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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도 몰랐던 ‘6·28 조치’





1982년 6월 28일, 오전. 기업인들이 귀를 의심했다. 정부가 파격적인 경기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골자는 금리 및 세율 인하. 은행의 대출 금리를 14%에서 10%로,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12.6%에서 8%로 각각 인하하겠다고 밝혔다. 김준성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33~38%인 법인세율도 20%로 인하하겠다고 발표했다. 김 부총리가 밝힌 ‘투자 촉진을 통한 경기 활성화 대책’ 목록에는 정부가 보유한 제일은행, 서울신탁은행, 조흥은행 등의 주식을 매각, 민영화하겠다는 일정도 포함돼 있었다.

6·28조치 발표 직후 시장의 첫 반응은 ‘놀랍다’는 것. 한꺼번에 금리를 4% 포인트 이상 내린다는 점부터 유례가 없었다. 해외출장 중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정부가 금리를 그토록 많이 내려줄 리가 없다. 분명히 뭔가 잘못됐다. 다시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다. 기업들은 6·28 조치를 반겼다. 내로라하는 재벌기업들도 부채비율이 500~800%에 달하는 상황에 대출 이자를 내리고 세금까지 깎아준다는 데 싫어할 기업인이 없었다. 반면 이자 수입이 줄어들 일반인들은 울상을 지었다. 금리가 4.6%나 하락하며 저축성 예금이 줄고 요구불예금의 비중이 커졌다.

사상 최저 수준인 공금리 정책을 펼친 정부의 결단에는 자신감과 위기감이 복합적으로 배어있었다. 물가 급등세를 잡았다고 확신했지만 1978년부터 시작된 수출 부진과 경제난은 좀처럼 풀리지 않던 상황. 일본은 물론 홍콩과 대만의 경제가 좋아진 반면 우리만 침체 국면에 빠져 있다는 조바심에서 초대형 대책이 나왔다. 6·28 조치를 깜짝 발표한 지 불과 닷새 뒤, 정부는 새로운 메가톤급 대책을 내놓았다. ‘금융실명제의 실시와 사금융 양성화’ 방안 등을 담은 7·3조치가 발표된 것이다.

정부는 왜 연거푸 초대형 조치를 시행한 것일까.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무엇보다 민심을 돌릴 수 있는 경제 정책이 필요했다. 건국 이래 최대 권력형 비리라던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어음 사기 사건의 파장이 그만큼 컸다. 정권의 도덕성이 의심받고 경찰관의 총기 난사 사건 등으로 민심 이반(離反) 조짐까지 나타나자 서둘러 각종 대책을 쏟아냈다. 둘째, 경제 관료 사이의 주도권 싸움이 숨어 있었다. 청와대 경제수석실과 재무부 장관, 주요 보직 국장을 차지한 경제기획원(EPB) 출신 관료들은 보수적인 재무관료들에 비해 개혁 마인드가 상대적으로 강해 서슴없이 릴레이식 대책을 밀어붙였다.

문제는 의욕만 앞서고 관료 집단 간 이견 조정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는 점. 활성화 대책은 경제 부총리도 모르게 마련됐다. 주무장관인 재무부 장관도 잘 몰랐다. 금리를 조절하는 업무를 맡은 한국은행 역시 의사 결정 과정에 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누가 추진한 것인가. 청와대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신임받았다는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이끄는 소장파 경제학자들이 활성화 대책의 밑그림을 그렸다.

문제는 손발이 맞지 않았다는 점. 사안마다 조직과 시스템이 아니라 특정 인물 중심의 인맥이 쉬쉬하며 정책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와대와 경제기획원, 재무부, 한국은행 등 관계 기관의 업무 협조는커녕 서로 알리지 않고 정책을 따로따로 펼치는 경우까지 일어났다. 부처 간 불협화음에 따른 정책 엇박자의 대표적인 사례가 6·23 세제 개편안. 6·28 조치가 나오기 불과 닷새 전에 발표된 이 방안은 법인세를 법인의 공개 여부와 관계없이 36%로 올린다는 내용을 담았다. 법인세를 사실상 올린다는 세제 개편안을 언론은 대서특필하고 이를 알게 된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는 난리가 났다.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어떻게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그토록 중요한 사안을 정부 방침으로 확정해 발표하느냐’며 ‘당장 취소하라’고 윽박질렀다. 재무부와 청와대 경제수석실 간의 갈등은 이틀 뒤 개각으로 재무부 장관이 경질되며 자연스럽게 끝났지만, 경제 당국 사이의 알력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재무부가 세제 개편안을 발표했다 취소하는 해프닝이 일어난 직후 발표된 게 바로 6·28조치. 6·23 세제 개편안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정책 당국에 대한 신뢰가 있을 리 없었다. 정주영 회장처럼 정부 정책을 믿지 못하고 재차 확인하는 기업인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정책의 성과다. 청와대의 독주와 물먹은 관료들의 불만, 금융실명제에 대한 여당과 기업인들의 반발로 6·28조치와 연이어 나온 7·3조치는 곧 빛을 잃었다. 금융실명제는 여당인 민정당의 개입으로 금융소득종합과세가 빠져 누더기가 되더니 그해 10월 말에는 실명 거래 실시가 전면 연기되기에 이르렀다. 금융 실명 거래와 맞물렸던 법인세 대폭 인하도 물 건너갔다. 자신의 호주머니 사정을 기업의 재무구조보다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일까. 대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인일수록 금융소득종합과세와 금융 실명제 실시 보류를 법인세 대폭 인하와 맞바꾸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금융실명제가 길을 잃었다. 당시 실무 작업을 주도한 강만수 재무부 이재 3과장(훗날 재경부 장관·MB 정권 시절 산업은행 행장으로 재임할 때 지인 회사에 정부 지원금을 몰아준 혐의로 구속 상태에서 재판 진행 중)은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 경제 30년’에 이런 문구를 남겼다. ‘실명제(實名)제의 운명이 실명(失命), 실명(失明), 실명(失名)의 기로에서 오락가락하다가 사실상 무기 연기됨으로써 실명(失命)은 모면했지만, 실명(失明)한 상태가 되었다. 실명제를 추진한 사람들은 실명(失名)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실(實)은 놓치고 명(名)만 잡은 결과다.’

엇박자에 갈지 자(之) 경제 정책의 후유증은 국민 경제가 떠안았다. 저금리와 실명제 추진에 거액자금이 제도권에서 나가 부동산 투기를 만연시켰다. 1982년에는 기업공개가 단 한 건도 없을 정도로 증시도 힘을 못 썼다. 6·28 조치의 최대 정책 목표였던 ‘기업의 투자 촉진’도 효과가 없었다. 어윤대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6·8조치 직후 월간지 기고문 ‘경제 활성화 조치 이후의 기업경영전략’을 통해 ‘금리 하락을 기업에 대해 정부와 국민들이 내려주는 일종의 하사금(下賜金)’이라며 이자 경감액만 5,000 억 원에 이를 것으로 봤다. 1981년 11월 초순부터 이어진 6차례에 걸친 금리 인하로 불과 8개월 새에 예금과 대출 금리가 절반으로 떨어져 기업들이 얻은 이자 경감 효과가 1조 원에 달한다는 추산도 나왔다. 당시 경제규모(국내총생산 약 600억 달러, 2015년 1조1,411억 달러의 )를 고려할 때 요즘 기준으로 최소한 11조 원, 많게는 23조 원의 자금이 기업에 지원된 셈이다.

혜택을 입은 기업은 정작 시설 투자를 늘리고 재무구조를 고치는 대신 다른 투자에 나섰다. 업무용보다 훨씬 많은 땅을 사들였다. 하긴 기업의 입장에서도 오락가락하는 정부를 믿을 수 없으니 안전자산 투자를 선호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땅값이 뛰고 ‘망국적 부동산 투기’가 구조화했다는 점이다. 증권 시장도 힘을 잃어 1982년에는 기업 공개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기업들은 아쉬울 게 없었다. 예전보다 낮은 금리로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었으니까. 정부가 억지로 내린 명목 금리와 실제 금리와 차이에서 다른 부작용도 꼬리를 물었다. 저금리 대출로 자금 운용의 리스크가 커진 은행은 중소기업 대출을 더욱 줄이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기업 대출을 늘렸다. 실세 금리와 차이만큼의 뇌물도 적지 않게 오갔다. 예금을 조건으로 대출하는 이른바 ‘꺾기’도 판쳤다.

경제가 속에서 멍드는 데도 당시에는 위기를 느끼기는커녕 ‘모든 게 순항하고 있다’고 여겼다. 대외 요건이 우호적으로 바뀐 덕분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국제 금리와 유가, 달러화가 낮게 형성되면서 한국 경제는 3저 호황에 접어들었다. 사상 처음으로 구조적인 국제수지 흑자도 맛봤다. 5공 정권은 들어오는 달러를 주체하지 못하고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등으로 결과적으로 과소비문화까지 퍼트렸다. 외신들이 ‘한국이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트렸다’고 비아냥거리던 시절이 바로 이때다.

수많은 경제 조치를 발동해 ‘조치 공화국’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5공이 단행한 경제 조치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다는 6·28 조치는 이제 기억으로만 남았지만 안타깝다. 밀려 들어오는 달러로 인한 통화 팽창과 물가 오름세를 억제한답시고 눈앞의 대책에 급급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연구·개발(R&D)이나 사회간접자본 확충(SOC), 국가의 주요 부지 유상 선점, 분할 상환 등의 시책을 펼쳤다면 우리 경제가 지금보다 나았을 텐데…. 5공 정권의 경제는 운이 좋았지만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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