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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서독 주권 회복과 한반도

1955년 서독 주권 회복과 한반도





‘연합국의 점령통치 종식. 서독 주권 회복과 재무장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가입.’ 1955년 5월5일자로 발효된 파리조약의 골자다. 1945년 2차세계대전 승전 이후 10년간 점령군으로 서독을 분할 통치하던 미군과 영국군, 프랑스군은 떠나거나 병력 수를 줄였다. 주둔의 성격도 점령에서 동맹을 위한 전진 배치로 바뀌었다. 완전한 주권국가로 거듭난 지 나흘 후인 5월 9일 서독은 나토 가입 신청서를 냈다. 2차세계대전 항복으로부터 꼭 10년 하루 만에 독일군은 서방진영의 일원으로 국제 사회에 되돌아왔다.

서독의 주권 회복과 재무장은 20세기 후반부를 가르는 전환점이었다. 서독의 나토 가입에 자극받은 소련과 동부 유럽의 공산권 국가들은 5월17일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공식 출범시켰다. 서부 유럽과 미국의 군사동맹에 동부 유럽과 소련도 군사동맹으로 맞서는 세상, 냉전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파리조약은 체결 이전부터 논란과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서독의 재무장’이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서독 내부의 여론이 엇갈렸다. 재무장을 추진하는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정책에 반발한 내무장관이 사임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프랑스도 극구 반대했다. 워털루 전투(1815)에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을 거쳐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독일군에게 번번이 당했던 프랑스는 독일 영토를 쪼개 수십 개 군소 농업국가로 만들 심산이었다. 미국도 2차 대전 직후까지는 프랑스와 생각이 비슷했으나 소련의 팽창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서독의 잠재력을 유럽 방위에 활용하기로 작정한 미국은 첫 단계로 ‘마셜 플랜(Marshall Plan·유럽부흥계획, 1947년부터 1951년까지 130억 달러 규모의 경제 원조) ’을 발동, 유럽의 전후 복구를 도왔다. 1949년에는 나토를 창설하며 서독의 재무장을 위해 영국과 프랑스 설득에 나섰다.

프랑스의 고집이 꺾인 계기는 한국전쟁. 유럽도 소련에 침략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미국과 영국ㆍ프랑스 등 3개국은 점령국 지위를 포기하고 독일에 동맹이라는 방석을 내줬다. 파리조약이 실행되기 이전에도 비슷한 시도가 없지 않았다. 재건될 서독 군대가 유럽군의 일원으로 프랑스의 지휘를 받는다는 ‘유럽 방위 공동체(EDC·European Defense Community)’ 방안이 실현될 뻔 했으나 프랑스 의회의 비준을 받지 못해 무산된 적도 있다. 1951년부터 연방국경경비대란 이름의 군사조직 아래 약 1만여명의 경무장 전투 병력만 보유하던 서독은 파리 조약의 본격 발효되며 다시금 군사 강국으로 떠올랐다.

재건될 서독 군대의 총 규모는 육·해·공군을 합쳐 약 50만명. 히틀러 시절의 650만 대병력에 비하면 13분의 1 수준이었으나 나토군에서는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았다. 약 7억 달러 규모의 미국제 무기로 중무장한 서독 육군의 12개 사단은 유럽 방위의 중추를 맡았다. 서독 국방군은 재창건 직후부터 미국제 무기의 성능에 불만을 표하며 무기 국산화에 나서 명품 무기들을 쏟아냈다. 레오파트 전차 시리즈, 디젤 잠수함에서 바로 두각을 나타냈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와 냉전 격화로 앞당겨진 ‘패전국가 독일’의 주권 회복에는 경제의 힘과 상호 신뢰가 깔려 있었다. 원한이 깊었던 프랑스와 독일은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출범시킬 만큼 서로 필요한 상대로 인정하며 신뢰를 쌓았다. 마샬 플랜 이후 서독의 경제력이 급신장해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받았다는 점도 주권 회복을 앞당겼다. ‘딱정벌레 차’로 상징되는 서독의 전후 부흥, ‘라인 강의 기적’이 없었다면 서독은 좀 더 오랜 시일 동안 피점령국가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냉전 격화와 서독의 주권 회복, 나토 출범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세계 전략은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냉전 구도가 정착되며 미국은 중동지역에 바그다드조약기구를 설치(1955.11)하고 1954년에 창설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의 군사적 기능 강화에 나섰다. 소련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구촌 곳곳에 집단안보체제를 심은 것이다. 한국도 이런 분위기를 활용하려 애썼다. 권오중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전 서울대 교육종합연구원 선임연구원)의 학술 논문(‘서독의 NATO 가입과 SEATO의 창설, 그리고 한국 내 핵무기 배치를 통한 미국의 봉쇄적 안보정책 1949-1958’)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이 집단안보체제를 원했다.

1953년 8월 미국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맺었지만 1954년 들어 한국은 또 다른 안전장치를 찾았다. 동아시아조약기구(EATO) 출범을 추진한 것. 미국은 한국이 요구하는 반공 동맹기구 창설에 수긍하면서도 비용 부담을 우려해 난색을 표했다. 한국은 1957년 들어 EATO 보다 축소된 형태의 북동아시아조약기구(NEATO) 창설 방안을 다시금 꺼냈다. 미국의 반응은 같았다. 무엇보다 일본을 제외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방침을 수용할 수 없었다. 군사동맹기구 창설을 거부 당한 한국은 전술 핵무기의 한반도 배치를 요구하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1957년 말 또는 1958년 초 미국의 전술 핵무기가 한국에 들어왔다. 위 논문에 따르면 북한이 자주국방을 내세우며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시작한 시기가 1959년. 북핵 문제의 단초는 1957/58년도에 배치되었던 미군의 전술 핵무기였던 셈이다.

서독의 주권 회복으로부터 62년. 세상은 많이 변했다. 어렵게 주권을 회복한 서독은 건실한 성장을 지속하며 1991년에는 동독과 통일까지 이뤄냈다. 냉전이 한창일 때 서독 국방군은 병력 상한선인 50만명을 유지했지만 동독과 통일(1991) 이후 18만명 선으로 줄어든 상태다. 17만 5,800여명이던 동독의 군대는 완전히 없어졌다. 하나도 바뀌지 않은 곳도 있다. 바로 우리가 숨 쉬는 공간,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 상태다.

증오와 대결의 질은 오히려 과거보다도 나빠졌다. 군대의 규모와 무기 구입 비용은 날로 증가한다. 북핵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미군의 전술핵을 다시 들여 오자는 소리도 들린다. 국민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채 일본과 사실상의 군사동맹도 하나씩 진행 중이다. 독일과 비교한 한국의 62년 세월.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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