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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3세의 가르침…‘임금 제대로 주시오’





‘노동자는 인정머리 없는 사용자와 탐욕스럽고 무절제한 경쟁 속에서 더욱 고립된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 모리배들은 고리대금업의 형태를 달리하여 여전히 되풀이함으로써 사회악은 점점 더 퍼져가고 있다. 생산수단의 거의 모두가 몇몇 사람에게 집중되어 이들 소수 부유층은 근로계약이란 허울을 쓰고 수많은 노동자에게 노예와 비슷한 굴종을 강요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성명서가 아니다. 마치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1848)과도 비슷한 이 문구는 교황 레오 13세가 1891년 5월 15일 발표한 회칙(回勅·Encyclica) 서론 부분의 일부다.

회칙이란 교황이 전세계 가톨릭교회에 내리는 사목 문서. 교회의 수장으로서 교리나 도덕, 규율을 주로 가르쳤다. 교황이 회칙에서 신앙이나 도덕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최초의 사회회칙이 나온 배경은 환경 급변. 레오 13세가 내린 회칙의 제목도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였다. 새로운 사태란 크게 두 가지. 첫째, 노동자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빈부 격차가 커졌다. 자유방임주의 아래 자본가는 재산을 증식했으나 농민은 농토에서 쫓겨나고 도시에서는 4~5세 어린아이들도 노동에 나섰다. 둘째, 새로운 사상이 퍼졌다. 공산주의 이론에 일부 가톨릭 신도들도 동조하는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레오 13세는 회칙 ‘새로운 사태’의 첫 부분을 이런 내용으로 채웠다. 모두 84개조로 이뤄진 회칙 서론( 6개조)의 이름이 바로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이다. 서론에 이은 회칙 제 1부의 이름은 사회주의 해결책. 레오 13세는 공산주의로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사회를 혼란과 폭력으로 몰아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제 2부에 답이 나온다. 레오 13세는 2부에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회칙의 대부분(58개조)을 차지하는 2부에서 교황은 진정한 해결책으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제시했다. 동시에 사유재산권 역시 천부의 권리라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과연 어느 정도가 노동의 정당한 대가일까. 레오 13세는 ‘노동자들이 검소하면서도 예의 바른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봤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고, 약간의 저축을 할 수 있을 정도’가 적정임금이다. 레오 13세의 가르침은 모든 사회 구성원을 대상으로 삼는다. 레오 13세에 따르면 중세의 길드와 같은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자들의 단합도 필요하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 정의를 강화할 의무가 있다. 교회는 올바른 사회 원칙을 가르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레오 13세의 사회회칙 ‘새로운 사태’는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강조하는 내용이 많아 ‘노동헌장’이라고도 불린다. 오늘날까지 그 가치를 인정받는 노동헌장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노력이 있었다. 우선 레오 13세부터 개혁 성향이 강했다. 젊은 사제 시절부터 부패와의 싸움, 약한 자들에 대한 지원으로 이름 높았다. 교황 좌에 올랐을 때(1878년·66세)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개혁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교황의 나이가 많아 얼마 못 갈 것이라고 안도했으나 93세로 선종할 때까지 25년간 재위하며 개혁을 이끌었다. 266명의 역대 교황 가운데 재위 기간이 네 번째로 길었다.



레오 13세 이전부터 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갔던 성직자도 적지 않았다. 노동조합의 파업을 지지하면서도 사용자 측에게도 존경받았던 영국의 헨리 매닝 추기경, 칼 마르크스와 친교를 나누고 노동자 권리를 강조한 독일 마인츠의 케틀러 주교, ‘하나님의 뜻은 사회 정의’라고 주장했던 미국의 제임스 기번스 추기경 등이 레오 13세를 전후해 활발한 사회선교 활동을 펼쳤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 각 교구의 각종 연구회도 레오 13세에게 끊임없이 교회 개혁과 사회선교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수많은 사제들의 연구와 노력, 레오 13세의 개혁 성향, 신이 인간의 믿음을 보다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부여한 ‘자유의지’를 강조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시하는 학문적 전통이 맞물린 ‘노동헌장’은 환영받았을까.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오히려 외면받았다. 좌우 가리지 않고 이를 공격해댔다. 좌파는 노동헌장에 명시된 ‘사회주의 배격’을 문제 삼아 ‘유산계급을 보호하려는 고도의 술책’이라고 비판하고 자본가들 역시 ‘붉은 교황과 일부 사제들이 만든 붉은 문서’라며 고개를 돌렸다.

세월이 흐르며 노동헌장은 점차 빛을 뿜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제정한 헌법과 노동관계법에 노동헌장의 정신이 그대로 스며들었다. 미국이 대공황 직후 펼친 사회보장제도와 정부 개입에 따른 경제 운용에도 노동헌장이 있다. 결정적으로 노동헌장 발표 40주년인 1931년 비오 11세가 발표한 회칙인 ‘40주년’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대목은 대공황과 맞물려 각국의 경제정책을 변화시켰다. 수정자본주의 확산에는 가톨릭의 영향이 케인스만큼이나 깊게 작용한 셈이다. 가톨릭의 사회 회칙은 시간이 흐를수록 영역을 환경보전과 양극화 극복 등으로 넓혀 나가고 있다.

종파를 떠나 노동헌장은 오늘날 인류가 공유하는 정신적·사회적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임금 인상을 통한 경기 활성화를 꾀해 성과를 거뒀다. 한국 사회에도 등불이 될 수 있다. 여야를 떠나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추구하는 반공과 사유재산권 보장, 노동자 권리 신장, 국가가 주도하는 공공선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 정책도 상당 부분 노동헌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 비정규직 차별 해소, 최저 임금 인상 등도 126년 전 노동헌장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일관성 있게 추진됐으면 좋겠다. 19세기의 마지막 교황이며 20세기 최초의 교황인 레오 13세가 25년간 개혁을 추진했던 것처럼.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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