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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눈알을 뽑은 이레네 여황





이레네 황후(Irene of Athens). 아름다웠으나 교활하고 이중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여인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 자기가 낳은 친아들의 두 눈을 뽑아 버린 비정의 어머니로 유명하다. 악행을 저지르면서까지 찬탈한 권력으로 그녀는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비잔티움 제국을 철저하게 망가트렸다. 서부 유럽과 인연도 끊어졌다. 도대체 누구이길래? 아테네 출신이라는 점 외에 그녀의 인생 초반부는 알려진 게 없다.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을 뿐 가계와 조상도 불분명하다. 이레네라는 이름도 황태자비가 된 후부터 사용했다.

열여섯살 때 두 살 연상인 황태자와 결혼한 그녀가 권력 전면에 등장한 것은 28살 때부터. 남편 레오 4세가 780년 결핵으로 사망하자 열살 짜리 아들의 섭정을 맡았다. 처음부터 이레네에게는 반대파가 많았다. 동로마제국 전역에서 730년부터 시행된 성상파괴운동(Iconoclasm)을 금지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성상파괴운동이란 마치 우상처럼 받드는 성화나 동상을 파괴하자는 것으로 소아시아 지방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반대로 제국의 유럽 지역에서는 성상 숭배론자 또는 옹호론자가 많았다.

아테네 출신인데다 왕비 시절부터 성상 파괴를 저지하려 노력한 이레네가 섭정을 맡자마자 곳곳에서 반란이 고개를 들었다. 성상 파괴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 중서부)의 군대는 폭동을 일으키고 전임 황제의 다섯 동생 중 한 명을 새로운 황제로 지지하고 나섰다. 이레네는 군대를 숙청하는 한편 도련님 다섯 명을 모두 삭발시키고 강제로 성직에 앉혔다. 군은 바로 반발했다. 시칠리아 총독이 사라센 제국의 편에 붙고 아르메니아 주둔 군대도 이슬람 편으로 돌아섰다.

세를 불려 국경을 침범한 이슬람 군대를 이레네는 돈으로 막았다. 3년 동안 해마다 순도 98% 4.5g짜리 금화 7만 개와 비단 옷 1만벌을 공물로 바치는 굴욕적 평화를 맺은 이레네에 대한 불만은 날로 높아졌다. ‘로마제국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이레네가 자신은 졸(卒)로 여기고 이슬람 칼리프는 차(車)로 생각해 무리한 조공을 바쳤다’는 평가를 남겼다. 이슬람과 화친보다 더 큰 분란은 성상 숭배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이레네는 786년부터 두 차례나 서방교회까지 포함하는 공의회를 니케아에서 소집한 끝에 성상파괴운동을 금지시켰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는 성상 숭배란 우상 숭배와 진배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어머니에게 막혀 도리가 없었다. 아들이 점점 성장하는 데도 이레네는 오히려 권력을 강화해나갔다. 단순한 섭정이 아니라 공동황제로서 자신이 아들보다 선임군주라는 법까지 만들었다. 황제 이름을 호명할 때도 아들보다 자기 이름을 먼저 부르도록 강제했다. 자연스레 콘스탄티누스 6세는 반대파, 즉 성상 파괴론자들의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불안해진 이레네는 군대의 충성 서약을 받고 아들을 잡아 감옥에 가뒀다.

성상 파괴의 전통이 강한 소아시아의 군대는 이레네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들을 구출해 단독 황제로 세웠다. 790년 이레네는 궁전에 감금되고 대신들은 유배지로 떠났다.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는 이레네의 나쁜 성정을 그대로 물려받아 대외적으로 한없이 약하고 대내적으로는 강압적인 정치를 펼쳤다. 이슬람 군대의 침공을 받을 때마다 막대한 공물을 약속하고 위기를 넘기던 콘스탄티누스 6세는 외침이 계속되자 어머니를 수도로 불러들여 예전의 지위에 복귀시켰다.



콘스탄티누스 6세는 어머니가 억지로 성직자로 만든 삼촌 다섯 명이 권좌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나는 맹인으로, 나머지 4명을 혀를 잘랐다. 외국 군대에는 약하지만 국내 정치에서는 비열하고 잔인한 군주에 대한 평판이 좋아질 리 만무. 황제의 인기는 점점 떨어졌다. 더욱이 콘스탄티누스 6세가 795년 적법한 아내와 헤어지고 궁녀와 재혼한 뒤부터는 ‘황제의 재혼이 적법하냐’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황제의 권위와 인기가 한없이 떨어진 가운데 이레네는 정권을 탈취하기로 결심했다.

797년 4월19일, 이레네는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정부를 전복시켰다. 얼마 뒤 이레네는 자신이 출산했던 방에 아들을 불러 두 눈알을 뽑았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잔혹한 궁정 암투 직후, 콘스탄티노플의 하늘은 17일 동안 어둠에 싸였다고 전해진다. 가뜩이나 바닥이던 이레네의 인기는 아들을 죽인 이후 더욱 땅에 떨어졌다. 이레네는 선심 정책을 펼쳤다. 정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세금을 깎아주고 보스포루스 해협 등에서 걷는 관세도 절반으로 낮췄다. 거래세와 주민세는 아예 없애버렸다.

이레네는 돈으로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지만 떠난 민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더욱 큰 문제는 황제에게 복속하던 교황이 비잔티움 제국과 황제를 우습게 보기 시작했다는 점. 처음에는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는 정도였으나 800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사건을 일으켰다. 교황이 프랑크왕국의 국왕 샤를의 머리에 제관을 씌워주고 ‘로마의 황제’라는 칭호를 내린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 유럽에서 유일한 황제국가였던 ‘신성로마제국’이 이렇게 탄생했다.

서방의 새로운 황제 샤를은 802년 여름 동방의 황제 이레네에게 청혼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나이 50세의 이레네는 10살 많은 샤를의 청혼을 받아들일 심산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샤를의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플의 현실에 놀랐다. 백성들은 여황제를 경멸하고 혐오했으며 국고는 바닥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도 프랑크 왕국의 사절단이 싫었다. ‘글도 모르고 문화 수준도 낮은 프랑크 촌놈’에게 제위를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한 고위관료들은 이레네가 가벼운 병에 걸린 틈을 타 황궁을 장악했다. 시민들은 원형경기장에 모여 ‘이레네 퇴위’를 부르짖었다.

결국 이레네는 체포되고 작은 섬에 유배됐다가 이듬해인 803년에 죽었다. 아들까지 죽여가며 독차지한 권력을 누린 기간은 불과 5년. 사망 직전까지 10개월은 유배지에서 보냈다. 고집 세고 권력 욕심 많았던 여인이 권좌에 있는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영토를 상실하고 시칠리아도 잃었다. 무엇보다 중부 이탈리아가 프랑크족의 지배를 거쳐 교황의 소유로 넘어갔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교류와 연대의식도 끊어졌다. 영국의 외교관 출신인 역사학자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대작 ‘비잔티움 연대기’에 이런 평가를 내렸다. ‘이레네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사반세기 동안 불화와 재앙을 가져왔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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