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자크 카르티에…캐나다 탐험의 명암





1534년 4월20일, 프랑스 북서부 항구 도시 생 말로. 선원 61명을 태운 60톤짜리 범선 두 척이 부두를 떠났다. 특이점은 환송 군중. 유난히 많았다. 프랑스가 신대륙 진출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구성한 첫 탐험 선단이었기 때문이다. 리더는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당시 42세). 생 말로 대교구의 재무 관리인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배를 타 원양 항해가로 이름 날리던 인물이었다. 카르티에는 북미와 브라질까지 다녀온 경험이 있어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애써 카르티에를 먼 바다로 보냈으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일찌감치 대항해에 나섰던 마당. 프랑스는 두 가지에 막혀 바다에 나서지 못했다. 첫째, 선두 주자의 벽이 두터웠다. 교황이 세계의 바다를 반으로 갈라 스페인과 포루투갈에 과점 시킨 토르데시야스조약(1492) 이후 두 나라는 원양 항해에 나서는 제3국 선박을 잔인하게 부쉈다. 둘째 요인은 전쟁. 선출직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프랑수아 1세는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막대한 전비와 배상금 탓에 큰 자금이 들어가는 원양 항해에 나설 돈이 모자랐다.

프랑스는 노골적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단에 대한 해적 행위를 펼치는 한편 대안을 찾았다. 대서양을 건너 북미 대륙에서 큰 강을 지나면 중국에 닿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북서항로’ 개척을 구상한 것이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 항해(1522) 이후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프랑수아 1세는 개인 자격으로 1524년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귀족 출신 뱃사람인 지오바니 베리자노에게 신항로 개척 임무를 맡겼으나 가능성만 확인했을 뿐 실패로 끝났다. 프랑스는 다시 약탈에 나섰다. 합스부르크 가문을 육지에서 견제하려고 오스만튀르크와 비밀 군사동맹까지 추진했던 터.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해상에서 견제하기 위해 1533년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와 손잡기도 했다.

북서항로 개척 사업을 본 궤도에 올린 주역은 장 르 베뇌르 대주교. 1532년 성당을 방문한 프랑수아 1세에게 대주교는 자크 카르티에를 소개하며 탐험 비용까지 후원하겠다는 건의를 올렸다. 국왕은 카르티에 탐험대장에게 전권을 맡기고 하사금 6,000 리브르를 주며 격려했다. 카르티에는 북서항로와 식민지 개척 외에 고급 어종 대구가 몰린 것으로 알려진 뉴펀들랜드 주변의 어장을 조사하는 임무도 맡았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순풍과 해류를 타고 뉴펀들랜드 지역에 도착(5월 10일)할 때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20일. 콜럼버스가 스페인을 출항해 신대륙을 밟기까지 소요된 70일보다 훨씬 짧았다. 심지어 초기 증기선의 대서양 횡단 기록과 맞먹을 만큼 경이적인 속도였다. 순항에 고무된 카르티에 탐험대는 먹거리도 쉽게 찾았다. ‘새의 섬’에서는 새 1,000마리를 식량으로 잡아 두 척의 보트에 가득 채웠다. 대부분 큰바다쇠오리(Great auk)였다.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던 이 새는 이때부터 서양인들에게 남획되기 시작해 1844년 멸종됐다.

새의 섬 북쪽에서는 ‘소처럼 크고 백조처럼 하얀’ 북극곰을 잡아먹었다. 선원들은 “마치 2년생 수송아지 고기처럼 먹기에 좋고 맛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현지에서 식량을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탐험대는 자신감을 갖고 두 달 보름 동안 뱃길을 탐사한 끝에 수많은 정보를 알아냈다. 조선용 목재를 벌목할 수 있는 울창한 삼림과 순박한 원주민의 존재, 얼마든지 획득할 수 있는 모피…. 정작 원하던 것은 없었다. 물산이 풍부하다는 중국의 황실 대신 석기시대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반라(半裸) 원주민 몇 개 부족과 조우했을 뿐이다.

황금이라고 믿었던 반짝이는 돌도 운모(雲母)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르티에는 주요 지역에 ‘프랑스 왕의 영토’라는 표식과 십자가를 남기고 원주민 추장의 아들들과 함께 프랑스 생 말로 항구로 돌아왔다. 소득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강한 역풍과 해류에 밀려 전진하지 못했으나 ‘중국으로 통하는 수로라고 믿어지는 거대한 강’을 찾아냈다. 보고를 받은 프랑수와 1세는 평생의 라이벌인 카를 5세(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차지한 광대한 식민지에 버금가는 영토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 아래 두 번째 탐험대를 보냈다.



귀환한 지 두 달도 안돼 출항한 카르티에 선단은 첫 항해보다 규모가 커졌다. 선원 110명에 선박 3척. 기함은 120t으로 첫 항해보다 두 배 크기였다. 연안 탐사를 위한 40t짜리 작은 배도 갖췄다. 2차 출항에서는 대대적인 종교 축제와 함께 선원마다 대주교의 각별한 축복을 받았다. 두 번째 항해는 쉽지 않았다. 역풍을 만나 기함은 50일 만에, 나머지 두 척은 70일이 걸려서야 목적지에 닿았다. 소득은 1차 항해와 같았다. 다만 오대호로 통하는 세인트로렌스강을 발견해 ‘중국으로 가는 큰 강’이라 믿고 상류까지 가는 소득을 건졌다. 1년 8개월에 걸친 2차 항해에서는 원주민 추장을 생포해 돌아왔다. 귀환한 이유는 혹독한 겨울 때문. 85명만 살아남았다.

프랑수와 1세는 1540년 10월에도 ‘금과 루비 등 보석이 넘치는 사그네(Saguenay) 왕국’을 찾으러 5척으로 구성된 탐험대를 보냈다. 결과는 마찬가지. 중국으로 가는 항로는 물론 금과 은의 발견에도 실패했다. ‘금으로 가득 찬 사그네 왕국’도 금의 소재지를 닦달하는 카르티에 일행의 채근에 못 이긴 원주민이 들려준 옛날 얘기였을 뿐이다. 하지만 카르티에는 3차 항해에서 커다란 궤적을 남겼다. ‘캐나다’라는 이름이 탄생한 것. 강을 타고 북상하던 그의 일행이 가는 곳을 이로쿼이족 원주민들이 ‘카나타(Kanata·마을이라는 뜻)’라고 부른 데서 비롯됐다. 몬트리올이라는 지명도 카르티에가 이름 붙인 ‘국왕의 산(몽 레알)’이 변한 것이다.

카르티에는 3차 탐험에서도 원했던 성과를 이루지 못했으나 캐나다에 프랑스 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비록 원주민들을 철저하게 이용한 뒤 배반했지만…. 카르티에가 찾아낸 세인트로렌스 강은 아직도 미국과 캐나다 물류의 동맥이다. 카르티에의 캐나다 탐험 130여 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식민화에 나선 프랑스는 땅을 지키지 못했다. 캐나다 지역은 영국과의 전쟁에서 빼앗기고, 오늘날 미국 중서부 동쪽의 광활한 루이지애나는 나폴레옹 전쟁기인 1803년 신생 미국에 1,500만 달러를 받고 넘겼다.

북미에서 프랑스 색채가 강한 캐나다 퀘벡주에는 지금도 ‘자크 카르티에’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강과 수많은 공원, 다리, 도로와 군사요새, 산과 성당, 빌딩에 이름을 남겼다. 캐나다의 프랑스계 일각에서는 국가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을 1867년(7월1일) 캐나다 자치 연방 성립이 아니라 카르티에가 처음 상륙한 1534년으로 올려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카르티에는 캐나다 땅에 상처도 안겼다. 고래와 거북이, 대구와 넙치, 연어가 헤엄치고 물개가 뛰놀던 세인트로렌스 강은 산업화와 함께 죽음의 강으로 변해갔다.

고래와 바다코끼리는 작살과 몽둥이를 맞으며 기름 가마에 걸렸다. 큰바다쇠오리처럼 멸종된 동물도 적지 않다. 원시림은 마구잡이로 벌목되고 거대한 운하가 뚫려 이 지역은 해발 180m가 넘는 산까지 선박들이 드나들었다. 세인트루이스 수로와 5대호 부근이 19세기 중엽부터 중미 최고의 제조업단지로 자리 잡은 결과 인간도 위협받고 있다. 강을 비롯한 캐나다 동부는 자연보호 노력으로 자정 능력을 찾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요즘도 강물에 버리는 오염물질을 둘러싸고 캐나다와 미국이 신경전을 벌인다. 카르티에가 그토록 가려고 했던 중국도 세계 최대의 오염국가로 전락한 지 오래다. 카르티에가 환생한다면 중국을 찾아가고 싶을지, 영국 국기로 뒤덮인 캐나다를 보고 심정이 어떠할지 궁금하다. 당시에는 자연 파괴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겠지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