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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보니와 클라이드





1934년 5월 23일 오전 9시 40분, 미국 루이지애나주 비엔빌 카운티 패리시 인근 지방 도로. 짙은 아이보리색 포드 승용차가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달렸다. 순간 총탄이 빗발쳤다. 잠복 중이던 경찰 6명은 브라우닝 자동소총(M 1918 BAR)과 샷건, 권총 탄알을 퍼부었다. 차에 타고 있던 남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다.* 벌집이 된 차는 경관들 앞을 지나쳐 반쯤 뒤집힌 채 고랑에 처박혔다. 차가 멈춘 다음에도 경찰들은 총을 계속 쐈다. 대공황이 한창일 무렵,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보니와 클라이드’ 사건도 비로소 끝났다.

얼마나 많은 총탄을 맞았는지 검시관들이 셈하기조차 힘들었다, 운전석에서 한 손에 총을 든 채 죽은 클라이드 배로(Clyde Chestnut Barrow)의 시신에서는 총탄 17발이 나왔다. 토니 기관총을 얹혀놓은 양 무릎에 머리를 수그리고 죽은 보니 파커(Bonnie Elizabeth Parker)는 26발을 맞았다. 총탄 구멍이 너무 많아 장의사도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 데 애먹었다. 사살될 당시 클라이드 배로는 만 25세 2개월, 보니는 23세 7개월이었다. 둘의 시신은 댈러스에 따로 묻혔다.



경찰은 왜 20대 젊은 남녀에게 이렇다 할 경고도 없이 무차별 총격을 가했을까. 흉악범이었기 때문이다. 약 2년 동안 미국 중부 일대에서 은행과 주유소와 간이식당을 휘저으며 돈과 차를 빼앗고 경찰을 비롯해 12명을 죽였다. 경찰은 물론 미 연방수사국(FBI)도 포위망을 좁혔으나 검거 직전마다 놓쳐 무능하다는 여론에 시달렸다. 경찰은 물론 각 지역의 민병대까지 동원됐어도 이들은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동조자들이 늘 있었던 탓이다. 최소한 23명이 범인 은닉 및 방조죄로 조사받았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어도 동정적인 사람이 늘 있었다는 얘기다.

젊은이들이 딱해서 도와줬을까. 그렇지 않다. 보니와 클라이드가 처음 만난 것은 1930년. 감옥에 수감된 남편을 둔 19세 카페 종업원 보니는 친구의 집에서 클라이드를 만났다. 고교 재학 시절, 우등생이며 글쓰기와 연설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보니와 달리 클라이드는 비행 소년 출신. 렌터카를 제때 돌려주지 않고, 칠면조를 훔쳐 17살부터 소년원을 들락거렸다. 가게 종업원으로 일할 때는 금고와 물건을 훔쳐 쇠고랑을 찼다. 보니는 16살 때 학교를 자퇴하고 동급생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교도소에 가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가운데 만난 클라이드에게 빠져들었다.

클라이드마저 3개월 만에 감옥에 갔어도 둘은 연락을 이어갔다. 클라이드가 가석방된 1932년 2월 이후 둘은 가게나 주유소 등에서 소소한 강도 짓을 벌였다. 목표는 교도소를 습격할 만한 무기와 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고 한다. 클라이드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한 이스트햄 교도소에 이를 갈았다. 친구와 형제들을 불러 모은 클라이드 갱단은 곧 유명세를 탔다. 경찰까지 살해하는 범죄 행각에도 초기의 클라이드 갱단은 오히려 시민들의 동정을 샀다.



대공황 아래에서 좌절하며 은행의 빚 독촉에 시달리던 서민들의 눈에 은행을 털고 경찰을 죽이는 이들이 ‘잘못된 세상의 권위와 질서’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차 주인을 협박해 차를 빼앗고는 먼 곳에 내려주거나 간혹 차비까지 주는 경우도 있었다. 경찰이 발견한 보니의 습작 시들도 언론에 알려지며 동정 여론을 자아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의 동정은 점차 적대감으로 변해갔다. 무고한 서민들까지 살해당하는 경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경찰의 검거망이 좁혀지고 갱단의 단원들이 죽거나 떨어져 나갔다. 결국 이들은 끈질긴 추적 끝에 도로 위에서 경찰의 집중 사격을 받고 생을 마쳤다.

대공황기, 불황의 늪에서 희망을 잃은 채 끝없이 방황하던 청춘들은 망각 속에 머물지 않았다. 1937년 개봉작 ‘암흑가의 탄흔’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건 크레이지(1949년)’, ‘보니 파커 스토리(1958)’ 등이 잇따라 나왔다. 1967년에는 대박이 터졌다. 아서 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1967년 8월 개봉한 ‘보니와 클라이드(Bonnnie and Clyde)’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 당초 흥행이 안될 것으로 보고 홍보에 나서지 않았던 워너 브라더스사는 250만 달러를 투자해 7,0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얻었다. 제작비 일부를 대고 클라이드 역을 맡은 워런 비티도 돈방석에 앉았다. 보니로 분장한 페이 더너웨이는 스타덤에 올랐다.

대공황기 좌절한 청년들의 비뚤어진 무한질주가 관객들을 끌어모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월남전의 수령으로 빠져들며 한없이 전쟁이 비용이 들어가는 가운데 반전(反戰) 운동과 흑인 민권 운동, 반문화 분위기와 맞물린 히피 문화의 대두…. 공권력의 권위와 기존 질서를 조롱하고 싶었던 1960년대 말의 분위기가 맞아떨어졌다. 영화 ‘보니와 클라이드’는 범죄를 미화했다는 논란 속에서도 세계적인 흥행을 이어나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영화를 먼저 수입한 일본(‘俺たちに明日はない’)을 따라 더욱 그럴싸한 제목이 붙였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보니와 클라이드 사건 발생 83년,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방영 50년을 지나는 오늘날 이 땅의 젊은이들을 생각한다. 입시와 청년 실업에 짓눌린 청소년들의 미래를 위해 기성세대는 무엇을 해야 하나. 세계적으로 ‘보니와 클라이드’를 소재로 한 작품은 신선도가 떨어졌는지 흥행이 어렵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뮤지컬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흥행 보증작으로 자리 잡았다. 아이돌이 출연하는데다 한국 청소년들의 상황이 특히 어렵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세상에는 잿빛 청춘의 암울한 미래만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이 부조리와 혼란으로 가득한 것 같았던 1960년대 후반에도 어떤 젊은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이 애플을 구상하고, 한국인들이 죽으라고 일한 것도 이 시기다. /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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