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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난해하고 중요한 책, ‘프린키피아’





가장 난해하고 가장 중요한 책이 여기에 있다. 1687년 7월 5일 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만유인력 발견자로 유명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대표작이다. 긴 제목을 줄여서 ‘프린키피아(Principia: ‘원리’라는 뜻의 라틴어)’로 부르는 이 책은 정녕 어려울까. 그렇다. 출판 당시부터 난해하기로 악명 높았다. 케임브리지대학의 한 학생이 지나가는 뉴턴을 보고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쓴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뉴턴도 책이 어렵다는 점을 알았다. 김동원 카이스트 교수(과학사)의 논문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따르면 뉴턴은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에드먼드 핼리조차 유체 역학 부문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핼리가 누구인가. 핼리혜성의 존재와 공전주기를 발견한 당대의 천문학자 아니던가. 뉴턴보다 13살 어렸지만 평생 친구로 지내며 프린키피아의 출간을 종용했던 왕립협회 현직 서기마저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더욱 난해했을 터. 하긴 보통 사람들은 접근도 힘들었다. 뉴턴이 라틴어로 썼으니까.

뉴턴은 책을 어렵게 쓴 이유에 대해 ‘소인배들의 수박 겉핥기식 접근을 막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마치 지적 자폐증 환자처럼 연구 성과 공개를 극도로 꺼렸던 뉴턴답다. 뉴턴은 ‘어떻게 하면 프린키피아를 제대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처음의 약 60쪽 정도는 명제와 증명들을 이해하는 데 집중하고 바로 3권(천체의 구조)으로 건너뛰라’는 충고를 남겼다. 모두 3권으로 구성된 프린키피아의 1, 2권(물체의 운동)은 수학 전공자라도 따라가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극도로 난해한 책이지만 사람들은 기를 쓰고 읽었다.



17세기 경제학과 통계학의 개척자라는 윌리엄 패티는 가정교사를 붙여서 프린키피아를 이해하려 애썼다. 뉴턴의 대학 입학 추천서를 써줬던 신학자 험프리 배빙턴은 프린키피아의 일부분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7년을 꼬박 읽었다. 18세기 초반에는 프린키피아 입문서 출간 붐이 일었다. 프랑스의 볼테르까지 뉴턴 사후에 ‘뉴턴 철학의 개요(1738)’를 썼다. 일반인들에게 프린키피아가 대단한 저술로 각인된 계기는 1758년 크리스마스 무렵.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가 프린키피아를 근거로 핼리 혜성의 궤도를 정확하게 예측하면서 이미 사망했던 뉴턴과 그의 이론은 더욱 각광받았다.

뉴턴과 같은 시대를 살던 유럽인들이 프린키피아에 열광한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을 종합했으니까. 조각나 있던 과학이 뉴턴의 프린키피아로 인해 비로소 근대 과학으로 합쳐졌다. 하버드대 역사학과장과 미국 역사학회장을 지낸 윌리엄 랭어 교수가 남긴 책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서양 근현대사 깊게 읽기(원제: Perspectives in western civilization, 박상익 우석대 교수 번역)’에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어떻게 근대과학의 결정판이 됐는지, 그 과정이 나온다.

“뉴턴이 태어난 1642년께 과학혁명을 주도한 위대한 인물 중 네 명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과학은 여전히 분열돼 있었다. 지동설을 설파한 코페르니쿠스는 죽은 지 99년이 지났다. 베이컨은 1626년에, 케플러는 1630년, 그리고 갈릴레오는 뉴턴이 태어나던 해 죽었다. 그들의 뒤를 이은 다섯 번째 위대한 인물인 데카르트는 이미 ‘방법서설’을 출간(1637)하고, 뉴턴 출생 2년 후인 1644년에는 철학의 기계적 원리에 대한 기념비적 논저(‘철학의 원리’)를 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과학의 방법과 목적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 아무런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위대한 과학자들의 공통분모는 ‘과학’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혐오’와 그것을 무언가 더 나은 것으로 대신하려는 압도적인 ‘갈망’ 뿐이었다.”



과학의 선구자들은 하나 하나 뛰어난 업적을 이뤘어도 학설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절친한 친구인 케플러의 타원운동 개념을 비웃었다. 조금 후에 등장한 데카르트는 세계는 거대한 기계라며 세상을 오직 물질적인 실체라고 봤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며 사유를 통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봤다. 영국의 베이컨과는 정반대였다. 갈릴레오의 수학적 접근과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철학, 베이컨의 경험주의에 케플러의 난해한 천문학이 상호 관련 없이 혼재된 상황이었다.

뉴턴은 기하학 또는 수학으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하고 ‘중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면서 이전 철학자들이 갖고 있던 모든 생각을 하나로 묶었다. 프린키피아는 서구 과학자들을 수천 년 동안 괴롭혀온 ‘자연 현상의 작동 원리’도 규명해냈다. ‘우주에 존재하는 두 물체 사이에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질량의 곱에 정비례하는 중력이 존재한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기준으로 왜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이 있으며 사리와 조금 현상이 발생하는지를 규명했다. 증명의 도구는 기하학과 수학이었다.

뉴턴에 이르러 유럽 철학계의 오랜 논쟁과 고민도 일단락을 맺었다.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놓고 철학자마다 물과 불 등의 원소를 주장한 것처럼 뉴턴 역시 존재의 근본을 고민하고 결론을 내렸다. 중력의 법칙을 만물의 근원으로 본 것이다. 뉴턴은 이를 추론의 영역에 남겨두지 않고 기하학과 수학을 통해 증빙해냈다. 천체의 복잡한 움직임도 그의 손을 거치면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수학 방정식으로 바뀌었다. 선구자들의 각성과 연구업적은 ‘뉴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고 유럽은 과학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마야 문명보다 천문학에서 뒤지고 아라비아보다 수학에 약했던 유럽은 과학 혁명 덕분에 세계를 주도하는 자리에 올랐다.

뉴턴이 이 책에 감히 ‘원리’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2,000년 넘게 내려온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관을 근대적 뉴턴 역학으로 대체했으니까. 프린키피아의 영향력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흔히 뉴턴 역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발견으로 생명을 다했다고 여기지만 과연 그럴까. 포탄은 여전히 포물선을 그리며 날고 비행기를 하늘로 띄우는 날개 양력의 이론적 기초인 ‘베르누이 정리’의 바탕에도 뉴턴 역할이 자리 잡고 있다. 음파와 파동이론, 쓰나미 현상을 설명할 때도 뉴턴 역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뉴턴의 이론은 프랑스의 피에르 라플라스를 거치며 전자회로 설계, 우주선의 천체 항해를 계산하는 도구로 쓰인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이 발견한 법칙들이 원자 세계에서나 아주 빠른 속도 환경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점을 규명했을 뿐이다.

뉴턴을 뉴턴답게 만든 사람들은. 따로 있다. 난해하다는 프린키피아를 돈 주고 샀던 독자들. 양가죽 표지가 입혀진 초판을 7실링이라는 적지 않은 가격에도 구매했던 사람들 덕분에 뉴턴은 제2, 3판을 계속 찍었다. 판을 거듭할 때마다 프린키피아는 초판과 다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더 새로운 내용이 들어갔다. 뉴턴이라는 이름의 중력 때문인지, 지난 2016년 말 프린키피아 초판은 뉴욕 경매에서 370만 달러(한화 약 44억 원)에 팔렸다. 프린키피아가 끼친 보이지 않는 영향도 많다. 고등학교 때부터 갈리는 문과와 이과의 구분도 복잡한 수학이 등장한 프린키피아 이후부터라고 한다

330년 전 출간된 프린키피아와 뉴턴을 보면서 우리를 생각한다. 세계에서 수학을 공부하는 시간이 가장 많은 국가 중의 하나라는 대한민국에서는 왜 세계적 수학자가 나오지 않는 것인가. 사람들은 왜 객관적 이성은 나누고 주관적 감정에 매달릴까. 어쩌면 진리에 대한 열정과 이타심이 부족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핼리는 뉴턴에게 프린키피아를 쓰라며 출판 비용까지 댔다. 뉴턴과 친분보다 진리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뉴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아이작 배로 교수. 뉴턴보다 12살 위였던 그는 뉴턴에게 수학과 광학에 관심을 가지라고 끊임없이 가르쳤으며 39세 나이에 케임브리지 대학 최초의 수학 교수 자리까지 내던졌다. 제자인 뉴턴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다. 우리에게 이런 스승이 있었나. 과학서적을 고르는 독자가 많기를 하나.

/논설위원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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