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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혁명, 공포의 산물…파리 재개발





비좁고 꼬불꼬불하며 오물과 악취로 가득 찬 더러운 도시. 19세기 중반까지 파리의 모습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인구 급증에 따른 도시 환경 악화. 인구 65만명이던 1832년에는 콜레라가 발생, 시민 2만여명이 숨졌다. 불결한 환경에도 도시는 사람을 끌어당겼다. 산업혁명을 맞아 농촌은 붕괴하고 농민들은 살 길을 찾아 도시로 몰렸다. 1836년 인구 100만을 넘어선 파리는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난개발에 몸살을 앓았다. 하층민이 몰리는 뒷골목은 툭하면 전염병이 번졌다.

도심 슬럼가의 인구밀도는 ㎢당 약 10만명. 오늘날 인구 223만명(교외지역까지 합치면 1,240명)인 파리 시내의 평균 인구밀도 ㎢당 약 2만명보다 훨씬 높았다. 1841년 도시를 바깥 성벽까지 확대했어도 사정은 개선되지 않았다. 당대 작가들의 소설에는 파리의 어두운 구석이 나온다. 오노레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에서 파리를 지옥과 매춘의 도시로 그렸다.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에 파리 변두리 서민들의 비참한 삶을 담았다. 마침 도시의 통풍시스템이 건강을 결정한다는 이론이 퍼지자 프랑스는 1841년 5월3일 파리 재개발법을 만들었다. 질병에 대한 공포가 유서 깊은 도시의 재개발을 촉진한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돈이 딸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도 엇갈려 논의만 무성할 뿐 사업은 조금도 진행되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들은 재개발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지만 1848년 유럽을 휘몰아친 혁명 분위기 속에서 빈자들을 도심 슬럼가에서 쫓아낼 수 없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나폴레옹3세의 등장.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라는 후광을 업고 1848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1851년 친위 쿠데타로 황제 자리를 차지한 나폴레옹3세는 파리 개조 사업을 세느현 지사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 Eugene Haussmann)에게 맡겼다.

나폴레옹 3세에게는 다른 목적도 있었다. 그것은 질병과 마찬가지로 공포였다. 혁명에 대한 공포.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도 등장하는 1832년 봉기에서 파리 시민들은 골목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진압군에 맞섰다. 권력은 마차 두 대만 엎어놓으면 군대의 기동이 불가능한 파리시의 미로를 없애 버리고 싶었다. 넓고 곧은 방사형 순환도로와 녹지 공간은 군대의 기동로와 임시 주둔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교수(경제학)는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나폴레옹 3세는 파리에서 혁명의 온상이었던 복잡한 사육장 같은 거리는 없애고 그의 기병대가 도시혁명을 진압하기 쉽게 대로를 건설하기를 원했다.”

오스만은 다섯 가지 원칙 아래 도시를 파헤쳤다. 첫째, 교통을 위해 도시를 관통하는 50개 대로를 건설하고 둘째로 가로축에 개선문과 콩코드 광장, 루브르궁 같은 거대한 상징물을 설치했다. 셋째, 도로와 주요 관공서는 파리시가 직접 개발하되 나머지 부지는 민간에 분양해 간접 개발하는 혼합방식을 택했다. 넷째, 상·하수도와 학교, 병원 등 인프라를 확보하고 다섯째, 녹지 공간 확보에도 힘을 쏟았다. 오스만은 1870년까지 재임하며 시내 비위생 구역을 정리하고 하수도 600㎞와 방사형 도로망, 철도 환상선(環狀線)을 깔았다.

파리 시내에서는 주요 건물 500m 범위 안에 반드시 공원을 유치한다는 계획 아래 여의도 면적의 두 배가 넘는 대형 도심 숲과 28개의 중소규모 녹지를 조성했다. 덕분에 파리시에도 나폴레옹 3세가 영국 망명 시절 부러워했다는 런던의 공원과 버금가는 녹지가 생겼다.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 사업은 1870년 일단 멈췄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파리 코뮌, 대화재 등 정치 사회적 격변이 잇따르며 막 내린 것이다. 대규모 재개발은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다.



오스만이 사업을 총지휘하던 17년 동안 새로 들어선 건물이 7만5,000천동. 대부분 5층 이하로 형태와 구조가 똑같아 ‘오스만 양식’으로 불린 신축 빌딩의 1층에는 노천 카페와 음식점이 입주하고 위층에는 부자들의 살림집이 들어섰다. 파리 도심은 급속하게 부촌으로 변해갔다. 반면 건물을 짓느라 빈민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가옥 2만5,000동이 헐렸다. 멀쩡한 건물도 오스만이 지도에 그은 직선에 따라 잘려 나갔으니 불만도 컸다. ‘도시 재개발의 모범 사례’라는 평가 이면에 ‘매혹적인 옛 도시 파리에 대한 분별없는 학살’이라는 비판이 동시에 나왔다.

더 큰 문제는 자금. 오스만은 세 가지 방법으로 재개발 자금을 충당했다. 첫째는 정부의 직접 지출. ‘생산적 지출(depenses productives)’이란 이름 아래 정부 예산의 일부만 공사에 투입하고 나머지 예산은 대출금 이자를 갚는데 썼다. 이자 부담은 계속 커졌어도 한정된 예산으로 여러 공사를 동시에 펼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파리시 개발채권’ 발행. 개발 이익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해 재원을 마련했다. 세 번째 방식은 민간기업에 대한 지불 유예. ‘위임 채권’이라는 이름을 붙여 민간업체에 대한 대금 지급을 채권으로 줬다. 사실상의 어음이었다.

오스만은 이런 방식으로 약 25억 프랑을 끌어썼다. 사업이 한창이던 1858년 정부 예산이 18억5,800만 프랑보다 훨씬 많았다. 이자까지 합치면 사업비 규모는 40억 프랑대로 늘어난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 재개발 부채를 20세기 초반에서야 갚았다. 막대한 자금이 투입될 결과 파리시는 확연하게 달라졌지만 사회적 불만이 팽배하고 국가 재정은 휘청거렸다. 부유층은 만족했어도 빈민들은 부글거렸다. 부자들이 한적한 교외를 찾아 도심을 떠났던 영국과 정반대로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들은 노동자들이 추방 당한 도심을 차지, 시샘을 받았다. 20세기 중반까지 프랑스는 유독 심한 계층 간 갈등을 겪었다. 오스만이 물러날 즈음 터진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전쟁배상금으로 50억 프랑을 바쳤다. 오스만의 고향인 알자스 지방은 물론 로렌까지 독일에 떼줬다.

프랑스는 파리를 아직도 개발하고 있다. 오스만이 도심을 꾸몄다면 20세기의 도시계획은 파리 메트로를 유기체로 보고 도심과 교외의 양극화 해소와 공동 발전을 꾀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 관광객들을 끌어모으는 파리의 아름다움은 150년 역사를 두고 진행된 결과물인 셈이다. 그래도 프랑스는 운이 좋은 셈이다. 경제가 날로 성장하던 산업혁명기에 도심 대개발을 진행, 경제가 그나마 버텨줄 수 있었으니까.

도시화 비율이 81.5%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도 재개발이 필요한 도시가 많지만 경제가 받쳐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구촌도 마찬가지다. 오는 2030년이면 도시인구가 50억명에 이른다는데 궁금하다. 도시의 기능을 갖추는데 얼마나 많은 자금이 들어가고 양극화에 찌든 도시가 다시금 질병과 혁명의 공포에 짓눌릴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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