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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중동 석유 시대 개막





1908년 5월 26일 새벽 4시, 페르시아 남부 사막. 검은 액체가 지표를 뚫고 솟구쳤다. 굉음에 놀라 잠에서 깬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15m 높이까지 치솟은 검은 액체 기둥. 기름이었다. 중동 지역에서 상업적 가치를 지닌 유전이 처음 발견된 순간이다. 원유와 함께 분출된 가스로 질식사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실무자들은 영국에 짧은 암호 전문을 날렸다. ‘시편 104편 15절 3행을 보시오.’ 자금을 댔던 윌리엄 녹스 다아시(당시 59세)가 찾은 성경에는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을…주셨도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시추팀이 ‘마지드 이 술레이만’ 유전을 발견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시간도 많이 걸렸다. 유전 개발이 시작된 시기는 1900년 말. 페르시아 국왕 무자파 알딘의 낭비벽으로 파산 위기를 맞아 각료들은 궁여지책으로 자원 채굴권을 팔았다. 국왕의 대신들은 원유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다. 자연 분출된 원유로 선박의 방수제나 벽돌 접착제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로이터 통신의 설립자인 폴 줄리어스 로이터가 1872년과 1889년 채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로이터는 채굴권을 얻었으나 러시아의 강력한 반대로 시추도 못하고 계획을 접었다. 로이터의 실패에도 관심은 더 높아졌다. 석유의 사용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미국 등에서 대형 유전이 잇따라 발견돼 중동에도 유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진 것. 1890년대에는 프랑스의 지질학자가 페르시아 전역에 막대한 원유가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정작 투자 권유를 받은 영국인들은 꺼렸다. 정치적 위험이 높다고 여겼던 탓이다. 페르시아와 국경을 맞댄 러시아는 페르시아만에 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상권도 러시아 경제권에 예속된 상태였다.

불리한 여건에서도 윌리엄 녹스 다아시는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다아시의 경험. 호주 등지의 금광에 대한 모험적 투자로 거대한 부를 쌓은 다아시는 새로운 대박을 꿈꾸는 인물이었다. 두 번째로 다아시의 애국심이 발동했다. 러시아에 맞서 영국의 이권을 챙기겠다고 작정한 다아시는 1901년 5월 계약을 맺었다. 조건은 현금 2만 파운드와 주식 2만 파운드, 원유 채굴시 ‘연간 순이익의 16% 제공’. 5,000파운드의 뇌물도 들어갔다. 결국 다아시는 페르시아 영토의 4분 3을 차지하는 지역에 60년간 채굴권을 따냈다.

채굴이 시작된 시기는 1902년 말. 작업 환경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래에 세워진 시추 시설이 걸핏하면 무너지고 인부들은 50℃에 이르는 사막의 고열 속에 열사병에 걸렸다. 1903년 처음으로 원유가 나왔지만 경제성이 없었다. 다아시는 당초 1만 파운드 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16만 파운드가 들어갔다. 앞으로도 12만 파운드가 필요했다. 다아시는 금광을 담보로 은행 돈 17만7,000 파운드를 끌어 썼다. 1904년 초에도 유징이 나왔으나 분출이 약했다.

자금 동원 능력이 한계에 이를 즈음 새로운 투자자가 나타났다. 영국 중소상인들이 공동 설립한 버마 오일이 해군의 종용으로 1905년부터 돈을 대기 시작했다. 영국은 러시아 세력으로부터 페르시아 이권을 지키고 해군 함정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는 과정이어서 잠재적 유전지대인 페르시아를 포기할 수 없었다. 든든한 자본에도 시추는 진전이 없었다. 대신 부대 비용은 점점 늘어났다. 시추 지역마다 부족 연합은 대가를 요구했다. 견디다 못한 버마 오일은 사업 포기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영국 정부도 러·일 전쟁 패배(1905)로 힘이 빠진 러시아의 위협이 줄어들었다고 판단, 철수 여부를 민간 판단에 맡겼다.



술레이만 유전의 발견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졌다. 현장소장에게 500m 깊이까지 채굴한 뒤 성과가 없으면 굴착을 중단하고 시설을 폐쇄해 장비를 챙기라는 서신이 발송된 직후, 거대 유전이 터졌다. 석유개발 협정 체결 만 7년 만의 성공.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철수하라’는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두 번째 시추공에서도 원유가 솟구쳤다. 영국 정부는 즉각 노새 6,000마리를 동원해 사막을 가로지는 222㎞의 파이프라인을 깔았다. 아바단의 현대식 항구와 정유공장도 이때 들어섰다.

영국의 시추 성공은 중동 지역에 석유 자본을 불러들였다. 이권 다툼도 심해지고 긴장도 높아졌다. 1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인 바그다드 철도 건설 계획을 놓고 영국과 독일이 대립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독일은 오스만튀르크와 협조해 바그다드까지 철도를 깔아 중동 석유를 직접 개발할 심산이었다. 여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세르비아의 총성 한발로 세계는 전쟁의 참화로 빠져들었다. 독일이 기대했던 대로 바그다드(이라크)에서도 유전이 터졌다. 이때가 1927년. 복잡해진 국제적 이해 구도에 따라 이라크 유전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나눠 가졌다.

중동에는 더욱 자본이 몰려들고 바레인(1931)과 쿠웨이트(1938)에서도 속속 대형 유전이 발견됐다. 쿠웨이트 유전 발견 8일 뒤에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인 초대형 유전이 검은 황금을 내뿜었다. 세계가 중동산 원유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새로운 유전이 발견됐지만 중동은 여전히 지구촌의 기름 밭이다. 세계 원유 매장량의 약 3분 2, 생산의 30%를 차지한다. 중동 지역의 ‘황금의 샘’에서는 평화와 번영이 솟았을까. 글쎄다. 오히려 굴레로 작용해왔다.

이란으로 국호를 변경(1935)한 페르시아는 영국과 미국이 배후인 쿠데타(1953)와 팔레비 독재 왕정, 호메이니 회교혁명(1979), 이란 이라크 전쟁(1980~1988)을 겪었다. 미국의 경제 봉쇄로 고난의 길도 걸었다. 막대한 자원에도 이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여전히 2만 달러를 밑돈다. 미국과 두 차례 전쟁을 치른 이라크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쿠웨이트는 1차 걸프전 직전 이라크 침공으로 전화를 입었다. 중동 지역 전역은 시리아 내전을 비롯해 총성이 그치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최근 미국에 1,100억 달러에 이르는 무기 구매 리스트를 보냈다. 중동 석유 시대 개막 109주년. 검은 황금은 과연 축복이었을까. 강대국의 이해득실과 돈 욕심의 그늘에서 오늘도 갈등과 증오의 열매가 익어간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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