 직전 대서양에 적신 다리는 의족이었다. 의족의 테리가 달리는 곳마다 응원하는 관중은 점점 늘어났다. 주민들이 테리를 각별하게 여기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테리는 이동형 침대차와 연료, 러닝화 등을 후원하겠다는 대기업들의 호의를 물리쳤다. 캐나다 횡단 달리기를 통해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이익을 얻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다.

테리가 캐나다 횡단 ‘희망의 마라톤’을 결심한 시기는 1978년.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의족 마라톤을 결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테리는 14개월 동안의 의족 마라톤 연습과 한 차례 풀코스 완주를 경험하고 대장정에 올랐다. 다리를 잃었지만 테리는 어릴 때부터 운동과 달리기를 좋아했다. 당초 희망은 농구선수. 야구, 미식축구, 육상을 즐기면서도 농구에 매달렸다. 문제는 키도 작고 ‘천부적 재능’도 없었다는 점. 8학년(중2) 때 키가 152㎝. 만년 후보였다. 8학년 때 테리가 정식 시합에 뛴 시간은 단 1분이었다.

코치의 권유로 주 종목을 야구와 달리기로 돌렸지만 테리는 끈질겼다. 남몰래 피나게 연습해 9학년에 정규 멤버가 되고 10학년부터는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졸업할 때 키가 농구선수로서는 여전히 작은 178㎝이었으나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교내 최고 선수상을 받았다. 캐나다 공립 3대 명문으로 꼽히는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에 진학, 신체운동학을 전공하며 테리는 농구선수 대신 체육 교사가 되어 선수를 키워내겠다는 꿈을 키웠다.

불운은 18세 되던 해 일어났다. 집 근처 다리 공사장에서 트럭과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고 가벼운 통증을 느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 달 뒤부터는 오른쪽 무릎이 쑤셨지만 애써 참았다. 대학농구 시즌이 끝난 5개월 후에야 그는 병원을 찾았다.

진단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통증의 원인은 사고 후유증이 아니라 희귀성 악성 골종양이었던 것. 암세포가 혈관을 타고 퍼지기 전에 종양 부위인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다. 19세 생일을 석 달 앞두고 테리의 오른쪽 다리는 무릎 위 15㎝까지 잘렸다. 한창 나이에 달리기와 농구를 좋아하던 그는 1년 반 동안 강력한 항암제 주사를 맞으며 극도의 고통과 싸웠다. 머리카락도 모두 빠졌다. 고통 속에서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가’로 번민하던 테리는 같은 병동의 어린이 암환자들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고 자신을 다그쳤다. ‘내가 저 어린이들보다는 낫다. 남을 위해 살자.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위해 체육 교사가 되고자 했던 것 아닌가.’



퇴원 후 휠체어 농구팀에 들어가 전국 대회를 휩쓸고 북미 올스타에 뽑혔던 테리는 남을 돕기 위해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당초 목표는 완주와 100만 달러 모금. 매일같이 마라톤 풀코스에 해당하는 거리를 뛰며 시간이 흐르는 동안 테리의 모금액 목표도 커졌다. ‘2,400만 캐나다 국민이 1캐나다 달러(이하 달러)씩 모아 2,400만 달러를 어린이 암 환자들에게 기부한다’는 생각이 알려지며 세상은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기자들도 따라붙었다. 기자들은 테리의 뛰는 모습에 놀랐다.

테리는 온 힘을 다해 뛰었다. ‘테리를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충격을 받는다. 입은 악다물고, 얼굴은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길만 바라보고 달렸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한 채 앞으로 비틀거리며 달렸는데, 의족이 굽혀졌다 펴지면서 몸이 앞으로 치솟았다. 한 발 한 발 달릴 때마다 엄청난 노력과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희망의 마라톤’을 동행 취재한 ‘토론토 스타’지의 레슬리 스크리브너 기자)

뜀박질은 고통 그 자체였다. 양쪽 다리의 불균형으로 성한 왼쪽 다리를 점프하듯 솟구쳐야 비틀거리며 겨우 달릴 수 있었다. 의족이 수없이 고장 나고 절단한 부위가 의족과 마찰 끝에 문드러지는 아픔을 참고 그는 143일 동안 5,373㎞를 달렸다. 아프고 불편한 외다리와 의족으로 서울-부산을 6번 이상 왕복하는 거리를 달린 상태에서 그는 ‘희망의 달리기’를 접었다. 암세포가 폐까지 퍼졌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성원과 간절한 기도에도 테리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 6월 숨졌다. 죽은 순간까지 다시 일어나 달리겠다던 테리가 사망한 다음날 캐나다 정부는 조기(弔旗)를 걸었다. 국민들도 울면서 조기를 달았다.

23살 생일을 꼭 한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난 테리의 세상에 대한 사랑과 의지는 갈수록 빛난다. 테리가 떠난 직후 2,700만 달러였던 어린이 암 연구기금(테리 폭스 재단)의 규모는 오늘날 6억5,000만 달러로 커졌다. 청년 테리는 이 세상에 없어도 지구촌 곳곳에서 수많은 ‘테리’가 달린다. 해마다 세계 60여개 국가에서 수백만명이 그의 이타심과 불굴의 의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리는 ‘테리 폭스 마라톤’에 참여한다. 캐나다의 수많은 건물과 거리에 이름이 남아 있는 테리 폭스는 ‘희망, 사랑’과 동의어다.

테리 폭스는 지난 2004년 캐나다방송협회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캐나다인’설문조사에서 2위로 손꼽혔다. 1위는 토미 더글라스(Tommy Douglas, 1904~1986). 목사 출신의 정치인인 그는 서스캐처원 주지사이던 1961년, 거대 보험사들과 의료 단체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고 ‘포괄적 공공의료보장제도’를 도입한 인물이다. ‘모범적인 의료복지국가 캐나다’를 만든 주역이다. 테리 폭스와 토미 더글라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나보다 남을 위해 살았다’는 점이다.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나보다 어려운 남을 도우려는 테리 폭스의 인간애는 캐나다의 자랑이자 인류가 공유하는 고귀한 자산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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