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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실업·인구 감소…G.I.Bill을 보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반, 미국이 고민에 빠졌다. 승리가 확실해질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경제학자들은 ‘전시 경제 호황이 사라지면 또다시 공황을 맞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쟁 통에 41만 9,400여 명이 전사했어도 미국은 ‘나 홀로 호황’을 톡톡히 누리고 있던 터. 연합국의 병기 공급 기지 역할을 맡아 생산을 극대화한 덕에 경제 규모가 두 배 이상 커졌다. 반면 다른 연합국들은 경제적·사회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유럽 전선 승리의 주역인 소련은 발언권이 세졌지만 국토가 황폐해지고 최소한 2,600만 명(민간인 포함)을 잃었다. 경제력의 4분의 1을 상실한 영국과 프랑스는 광대한 식민지까지 상실할 판이었다.

영토와 산업시설을 온전히 보존한 채 승리를 앞둔 미국의 최대 고민은 실업. 전쟁 발발 직전인 1939년 17.2%에 달했던 실업률은 1944년 1.2%까지 떨어졌으나 종전으로 무기 생산이 축소되면 일자리도 줄어들게 뻔했다.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은 귀국과 동시에 취업난을 겪을 것이라는 보고서도 나왔다. 걱정할 만 했다. 미군 병력이 무려 1,645만 명에 이르렀으니까. 전사자와 점령지에 당분간 주둔할 병력을 빼도 약 1,400만 명이 귀국을 앞둔 상황. 미국은 골머리를 앓았다. 대공황과 실업난이 할퀸 상처의 기억이 컸다,

정작, 우려했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미군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왔어도 미국 경제는 위축되지 않았다. 대규모 실업도 발생하지 않았다. 경제는 위축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세를 이어나갔다. 어떤 마법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그렇다. ‘제대군인원호법(G.I. Bill)’이라는 대책이 제대로 통했다. 1944년 6월 22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된 이 법의 골자는 제대 군인에 대한 광범위한 지원. 전역하는 군인이 대학에 진학할 경우, 재학 중에는 교육비와 주거 비용을 지원하고 졸업한 뒤에도 주택 마련 자금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제대군인원호법은 두 가지 효과를 낳았다.

첫째, 희망대로 제대 군인들의 노동 시장 복귀 시간을 늦추는 효과가 발생했다. 군복을 벗자마자 바로 취직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는 군인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780만 명이 학비 걱정 없이 단과 대학에서 로스쿨(법률 전문대학원)까지 다녔다. 주택 구입 자금까지 지원받은 전역 병사까지 합치면 제대군인원호법의 혜택을 받은 2차대전 참전용사는 1,040만 명에 이른다. 두 번째, 미국 사회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었다. 정부가 대주는 학비와 주택으로 공부하고 집까지 마련한 젊은이들은 스스럼없이 새 가정을 꾸몄다. 전후 출산 붐으로 태어난 베이버 부머 세대는 미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었다.

경제 사가 존 스틸 고든은 역저 ‘부의 제국-미국은 어떻게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나(원제:An Empire of Wealth)’에서 ‘제대군인원호법이 신흥 탈산업 경제를 주도하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es)’를 낳았다고 봤다. 현대 경영학의 구루(스승)로 추앙받는 고 피터 드러커의 견해도 이와 비슷하다. 드러커는 저서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수월하게 지식 기반 사회로 진입하는 데는 제대군인원호법의 역할이 컸다.

제대군인원호법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TV 시리즈 ‘밴드 오브 브러더스’의 뒷얘기가 말해준다. 군대에 남지 않은 부대원들은 대부분 이 법의 지원 대학에 진학하고 집을 샀다. 대학의 수준이 떨어졌다는 평가 속에서도 법의 혜택을 받은 제대군인들은 탄탄한 중산층으로 자리 잡으며 1950~1960년대 번영을 이끌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외할아버지도 이 법 덕분에 하층 백인에서 중산층으로 올라섰다. 소외계층인 흑인들이 대거 대학에 진학해 백인 사회와의 격차를 좁힌 것도 이 법의 영향이다.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 역시 이 법 덕분에 대학과 대학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미국의 주거 문화도 제대군인원호법으로 인해 크게 바뀌었다. 참전용사들이 대학을 나와 결혼할 무렵에는 윌리엄 레빗 같은 건축업자들이 주도한 교외 중저가 주택 붐이 일었다. 도심 외곽에 대지 150평, 건평 22평 주택 가격이 7,990달러로 당시 4인 가구 연평균 소득(6808달러)을 약간 웃도는 정도였다. 제대군인이라면 이 돈을 정부에서 지원받을 수 있었다. 도시에서 먹고 자고 일하던 부모 세대와 달리 전후 세대는 마당과 작은 채소밭이 딸린 교외 주택에서 생활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마침 미국 정부의 대규모 고속도로 건설 계획과 맞물리며 자동차 회사들도 내수 판매의 폭발적 증가라는 반사이익을 누렸다.

제대군인원호법은 이후에도 계속 개정돼 한국전과 월남전, 이라크 전쟁에서 제대군인들도 군문을 떠나면서 새로운 삶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미국인들은 제대군인원호법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미국의 경제 격주간지인 포천이 설문조사를 거쳐 발행한 ‘미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100가지’에 제대군인원호법은 6위에 올랐다. 한국인 입장에서 ‘제대군인원호법‘이 참으로 부럽다. 우리 젊은이들이 학비를 지원받나, 주택 구입 자금을 구할 수 있나?

제대군인원호법 제정 이전부터 미국은 병사들을 위해 전선에 책 1억 2,000만 권을 보냈다. 싸움터에서도 시간을 내 책을 읽은 병사들은 대학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학비와 주택 구입비에 독서를 통한 지식까지 전달하려는 국가의 노력이 참으로 부럽다. 한국에도 제대군인원호법 같은 제도가 있기는 있다. 1997년 제정된 ‘제대군인지원에관한법률’이 대표적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상태인 관련 법들을 체계화한 이 법은 미국에 비해서는 빈약하지만 제대군인의 사회진출과 관련한 최소한의 지원책이 담겨 있다. 문제는 장교와 부사관 등에만 혜택이 집중된다는 점. 이영환 교수(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학과)는 연구논문 ‘의무 복무 사병들의 삶의 질과 복지 문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제대군인에 대한 지원은 일반 사병들이 사실상 제외됐다는 근본적 문제를 갖고 있다.

미국의 제대군인원호법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까. 그렇지 않다. 불황이 닥칠 때마다 미국에서는 제대군인들이 무리를 이뤄, 연금 조기 지급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콕시스 아미(1894), 보너스 아미(1932)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법 제정 당시 제대군인원호법 등의 제도적 장치가 없으면 ‘보너스 아미’ 등의 사태가 다시 발생할 수 있다며 찬성 여론을 만들어나갔다. 미국의 제대군인원호법이 탄생하는 데는 정치권의 협조와 도움이 컸다. 특히 상원은 여야 가리지 않고 만장일치로 법률안을 통과시켜 대통령의 정책을 도왔다. 한국에서 이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늘려주고 경제를 살리기 위한 추경 예산조차 야당의 반대에 봉착해 한 발짝도 못 나가는 상황이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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