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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삼의 힘은 어디로?





도쿄의 일본은행 화폐 박물관에 소장된 특이한 화폐 하나. 발행 목적이 독특한 은화(銀貨)가 있다. 일본에서는 통용되지 못하고 오로지 조선과 인삼 무역에만 사용하는 돈. ‘인삼대왕고은(人蔘代王古銀)’이라고 불린 이 돈은 17, 18세기 동아시아 무역에서 조선의 위상과 한계를 말해주는 사료다. 조선에서 이 돈은 다른 일본 돈처럼 ‘견설은(犬舌銀)’이라고 불렸다. 길이 10㎝에 폭은 3㎝로 마치 개의 혀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다만 일반 백성들은 이 돈의 존재를 잘 몰랐다. 조선 역시 일본으로부터 오는 은, 즉 왜은(倭銀)을 중국과 대외무역 결제 수단으로 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왜 조선과 인삼 무역 결제용 화폐를 발행했을까. 무엇보다 인삼의 인기가 높았다. 임진왜란으로 끊어진 조선과 왜의 국교가 1609년부터 재개된 가운데 왜의 인삼 수요는 꾸준히 올라갔다. ‘고려인삼’으로 통칭되는 조선산 인삼은 만병통치의 효능을 지닌 약재로 통했다. 병든 부모에게 고려인삼을 사주고 싶어 처녀가 몸을 팔고, 고려인삼을 먹고 몸이 회복된 병자가 너무 비싼 고려인삼 가격을 변제할 길이 없어 자살했다는 말이 퍼질 정도였다.

조선은 대마도를 통한 왜와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누렸다. 조선 수출품의 주력은 60~70%를 차지한 중국산 비단. 구매 가격의 3배 가까운 이문을 붙여 왜에 팔았다. 인삼은 전체 수출 물량의 20% 남짓했으나 늘 공급이 딸렸다. 왜도 조선과 무역에 만족해 간혹 조선과 교역규모가 청나라와 교역을 훨씬 능가하는 경우까지 일어났다. 순탄하던 조선과 왜의 갈등이 시작한 된 이유는 국내 사정으로 인한 도쿠가와 막부의 1695년 악화(惡貨) 주조. 은 광산의 산출이 줄어든 반면 돈 씀씀이는 크게 늘어나자 막부는 돈부터 손댔다.

대화재(1657년)를 당한 에도(江戶·지금의 도쿄)의 재건 비용과 대규모 건축사업으로 지출은 폭증한 상황. 돈이 궁해지자 은화의 순도를 80%에서 64%로 낮췄다. 화폐주조 차익을 노려서다. 문제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언급될 정도로 고품위를 자랑하며 국제무역의 결제수단으로 자리 잡았던 왜은에 대한 신뢰가 깨진 것.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대로 악화가 판치자 조선은 수출 단가를 올리고 교역 자체를 제한해버렸다. 조선과 교역을 맡은 대마도는 막부에 조선이 선호하는 정은(丁銀:제대로 된 순도를 지닌 은화) 공급이 필요하다고 매달렸다.

큰 교역 상대였던 조선과의 관계를 의식한 막부는 어쩔 수 없이 순도 80%짜리 특별 은화(特鑄銀)인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을 1710년 주조, 조선에 넘겼다. 인삼대왕고은이 나오기 전까지 두 나라의 교역에서는 함량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쓰시마는 왜은(1695년부터 주조된 元綠銀)의 함량이 64%라고 주장했으나 조선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62%라고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쓰시마는 조선의 기술 부족 탓이라고 여겼어도 방도가 없었다. 조선이 갑(甲)이었으니까. 인삼대왕고은은 18세기 초우량 상품 인삼의 독점 공급국가인 조선의 위상을 말해주는 징표인 셈이다.



문제는 조선의 무역 우위가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 인삼대왕고은을 주조하던 무렵 왜는 생사(生絲)의 국내 생산에 성공했다. 중국산 비단의 수입 대체 산업을 육성하며 조선과의 무역 수요가 줄어들었다. 1728년에는 조선으로부터 인삼 생근(生根)을 들여와 1730년대에는 국내 재배에도 성공, 대량 생산 시대를 열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나름대로 일본의 정체성을 지키며 개항 직전까지 순항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연구 개발. 인삼대왕고은과 달리 국내에서는 순도가 20%까지 떨어진 은화를 찍어대던 막부는 1714년 6월 26일 은화별 교환비율을 정하며 통화가치 회복에 나섰다. 도쿠가와 막부가 불황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까지는 50년의 세월이 더 걸렸어도 대외 무역으로 인한 은 유출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은 상업과 대외무역에 신경을 쓰지 않는 나라였지만 동북아 무역에서 보이지 않는 주도권을 상실한 이후부터 국력은 더 약해졌다. 일본삼과 북미산 삼의 등장으로 고려 인삼의 설자리가 약해지자 홍삼(紅參)을 개발해 국제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받아냈어도 대세를 돌리지는 못했다. 고려인삼의 공급자 파워(bargaining power) 역시 인삼대왕고은을 받아내던 시기가 피크였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와 왜를 상대로 흑자를 누리던 중계무역도 이후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인삼과 비단을 둘러싼 동북아의 무역은 옛날 얘기에 그칠까. 품목만 바뀌었을 뿐, 누가 주도권을 잡고 혁신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과거와 다를 게 없다. 한국과 일본, 중국 3국은 모두 수입 대체 산업의 육성과 수출 산업 성장으로 경제를 일으킨 공통점을 안고 있다. 누군가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라고 말했다던가. 한국은 최소한 한 번은 기회를 타고 웃었다. 최근 20년간 우리 경제가 이렇다 할 기술 혁신 없이도 최소한의 성장세를 보여온 것도 중국 특수 덕분이다. 문제는 앞날이다. 사드 문제 같은 비 경제적 요인으로 한국의 경제적 이익이 침해 당하고 있는데도 개선될 조짐은 잘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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