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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스페인 상륙





711년 4월27일, 북아프리카에서 출발한 베르베르족 이슬람 군대 1,700명이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남단에 발을 들였다. 이슬람군이 침입할 때까지 서고트 왕국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부 권력 다툼으로 경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데다 침공 함대를 무역 선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유목민 출신인 베르베르족의 기병이 대부분이던 상륙군은 유유히 배에서 내렸다. 이슬람군의 상륙 지점은 머지않아 ‘지브롤터(Gibraltar)’라는 지명을 얻었다. 이슬람군을 지휘한 타리크(Tariq)가 처음 밟았던 바위 언덕을 뜻하는 아라비아어 ‘Gibr Tariq’가 변해 지브롤터로 굳어진 것이다.

이슬람군이 지중해를 넘어 침입한 원인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왕자들끼리 왕위 계승전에서 밀린 서고트 왕족들이 구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특별한 배경이나 이유보다 이슬람 왕조의 팽창 본능에 따른 사건이라는 해석도 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제국은 동쪽으로 인도,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를 석권하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신흥 이슬람의 차고 넘치는 에너지가 자연스레 유럽을 향했다는 것이다.

침공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도 견해가 엇갈린다. 타리크의 실제 병력은 1만2,000명이지만 기록 과정에서 ‘0’이 하나 빠졌다는 풀이도 있다. 분명한 점은 타리크의 상륙 이후 타리크의 상관인 ‘무사 이븐 누사이르’ 장군이 지휘하는 병력이 추가로 상륙했다는 점. 숫자가 1만 5,000여명으로 불어난 이슬람군은 이베리아 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서고트 왕국은 뒤늦게 반격에 나섰다. 병력 3만3,500여명을 모아 국왕 로데릭이 방어전의 선두에 섰지만 1만2,000여 이슬람군의 예봉을 당해낼 수 없었다. 서고트 왕국도 결국 무너졌다.

파죽지세로 이베리아 반도를 휩쓴 이슬람군의 기세는 732년에서야 꺾였다. 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majordomus, 최고 권력자) 카를 마르텔이 피레네 산맥 근처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야 기독교 세계는 이슬람의 동진을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시선을 이베리아 내부로 돌린 이슬람군은 영역을 넓히는 한편으로 도로를 깔고 도시를 세웠다. 반면 서고트 왕국의 귀족들은 북쪽 고산지대나 외국으로 밀려났다. 오늘날 스페인 영토의 76% 가량이 이슬람의 손에 들어왔다.

이슬람의 통치를 받게 된 이베리아 반도는 학정과 종교 탄압에 신음했을까. 정 반대다. 개종해 무슬림이 되라는 강압도 없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신앙 자유를 허용하는 종교적 관용 속에 찬란한 문화가 피어났다. 이슬람이 건설한 도시 코르도바는 바그다드와 콘스탄티노플에 견줄 수 있는 서방 최고의 도시로 손꼽혔다. 이슬람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정원에는 오늘날에도 관광객이 몰린다. 이슬람의 문화유산이 달러를 벌어들이는 굴뚝 없는 공장인 셈이다.



이교도 중 최대의 수혜계층은 유대인. 인두세만 내면 이슬람교도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이베리아의 역대 이슬람 군주들은 유대인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행정 일선 업무를 맡겼다. 유대인 중에는 이슬람 군대의 최고사령관까지 오른 인물도 있다. 나라를 잃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이 황금기를 누렸던 게 바로 스페인의 이슬람 왕국에서다. 19세기 후반까지 세계 유대인을 이끌었던 ‘세파르딤(Sephardim·스페인, 포르투갈계 유대인)’이라는 유대인 집단과 문화도 이때 형성된 것이다.

유럽도 얻은 게 많다. 코르도바의 도서관과 학자들 덕분에 유럽은 단절됐던 그리스의 자연 철학사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마저 자취를 감췄던 상황. 기독교 공인과 함께 신성이 중시되며 고대 그리스의 무수한 서적은 잊혀지고 사라졌던 터였다. 학문을 장려했던 이슬람은 수많은 학자들을 투입해 고대 그리스의 서적들을 번역해 간직하고는 고스란히 유럽에 돌려줬다. 스페인에 존재하던 이슬람 왕국이 바로 유럽으로 지식이 환류하는 창구 역할을 맡았다.

이슬람의 학생 격이었던 유럽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배웠다는 사실도 애써 지웠다. 유럽에서는 잊혀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방대한 주석을 남긴 이븐 루시디(Ibn Rushd)를 ‘바로 그 해설자(the Commentator)’라고 존경하면서도 이름은 라틴어식으로 바꿔 아베로에스(Averroes)라고 부른다. 사서삼경에 대한 방대한 주석을 남긴 주희(朱熹)가 송나라 사람이 아니고 고려인이나 일본인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면 지식에 대한 사기에 다름 아니다.

스페인을 침공했던 이슬람은 차츰 힘을 잃어가다 1492년 완전히 쫓겨났다. 북부의 산악지대로 도망쳤던 서고트족의 입장에서는 781년 만에 실지를 회복한 셈이다. 산 사람으로 전락했지만 나라를 찾겠다는 사명감은 전투적인 신앙과 결합해 배타적 우월의식으로 굳어졌다. 스페인 제국이 대항해 시대를 주도했기 때문일까. 실지회복운동(레콩키스타)을 벌이며 생성된 이베리아 반도 지역 특유의 정열과 전투적인 신앙은 유럽 각국으로 퍼졌다. 그 결과는 지구적 규모의 제국주의의 등장과 식민지 수탈, 오리엔탈리즘(동양에 대한 서구 우월감)의 심화로 이어졌다. 1306년 전 밤 야습을 감행한 이슬람교도와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는 기독교도 사이에는 종교의 폭력화라는 공통점이 숨어 있다. 양자의 대립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신앙의 전투화는 위험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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