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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길거리 패션을 사업 아이템으로 200억원 쇼핑몰 키운 사연

윤자영 스타일쉐어 대표

윤자영 스타일쉐어 대표




같은 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어머니로 인해 주변의 시선을 받는 게 싫었다. 선생님은 물론 주변 친구들의 주목을 받아야 했고, 모범생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힘들었다. 같은 재단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게 싫어서 죽기 살기로 공부했고, 운 좋게도 외국어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교 2학년이 됐을 때 우연치 않게 아이팟을 갖게 됐다. 정보기술(IT) 기기가 이렇게 예쁠 수 있을까 감탄했고, 당시의 감동은 전기전자공학과를 선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길거리 패션에 꽂혔다. 굳이 잘 나가는 모델이 아니어도 평범한 사람들이 멋스럽게 옷을 입는 ‘길거리 패션’을 보면서 이러한 정보를 모두가 공유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부지 대학생의 아이디어로 끝나는 게 싫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길을 모색했고, 결국 연 매출 200억원을 올리는 스타일쉐어 창업으로 이어졌다. 윤자영(29·사진) 스타일쉐어 대표의 현재진행형 스토리다.

◇자유로운 영혼을 만든 어린 시절



부모님은 고려대 캠퍼스 커플이었다. 법학도로 총학생회장까지 지냈던 아버지는 간호학과 학생회장이었던 어머니에게 반해 열렬한 구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고 한다.

‘정치를 하지 않는 것’이 결혼 조건이었기에 여느 총학생회장들이 선택한 길과는 달리 민간 기업인 금성사(지금의 LG)에 입사했다. 간호사 생활을 하던 어머니는 보건교사 임용고시를 합격해 상명여중에서 근무했다.

세기의 로맨스로 잡지 표지에 실린 윤 대표 가족의 사진. 부모님은 고려대 캠퍼스 커플이었다. 법학도로 총학생회장까지 지냈던 아버지는 간호학과 학생회장이었던 어머니에게 반해 열렬한 구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고 한다. 당시 윤 대표은 아버지 품에 안겨 있는 1살 짜리 갓난아기였다. /사진제공=윤자영 대표


윤 대표의 어린 시절 성격은 꽤 외향적이었다. 동네 목욕탕을 데려가면 어느새 없어져 찾아보면 한 구석에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놀고 있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워낙 활달한 성격에다 친구들과 두루 어울렸던 그녀는 초등학교 내내 반장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5학년 때는 전교 부회장을, 6학년 때는 전교 회장을 도맡아 했다.

“어릴 때부터 반장 자리를 맡아서 하다 보니까 언제부터인가는 으레 내가 해야 하는 자리라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아요. 어려서인지 친구들의 주목을 받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는 게 너무 좋았던 거죠.”

선생님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명여중에 입학했다. 매일 어머니와 함께 등교하면서 처음에는 교직원인 엄마의 딸이라는 게 자랑스러웠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주목이 부담스럽고 불편해졌다. 사춘기까지 겹치면서 어머니의 딸이 아닌 ‘윤자영’으로 살고 싶다는 욕구가 커졌다.

“성적은 좋지 않지만 착한 친구들이랑 어울리게 됐어요. 시간 날 때마다 이 친구들한테 공부를 가르쳐주곤 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엄마한테 고자질을 한 거에요. 제가 나쁜 애들이랑 어울린다고 말이죠. 이 친구들은 공부만 못하지 정말 착한 애들이었는데 선생님이 성적으로 편을 가르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아요.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 현재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게요. 초등학교 때는 즐겁기만 했던 주변의 관심이 이때는 너무 힘들고 피곤해졌죠. 나라는 존재가 눈에 띄지 않는, ‘익명성이 보장된’ 집단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죠.”

어린 시절 외할머니 손에서 큰 윤 대표는 할머니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가슴 깊이 안고 있다. 윤 대표가 3살이었을 때 할머니, 어머니, 오빠와 함께 수영장을 찾은 모습이다. /사진제공=윤자영 대표


중학교 3학년 때는 전교 회장을 맡았다. 전교 회장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했지만 학교의 엄격한 규율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는 앞머리 없는 귀밑 1센티 단발만 허용될 정도로 규율이 엄격하던 때라 학생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윤 대표는 전교 회장이라는 직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앞머리를 짧게 자르고 등교했다. 전교 회장이 규율에 반항한 셈이다.

교무실 앞에서 1시간 동안 서 있는 벌을 한 달 동안 받았다. 다리가 아팠지만 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했다. 모처럼 자신이 원하던 자유를 만끽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까지 자유를 억누른 생활, 누군가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재단 고등학교 진학을 피하기 위해 방법을 찾던 윤 대표의 귀에 특수목적고등학교가 들어왔다. 당시는 민족사관학교 전형은 끝났을 때라 외국어고등학교가 유일한 탈출구였다. 외고에 들어가면 교복도 예쁘고, 단발 등 복장 규정이 엄하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당장 입시학원에 등록했다.

“어머니가 자유롭게 키우신 편이라 선행 학습 같은 건 안 했던 시기였죠. 그런 실력으로 외고에 진학하려니 처음에는 막막했어요. 입시학원을 찾았더니 이렇게 선행이 안 된 상태에서 어떻게 외고 시험을 보냐고 되묻더군요. 오히려 오기가 낫죠. 한 입시학원에서 가장 성적이 낮은 반으로 들어갔는데, 몇 달 열심히 공부하니까 운이 좋게도 대일외고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익명성’이 보장된 고등학교 생활은 즐겁기만 했다. 서로 다른 학교에서 왔기 때문에 패거리 문화도 거의 없었고, 중학교보다도 규율이 엄격하지 않았다. 남녀공학인 데다 선생님들도 윤 대표에게 주목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입을 빌면 ‘천국 같은 시간’이었다.

학교 근처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돈암동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 몇몇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돈암동 노래방에서 몇 시간 노래를 부르거나 길거리 옷들을 사 입으며 자유를 만끽했다.

“아마도 부모님은 지금까지 제가 고등학교 생활을 착실히 한 걸로 아실 거에요. 아침에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오면 정규 수업이 끝난 후 야간자율학습은 땡땡이를 치고 돈암동으로 직행했거든요. 집으로 오는 차편이 많지 않아 오후 10시에는 다시 학교로 가서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갔으니 그 시간까지 공부 열심히 한 것으로 생각하셨겠죠.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완전 범죄’를 제대로 한 것 같아요.”(웃음)

중학교에서는 반에서 1~2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녀지만, 고등학교에서는 중간 정도 순위에 머물렀다고 한다. 중학교 때 못 놀았던 것을 고등학교 때 몰아서 놀다 보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부모님도 공부 잘 하는 애들이 모인 학교라고 이해하고 넘어갔기에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었다.

그럼에도 문이과를 선택해야 하는 고1 때는 나름 고민이 적지 않았다. 외고의 특성상 학생의 80%가 문과를 선택했기에 처음에는 생각 없이 문과를 지망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막상 지원서를 제출하려고 하니 반항심이 샘 솟는 게 아닌가.

“2004년 말 당시는 교차 지원이 없어지면서 외고에서는 이공계 기피가 대세였지요. 저 역시 별다른 생각은 없었구요. 그런데 대부분이 문과를 선택해야 하는데 나까지 그래야 하냐라는 반항심이 솟구치더라구요. 사춘기 때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반항심 같은 거였죠. 그래서 제출 직전에 이과를 표시했고, 그게 제 인생에도 꽤 많은 영향을 미쳤죠.”

이과를 선택하고 2학년이 됐을 때 그 역시 대학에 들어가려면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이나 과학이 취약한 편이라 걱정이 적지 않았지만, 이왕 이과를 선택했으니 당연히 의대에 진학해야 하는 걸로 알았다.

◇아이팟을 만나 IT이 매력에 빠지다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어머니에게 MP3 플레이어를 사달라고 졸랐다. 공부하겠다는 딸의 부탁이니 마다할 리가 있었을까. 매장에 데리고 나가 그녀에게 선택권을 줬다.

여러 제품을 둘러 보던 그녀의 눈을 단번에 사로 잡는 기기가 있었다. 바로 애플의 아이팟이었다.

고교 2학년이 됐을 때 우연치 않게 아이팟을 갖게 됐다. 정보기술(IT) 기기가 이렇게 예쁠 수 있을까 감탄했고, 당시의 감동은 전기전자공학과를 선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솔직히 애플이 만든 거라는 건 몰랐습니다. 그냥 너무 예뻤고, 꼭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이팟을 갖고 학교에 갔는데 반 친구들이 너도 나도 몰려와 한번만 구경하자고 조르더군요. 친구들의 눈에도 이게 예쁜가 보구나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이렇게 정보기술(IT) 기기를 예쁘게 만들 수 있을까 감동했죠. 저걸 만든 사람은 누군지 정말 좋겠다. 나도 저런 제품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행복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아이팟의 매력에 빠지면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알게 됐고, 그에 대한 책을 찾아 읽었다. 하지만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잡스처럼 될 수 있는지는 정확히 몰랐다. 그런 상태로 시간은 흘러 고3이 됐다.

고3 첫 모의고사를 치렀다. 결과는 참담했다. 고교 1~2학년 때 맘껏 놀았던 대가를 톡톡히 치른 걸까. 과학탐구와 수학이 7~8등급이 나왔다. 윤 대표는 자신의 등급이 나온 후에야 처음으로 수능이 9등급 제도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스스로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들어가긴 영 글렀다는 생각에 실망도 컸지만 이내 잊고 끝까지 해보자 결심했다.

“제가 태생적으로 낙천적인 성격이긴 한 것 같아요. 그 정도 등급이면 슬럼프에 빠질 만도 한데 하루 이틀 지나니 기분이 나아지고, 용기도 생기더군요. 공부라는 거 어차피 달달 외우는 건데 앞으로 열심히 하면 이거보단 나아질 거라 생각했어요. 앞으로 1년이나 남았는데 제대로 해보자 결심한 거죠.”

이후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성적은 조금씩 올랐다. 여름 방학 직전 모의고사 성적을 받아보니 고려대나 이화여대 간호학과를 갈 수 있는 점수였다. 어머니에게 성적표를 보여주니 어머니는 이내 실망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당신처럼 간호학과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랬던 마음이 컸다는 게 이유였다.

“저도 욱하는 성격이 있어서 엄마한테 세속적이라고, 대학 타이틀이 뭐가 중요하냐고 막 대들었어요. 남들이 좋다는 SKY 대학에 대한 반발심도 적지 않았구요. 옆에서 아빠가 달래며 괜찮다며 성적에 맞춰 대학에 들어가면 된다고 중재하긴 했지만 그 때 엄마에게 제가 많이 대들었던 건 지금도 죄송해요.”

◇전기전자공학과 진학, 그리고 방황



그렇게 입시 준비를 하던 중 10월에 연세대 글로벌리더전형을 치르게 됐다. 외국어 실력이 바탕이 돼야 하는 전형으로, 주어진 수학 문제를 영어로 논리에 맞게 풀어야 하는 특이한 전형이었다.

수학능력시험에 닥친 터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이팟에서 느꼈던 감동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있던 그는 전기전자공학과를 선택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IT 세상인데 아이팟 같은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려면 IT 문법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제가 전공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죠.”

운 좋게도 서류 전형은 통과했고, 면접날이 됐다. 800여명이 서류를 넣었고 최종 4명을 선발하는 전형이었으니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 최종 면접에 오른 학생은 윤 대표를 포함해 총 12명, 이 중에는 민족사관학교 출신이나 과학고, 영재고 출신들도 있었다. 당찬 성격의 윤 대표도 이날만큼은 기가 팍 죽었다.

“12명 중에 8명이 도포자락(민족사관학교 재학생)인 거에요. 기가 팍 죽었죠. 운 좋게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여기까지인가 생각하고 낙심했었죠.”

욕심을 버리고 차분하게 면접에 임했던 덕분인지 그녀는 연세대 전자전기공학과 07학번으로 합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수능 열흘 전에 합격자 발표를 듣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아! 수능을 안 봐도 되겠구나’라는 것이었다. 외국 대학에 합격한 친구와 함께 수능 당일 영화 ‘타짜’를 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남들이 시험을 볼 때 저는 시험의 고통을 치르지 않은 거니 너무 기쁘고 즐거웠죠. 제가 직접 돈도 벌고 싶어서 11월부터 석 달간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그 돈으로 외할머니 용돈도 드리고, 쇼핑도 하면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자유’를 만끽했죠.”



차분하게 면접에 임했던 덕분인지 그녀는 연세대 전자전기공학과 07학번으로 합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활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공계 쪽으로 지식도 많지 않고 흥미도 거의 없었던 그녀가 전공 수업을 따라가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스스로 나한테는 안 맞는 옷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전공에 얽매어 있는 상황이기에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그녀는 곧바로 결심하게 된다. 자신이 뭘 좋아하고, 어떤 걸 하면서 살아야 할지 시간을 투자해 열심히 탐구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우선은 전공 외에 관심을 둘 만한 다른 뭔가를 찾아야 했다.

그녀의 눈에 디자인경영학회 포스터가 들어왔다. 약자를 위한 영화관 의자 디자인 개선이나 병원의 시스템 개선 등을 제안하는 등 디자인적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학회였다.

“때마침 교양 수업에서 아이데오(IDEO)에 대한 강의를 들었어요. 가장 혁신적인 기업의 대명사로 꼽히고 있는 아이데오는 세계 최고의 디자인 기업으로 나이키나 애플 같은 대기업이 의뢰를 하는 디자인 에이전시라고 하더군요. 소비자 중심의 접근 방식이 돋보였고, 단순히 디자인 브랜드 파워보다 혁신적인 발상으로 가치를 높게 평가 받고 있다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아이팟에서 제가 느꼈던 감동도 그런 류의 혁신이니까요. 더 깊이 알고 싶었죠.”

해외 문화에 깊이 동경했던 그녀는 방학 때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외국으로 나가곤 했다. 언론사에서 진행하는 영어캠프에 대학생 인솔교사로 자원하기도 했고, 기업체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해외 연수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에도 빠짐 없이 응모했다.

◇길거리 패션에서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여느 대학생처럼 바쁘게 살던 그녀에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매일 어떤 옷을 입을 지 선택해야 하고, 유행에 뒤처지지 않게 옷을 구매해야 하는데, 나한테 맞는 옷을 추천해 주는 서비스가 있으면 어떨까. 늘씬한 모델이 입는 옷이 아닌 나처럼 평범한 체형을 갖고 있는 평범한 또래 여성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 그런 옷은 어디서 사면 되는지 알려주는 서비스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방학 때마다 해외에 나가면서 나름 패션의 중심지라는 곳을 여행하는데, 그 어느 도시를 봐도 서울만큼 멋진 길거리 패션은 눈에 띄지 않았다. 서울의 감성과 패션 감각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이때부터 자신이 상상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해외 사이트를 찾아 다녔다. 당시는 스트리트 패션(길거리 패션)이 세계적으로 핫 키워드였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을 찍어 올리거나 자신의 사진을 올리는 식이었다. 어느 날 해외 사이트 한 곳이 길거리 패션 정보를 올리고 해당 쇼핑몰로 링크를 연결해 놓은 게 보였다.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사업적으로 유의미한지도 알고 싶었는데, 블로그 홈페이지 주소를 보니까 영국이더라구요. 어떻게든 이 사람을 만나 알아보고 싶었던 차에 2학년 여름 방학에 MCM에서 여대생을 대상으로 영국 큐레이터 교육 연수를 보내준다고 하더군요. 1인당 100만원 지원이었고, 나머지는 각자 부담하는 조건이었지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응모했어요. 가기 전에 영국 블로거한테 이메일을 보내 놨는데, 떠나기 전날까지 답신이 없어서 불안했었어요.”

2주간의 연수 기간이 끝날 즈음까지 연락이 없었다. 이왕 영국까지 간 김에 1주일 더 머물자는 생각에 민박집을 구했다. 짐을 푼 다음 이메일을 열어보니 답신이 와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의 핸드폰 번호까지 남기며 그 다음날 카나비 스트리트(CARNABY STREET)에 있는 카페에서 보자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

영국인 블로거와의 만남은 유쾌했다. 금융사에 몸 담고 있는 직장인인데 패션에 관심도 많고 당시 스트리트 패션이 유행이라 창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아직 사업적으로 성과를 내진 못하지만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도 덧붙였다. 그와의 대화는 윤 대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자신이 뛰어들 만한 사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듯 강렬한 인상을 가슴 속 깊이 안고 돌아왔고, 다시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갔다.

대학 졸업식 날 활짝 웃는 윤자영 대표의 모습. 대학생 창업을 시작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맞이한 졸업식인 만큼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사진제공=윤자영 대표


그로부터 2년쯤 지난 2010년 여름 어느 날의 일이었다. 친한 친구를 붙잡고 영국 블로거와의 만남부터 길거리 패션 아이템을 얘기했더니 그 친구는 “작년에도 그 얘기했잖아.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한 번 도전하는 게 어때”라고 말해줬다.

윤 대표 스스로도 지금 하지 않으면 1년 후에도, 5년 후에도 후회할 것만 같았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서비스가 있는데, 그 서비스는 아직 시장에 안 나왔고, 시장에 나오기만 하면 잘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타일쉐어 세상에 나오다



2010년은 국내에 스마트폰이 출시되면서 모바일 환경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페이스북이 국내에 선보이면서 가입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페이스북을 통한 정보 공유의 시대가 열리면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도 맞아떨어진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웹사이트나 애플리케이션이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8월이었다.

“만나는 친구마다 웹사이트 개발할 줄 아냐고, 코딩을 할 줄 아냐고 묻고 다녔어요. 마침 연세대 창업지원단이 출범하면서 대학생 창업을 지원한다는 포스터가 붙었는데, 알아보니까 사업제안서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동아리나 학회 활동을 하면서 만난 경영학과 선배들에게 부탁했지요. 기술 개발과 관련한 전문적인 내용은 과 동기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렇게 사업제안서를 채우다 보니까 사업 아이템에 대한 생각도 하나 둘씩 정리되더군요.”

당시 윤 대표는 창업 과정에서 중요한 인연을 만나게 됐다. 대학 측에서 주최한 벤처 최고경영자(CEO) 강연에 이니시스 창업자인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가 초청을 받은 것. 원래 창업지원센터에 입주한 스타트업 대표들과의 자리였지만 윤 대표는 저녁 자리까지 쫓아가 그의 말을 경청했다.

윤 대표의 반짝이는 눈빛을 궁금하게 여긴 권 대표가 먼저 말을 걸었고, 그녀가 가져간 사업계획서를 살펴봤다. 그는 윤 대표 같은 창업자에게 노하우를 전수하고 자금을 투자하기 위해 프라이머를 만들었다고 소개한 후 투자 프로그램에 지원하라고 제안했다.

2016년 스타일쉐어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있는 윤자영(오른쪽) 대표의 모습. /사진제공=윤자영 대표


“당시 엑셀러레이터라는 개념이 국내에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인 데다 저도 벤처캐피털 쪽으로는 정보가 없어서 뭔가를 가르쳐주고, 지원한다고 해서 창업학원인 줄 알았어요.(웃음) 연락을 하라고는 했지만 무조건 도움 받기도 싫고 해서 전화를 안 드렸더니 몇 달 뒤 이메일이 왔더군요. 지원서 써서 보내라고 했는데 보냈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이후 프라이머 공동 창업자인 이택경 대표와의 만남을 주선해주셨고, 당시 2,000만원에 지분 10%를 받고 투자해 주셨어요. 그 해 프라이머가 투자한 마지막 회사가 저희였던 겁니다. 당시는 회사도 설립이 안 된 상태였는데, 비즈니스 모델만 보고 투자를 결정해주신 거죠.”

2011년 초 팀 구성을 시작했고, 6월 회사를 설립했다. 패션 스타일을 공유한다는 의미를 담아 ‘스타일쉐어’라는 이름도 정했다.

처음에는 학교 선배나 학회 선후배 등 6명이 팀에 합류했다. 졸업을 하지 않은 대학생 신분이라 파트타임으로 진행됐다. 아이템만 있으면 대박이 날 줄 알았는데 일이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

그렇듯 사업 초기 단계에서 고민하고 있을 즈음 매스챌린지에 지원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매스첼린지(MassChallenge)’는 매사추세츠 주정부 지원으로 보스턴 대학이 주관하는 대회로, 오바마 전 대통령이 극찬한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이다.

스타일쉐어는 스스로 코디한 사진을 찍어 올리면 스타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댓글로 반응하고 옷 판매처 등 관련 정보를 묻는다. /출처=스타일쉐어 사이트 캡처


최종적으로 100팀을 뽑아 공유 사무실을 무상 지원하고 네트워킹을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다행히 합격했고, 6월부터 4개월간 보스턴에서 개발에 몰두할 수 있었다.

드디어 9월 스타일 공유 애플리케이션 ‘스타일쉐어’가 선보였다. 스스로 코디한 사진을 찍어 올리면 스타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댓글로 반응하고 옷 판매처 등 관련 정보를 묻는다. 인터넷 상에서 유행한 ‘ㅈㅂㅈㅇ(정보좀요)’라는 용어도 스타일쉐어가 시초다. 현재 투자사가 평가한 스타일쉐어의 기업 가치는 400억원에 달한다. 창업 5년 만에 엄청난 성장을 한 셈이다.

◇공유와 공감을 통해 1020과 소통하다



비결에 대해 윤 대표는 공유와 공감을 꼽았다.

“전세계 어디를 가든 방식과 매체가 다를 뿐 자신의 관심사를 주변과 공유하고 정보를 나누는 1020세대가 눈에 띄게 들고 있어요. 이들은 또래 문화에 민감하면서 스스로의 개성을 중시하는 세대라고 할 수 있지요. 스타일쉐어가 이들의 니즈에 맞아 떨어진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죠.”

스타일쉐어의 가입자 수는 270만명. 애플리케이션을 내려 받은 숫자만 350만건에 달한다. MAU(한 달 동안 해당 서비스를 이용한 순수 이용자 수)는 60만명으로 국내 인구 분포와 사용자 연령층을 고려했을 때 10대 4명 중 1명은 스타일쉐어를 이용한다고 한다. 국내 15~29세 여성 470만명 중 절반 이상이 한 번 이상 스타일쉐어를 들어온 적이 있다는 통계도 갖고 있다.

지난 해 4월에는 스토어도 선보였다. 정보 공유뿐만 아니라 사진 속 옷이나 액세서리를 바로 구매까지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현재 스토어의 한 달 평균 거래액은 15억원 수준이다. 올해는 양적 성장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획성 비즈니스 모델도 눈에 띈다. 스타일쉐어는 대기업과 공동 기획을 통해 리미티드 상품을 제작하거나 기획 단계부터 10대의 취향을 반영한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대표적으로 ‘필요 없는 옷을 팔려고 하는데 어느 플리마켓이 좋냐’는 질문에 직접 답변을 내놓으며 세간의 화제를 모은 ‘스타일쉐어 마켓페스트’는 단 이틀 동안 5만명이 방문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일반적인 패션 매체는 프로패셔널한 콘텐츠를 제안하고 있어요. 슈퍼 모델에다 아이템도 비싼 명품이지요. 보기는 좋지만 내가 구매하기에는 어려울 수 밖에 없어요. 저희는 일상 깊숙이 들어가 내가, 혹은 내 친구가, 내 동생이 활용할 수 있는 패션 정보에 집중했습니다. 그런 접근법이 실리를 따지는 요즘의 1020세대에게 어필한 셈이지요. 저희의 스토어도 유저가 공감할 수 있는 패션 콘텐츠를 올리고 자연스럽게 상품이 소개되는 방식입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쇼핑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모습이지요.”

지난해 스타일쉐어의 총 거래액은 50억원이다. 올해는 200억원까지 큰 폭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아직은 20대, 젊은 창업가 윤자영 대표에게 예비 창업가를 위한 조언을 요청했다.

“창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면 그 누구보다 애정을 갖고 잘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선택하세요. 그 전제 조건은 그 분야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라는 게 방법에 대한 이해이기 보다는 소비자에 대한 이해가 훨씬 중요합니다. 자신이 소비자로서, 혹은 소비자를 지켜보니 이런 페인포인트(Painpoint·고민점)가 있어야 하고, 그 페인포인트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발이나 마케팅 등 자신이 못하는 부분은 팀원을 잘 찾으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창업자 자신이 페인포인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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