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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히 베풀어 욕심껏 벌다……다이아몬드 짐





제임스 브래디(James Brady:1856~1917). 포천(Fortune)지가 ‘미국 역사상 최고의 세일즈맨’으로 뽑았던 인물이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많이 버는 것보다 무한정 써대는 사람으로 여겼다.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해 본명보다는 다이아몬드 짐(Diamond Jim) 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더 유명한 것은 먹성. 아침 식사로 계란 5개과 팬케이크, 포크촙, 옥수수빵, 구운 감자, 옥수수, 머핀 케이크에 비프스테이크를 먹었다. 입가심은 초콜릿 1파운드와 오렌지 주스 1갤런. 점심은 본인 얘기로 ‘아주 조금만 조촐하게’ 먹었다. 바닷가재 2마리와 양념 대게, 조개, 굴, 쇠고기.

저녁에는 성찬을 즐겼다. 굴 20~30개와 대게 6마리, 거북이 수프가 입맛을 돋우기 위한 전채요리. 본 요리로 오리 2마리, 바닷가재 6~7마리, 등심, 식용 거북을 먹어치웠다. 디저트 메뉴는 페이스트리와 사탕 2파운드. 별명 ‘다이아몬드 짐’답게 외모도 한껏 꾸몄다. 2만개의 다이아몬드를 사들여 지팡이와 넥타이, 단추, 벨트, 지갑, 시계에 새겨 넣어 보통 2,000~3,000개는 지니고 다녔다. 보석도 하루에 6~7번씩 바꿔 달았다. 브로드웨이를 산책하는 그를 불러 세워 보석을 세어보니 다이아몬드 2,548개와 루비 18개를 치장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다이아몬드와 루비, 사파이어가 박힌 자건거를 타고 유명 여가수 릴리언 러셀과 거리에 나섰을 때는 몰려든 구경꾼으로 교통이 뒤엉켜버렸다. 뉴저지의 농장 파티에서는 금으로 두껍게 도금한 들통에 젖소의 신선한 우유를 받아 마셨다. 당구 테이블은 붉은 옥과 청금석으로 장식하고 포커 칩에는 진주를 입혔다. 실내장식가에 3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주고 가구 배치를 맡겼으며, 해마다 친구들에게 쓰던 가구를 주고 새 가구를 들였다.

폭식하고 사치품을 사는데 엄청난 돈이 들어갔으나 브래디는 개의치 않았다. 쓰는 만큼 들어온다고 믿었다. 특징은 주변에 늘 누군가 옆에 있었다는 점. 혼자 먹지 않았고 보석도 나눠줬다. 세일즈맨이라고 해도 누굴 찾아가기보다 앉아서 기다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낌없이 선물하는 그에게는 고객들이 줄을 서 물건을 샀다. 식사와 보석뿐 아니라 매춘부까지 제공한 브래디에게는 반대급부로 주문과 월스트리트의 비밀정보가 들어왔다. 덕분에 월가의 큰손으로 이름을 날렸다.

브래디는 자신을 ‘타고난 장사꾼’으로 여겼다. 부친이 운영하는 뉴욕의 작은 선술집에서 어린 시절부터 주문을 받고 맥주를 날랐다. 데일 카네기의 ‘1% 성공습관’에 따르면 동요를 배우기 전에 술병 코르크 마개 따는 법을 먼저 익혔다. 카네기는 브래디의 성공 요인을 ‘틈새 기회를 놓치지 않는 세일즈’라고 봤다. 호텔 벨보이, 철도역 직원으로 일하던 그는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발전 가능성이 큰 철도 관련 제품을 판매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브래디가 애초에 주목한 제품은 객차. 나무 객차가 주류인 시대에 철제 객차에 눈을 돌렸다. 신제품을 팔려던 제조회사들은 그에게 판매가의 33%에 이르는 커미션을 내줬다. 막대한 돈이 들어오는 대로 그는 먹고 접대비로 뿌렸다. 철제 객차라는 틈새시장으로 시작한 그의 세일즈 영역은 점차 기관차와 레일 등 철도 관련 전 제품군으로 넓어졌다. 눈만 뜨면 새로운 노선이 생기던 시절, 철도업자들은 앞다퉈 ‘보석으로 유명한데다 아낌없이 접대하는 다이아몬드 짐’의 기관차와 객차를 샀다. 국제적으로도 알려져 1차 대전 중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3만 8,000여 대의 자동차를 단일 주문으로 받은 적도 있다.

투자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순발력을 동원한 투자로 유명한 사례가 농장과 철도 투자. 조지아주의 철도 노선 주변에 과수원들이 들어서는 것을 눈여겨보고는 해당 철도회사의 채권을 있는 대로 사들였다. 과수원의 복숭아를 비롯한 수확물들이 철도회사로 운반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철도 채권과 주식을 매수하면서 과일 농장도 사들였다. 고객과 식사할 때면 복숭아 등 농장의 수확물을 맛있게 먹었다. 5년 뒤 브래디는 채권에서만 700%에 이르는 수익을 거뒀다.

세일즈로 성공해 은행과 증권사까지 사들인 그는 작전도 마다하지 않고 재산을 불렸다. 주식에 손을 댈 때는 늘 총력전을 펼쳤다. ‘가격이 낮고 유망한 종목’이라고 판단되면 시장의 유동 물량 전부를 사들이고 매도할 때는 보유물량 전부를 던졌다. 워낙 많은 물량을 던지는 통에 브래디의 손을 탄 주식은 폭락으로 이어지기 십상이었으나 여느 부자와 달리 크게 질시 받지 않았다. 베푼 덕분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오면 돌려받을 수 없다는 점을 뻔히 알면서도 빌려주었다.

죽음의 문턱에서는 자신의 소유권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없앴다. 평생 미혼으로 살아 자손을 남기지 못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곧 죽는다. 죽고 난 뒤까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만들지 않으련다.’ 사망 뒤에도 그는 뉴스를 탔다. 1917년 4월 13일 61세를 일기로 눈을 감은 그의 부고 기사는 해부 결과 ‘보통 사람보다 8배나 큰 위장을 갖고 있었다’는 소식으로 화제에 올랐다. 사람들은 그를 돼지처럼 먹었던 먹보로 기억할까. 그렇지 않다.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 비뇨기과 연구소에는 거액을 기부한 그의 이름이 아직도 걸려 있다. 평신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전 재산은 물론 시신까지 뉴욕병원에 기부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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