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증기범선 브리태니커호





1840년 7월 4일 영국 리버풀항. 1,154t에 길이 63m짜리 목조 외륜선 브리태니커(RMS Britannica)호가 뱃고동을 울리며 항구를 빠져나갔다. 사상 최초로 증기 여객선이 대서양 정기 항로에 투입된 순간이다. 브리태니커호로도 진수(1840년 2월) 후 처녀 항해였다. 740마력 엔진의 힘으로 낼 수 있는 속도는 시속 8.5노트(15.7㎞). 10m인 대형 돛대 3개를 달아 연료가 부족하거나 풍향과 풍속이 좋을 때는 엔진을 끄고 바람의 힘으로 달렸다. 승무원 93명과 승객 63명에게 신선한 우유를 공급하기 위한 젖소까지 실은 브리태니커호가 보스턴에 닿은 것은 7월 20일. 보스턴 시민들은 ‘메이플라워호 도착 이래 최대의 사건’이라며 반겼다.

환영받은 이유는 대서양 횡단 기간을 크게 단축했기 때문. 범선으로 보통 40일 안팎, 빨라야 23일 걸리던 대서양 뱃길을 12일 20시간으로 줄였다. 누구보다도 브리태니커의 성공적인 항해를 반겼던 사람은 사무엘 커나드(당시 53세). 캐나다에 살며 포경업과 목재산업, 수입업을 하던 영국인 사업가였던 그는 증기선의 가능성을 믿었다. 영국과 미국을 오가는 우편통신 사업자 자격을 따고 대서양 정기 항로로 승부를 걸었다. 브리태니커호의 첫 항해에서도 가족을 태우고 미국 땅을 밟았다. 1812년 영미전쟁에 자원해 참전했던 충성스런 영국 신민이던 그는 미국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브리태니커호의 출항 날짜가 미국 독립일에 맞춰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브리태니커호의 성공적 첫 항해에 고무된 그는 대서양 항로에 투입하기 위해 더욱 많은 선박을 뽑았다. 브리태니커와 동급이지만 엔진 출력과 속력을 높인 자매 선박 아카디아·칼레도니아·콜롬비아 등 6척을 차례로 투입했다. 신형 선박을 해마다 취항시켜도 물류와 사람의 이동을 따라잡기 바빴다. 대서양 정기 항로는 곧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떠올랐다. 자연스레 미국과 독일 등의 경쟁사들도 따라붙었다. ‘커나드 라인’으로 사명을 바꾼 사무엘 커나드의 회사는 신형 선박 도입, 무선통신 기술 채용 등 신기술을 적용하며 선두를 지켰다.

브리태니커호를 비롯한 증기선들의 최대 장점은 안전과 안정성. 범선보다 속도가 빨랐고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들쭉날쭉이던 도착 시각이 일정해져 무역 거래의 신뢰도까지 높아졌다.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미국 경제는 선순환을 탔다. 일손이 더욱더 요구되고 농산물과 공산품의 생산과 수출도 늘어났다. 무엇보다 유럽 각지에서 유입되는 이민이 늘어났다. 1830년대 3.9%였던 미국행 이민의 연평균 증가율이 1840년대에는 8.4%로 뛰어올랐다. 거의 무한정으로 공급되는 광활한 토지와 대규모 이민이 공급하는 노동력이 맞물린 결과는 고성장. 미국은 유럽 열강을 뛰어넘는 경제 대국으로 커 나갔다.

미국인들은 이민과 선진 문물을 싣고 와 미국산 농산물 등을 싣고 떠나는 대서양 정기선을 반겼다. 1844년 겨울, 독립 이래 최악이라던 한파로 항구가 얼어붙었을 때 보스턴 시민들은 얼음을 깨서 브리태니커호 등 정기선이 입항할 수 있는 수로 11㎞를 개통시켰다. 대서양 정기선은 미국을 살찌운 젖줄이었던 셈이다. 브리태니커호는 1849년 프로이센 해군에 매각된 후 1880년 표적함으로 쓰이며 바다에 가라 앉았지만 운항시간 단축을 위한 경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서양 항로가 전성기였던 시기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중반까지. 한창때에는 동쪽과 서쪽 항로의 최단주파 기록을 겨루는 블루 리본(Blue Ribbon)상을 타려고 각국은 더 빠르고 좋은 선박 건조 경쟁까지 펼쳤다. 1843년과 1889년, 시속 10노트와 20노트를 넘는 기록이 나오고 조선 기술의 발전으로 1935년에는 ‘마의 30노트’ 벽까지 깨졌다. 각국이 빠른 정기선을 건조하는 경쟁에 나선 데에는 유사시 병력 수송함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깔렸었다.

경제사가 찰스 킨들버거의 역저 ‘경제강대국 흥망사’에 따르면 독일에서 건조한 정기여객선이 블루 리본을 차지한 1897년과 1900년, 영국 언론들은 ‘위기’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독일이 크고 빠른 여객선을 건조할 때마다 영국은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해가며 신형 선박을 건조해댔다. 처칠 영국 총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블루 리본을 따내려고 정부가 보조금을 줘가며 건조한 대형 쾌속 여객선 덕분에 전쟁을 1년 남짓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사시 수송함으로 전용될 속도 빠르고 큰 여객선은 옛날 얘기일까. 미국의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S)호’가 마지막으로 알려졌지만 그렇지 않다. US 호는 초대형보다는 다소 작은 47,264t이지만 건조 당해년도인 1952년 대서양을 3일 10시간 40분 만에 건넜다. 당시 기록한 평균 시속 35.59노트(약 66㎞)는 아직 대형 여객선으로는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US호는 여전히 관심거리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최고속도는 39노트지만 실제로는 44노트까지 나왔다. 1972년부터 유사시를 대비해 보존에 들어간 이 배의 해체 또는 재활용 여부는 미국에서 해묵은 논란거리다. US호 뿐 아니다. 10만t을 훌쩍 넘어 25만t에 이르는 덩치에도 시속 25~30노트를 내는 각국의 대형유람선들은 하나같이 유사시 병력 수송용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 포클랜드 전쟁(1982)에서도 그랬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