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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든 백의의 천사





유럽을 여행 중인 영국인 부부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둘째 딸을 낳았다. 부부는 1820년 5월 12일 태어난 아이의 이름에 도시명을 붙였다. 플로렌스(Florence·피렌체의 영어식 발음) 나이팅게일. 연상연하 커플이었던 나이팅게일 부부는 첫딸의 이름에도 출생 도시를 넣었다. 파세노프(나폴리의 그리스어 이름)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 부부는 3년에 걸친 ‘그랜드 투어(Grand Tour·영국 귀족이나 부유층의 유럽 장기 여행)’에서 연년생 딸 둘을 얻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큰 부자였던 나이팅게일 부부는 딸들을 공부시키고 싶었으나 당시 대학들은 여성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직접 딸들을 가르치고 여행도 자주 다녔다. 둘째인 플로렌스는 기록과 정리를 좋아했다. 매일 여행한 거리와 출발·도착 시간을 기록하고 여행지의 법률과 토지 관리체계, 사회 상황을 꼼꼼히 적었다. 스무 살을 넘길 무렵 플로렌스는 수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어머니는 결혼 적령기가 됐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둘째가 늘 걱정이었다.

사교댄스 대신 수학과 씨름하던 플로렌스는 23세 때부터 어머니의 속을 더 태웠다. 귀족 청년의 끈질긴 청혼을 마다한 채 간호사의 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간호 인력을 하녀나 길거리의 매춘부로 여기던 시절이다. 정작 플로렌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플로렌스가 집안의 반대를 뚫는 데 걸린 시간은 10년. 33세가 돼서야 독일의 병원에서 4개월간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런던 개신교 병원의 무급 감독관으로 돌아왔을 때 설마했던 어머니는 격노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연간 1억원 가까운 돈을 몰래 대주며 딸을 돌봤다.

병원도 그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모든 걸 뒤바꿨기 때문이다. 종파와 관계없이 환자를 받아들이고 간호사 훈련에서 병원 관리, 보급, 급식에까지 업무 전반을 개선했다. 그의 무기는 체계적인 기록과 통계. 정확한 통계를 제시하는 그의 제안은 그대로 수용될 수밖에 없었다. 크림 전쟁의 야전 병원에서도 그랬다. 성공회 간호사 38명을 이끌고 전쟁터에 도착한 그는 환경부터 고쳐나갔다. 개선을 요구하는 그에게 군의 고급 장교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보급이 안 될 때는 망치로 창고 열쇠를 부순 적도 있었으니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전사하는 병사보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는 병사가 두 배 이상이라는 점을 개선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불결하고 벌레가 들끓는 야전병원을 깨끗한 건물로 이전하고 환자 위생 개선에 나선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야전병원에 수용된 부상병 사망률이 5개월 만에 42%에서 3%로 떨어졌다. 현지의 군 당국도 서서히 변했다. 여느 간호사와 달리 상류계급 출신인데다 육군 고위층과도 인연이 닿는 플로렌스였기에 요구 사항을 억지로·라도 들어줬다.

크림에서의 활동은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영국 ‘타임스’지는 ‘모든 군의관이 퇴근한 밤에도 그는 천사처럼 작은 등불을 들고 부상병들을 돌본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를 접한 미국 신문기자 겸 시인인 헨리 워스워드 롱펠로는 1857년 발표한 ‘산타 필로메나(Santa Filomena)’라는 시에서 ‘등불을 든 여인을 나는 보았네(A lady with a lamp I see)’라고 읊었다. 플로렌스의 이미지가 ‘등불 든 여인’으로 굳어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정말 그랬을까. 플로렌스가 ‘백의의 천사’로 부각된 것은 시대적 상황의 소산이라는 주장이 있다. 바깥으로는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 경쟁이 심해지고 안에서는 산업혁명 진행으로 빈부 격차가 벌어지는 마당에 ‘인간 정신의 승리’를 상징할 수 있는 영웅이 필요했고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적격이었다는 주장이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은 과연 언론의 상징 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일 뿐일까. 그렇게 보기 어렵다. 간호전문 교육기관을 만들고 인간 중심의 근대 간호학이 성립하는 데 플로렌스는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다만 ‘등불을 든 백의의 천사’라는 프레임에 갇혀 버린 플로렌스의 이미지는 실제와 다르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며 늦은 밤까지 부상병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도 필요할 땐 망치를 들고 창고 열쇠를 부순 개혁가라는 사실이 감춰져 있다. ‘망치를 든 나이팅게일’은 내려놓고 ‘등불을 든 나이팅게일’을 강조하는 데에는 여성 전문 인력에게 순종을 강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보다 확실한 사실도 있다. 90세라는 천수를 누린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로 현장에서 일한 시간은 4년 남짓하다는 점이다. 크림전쟁에서 돌아온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행정가, 개혁가로서 여성차별을 없애며 사회를 고치는 데 전력하며 여생을 보냈다. 영국 의회의 각종 개혁 입법에도 참여해 성과를 거뒀다. 그 무기는 유명세나 이미지도 아니라 설득하는 힘이었다. 나이팅게일은 현장의 데이터를 치밀하게 수집해 통계로 재구성해, 시정을 요구하는 개혁가였다.



통계 전문가로도 손꼽힌다.* 복잡한 통계를 도표로 단순화한 나이팅게일의 극좌표 다이어그램은 통계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도표로 평가받는다. 군대뿐 아니라 병원 통계 표준화에도 앞장섰다. 왕립 통계학회 최초의 여성 정회원으로 선출된 후 30년 동안 케임브리지 대학에 통계학과를 신설하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 생애의 대부분을 측정과 통계를 통한 인간생활의 개선에 바쳤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간호의 영역’에만 붙잡아 두기에는 다양한 면모를 지닌 사람이다. 딸에게 이것만큼은 전해주고 싶다. 나이팅게일처럼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망치를 들어 창고를 부수라고.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동명이인인 통계학 교수도 있다. 영국에서 1909년 태어나 1995년 사망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데이비드(Florence Nightingale David). 논문 하나를 쓰기 위해 계산기를 200만번 켰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통계학자다. 2차 대전에서는 독일군의 공습과 피해 정도를 예측하는 통계적 모델을 만들어 수많은 생명을 구해냈다. 여성에게는 학과장 자리를 줄 수 없다는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떠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대학 등에서 통계학과를 세우고 학과장을 지냈다.

통계학자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데이비드는 89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크림전쟁부터 과로로 병치레가 잦았던 플로렌스는 노년을 데이비드 부부 집에 머물며 요양했다. 데이비드 부부는 늦둥이 딸에게 나이팅게일의 이름을 붙여줬고, 세계적인 여류 통계학자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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