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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름과 농양…‘비시 프랑스’의 탄생





1940년 7월 10일, 프랑스 중남부 온천 도시 비시(Vichy). 프랑스 의회가 상·하원 합동회의를 열고 표결에 들어갔다. 안건은 필리프 페탱 원수에 대한 ‘신헌법 제정권 부여’. 한 사람에게 행정부는 물론 헌법 개정까지 맡기는 사실상 개헌 투표의 결과는 압도적 찬성이었다. 569명 가운데 찬성 472명, 반대 80명, 기권 17권. 페탱 원수는 즉각 새 헌법을 내놓고 이튿날인 11일 ‘프랑스 국가(French State)’를 선포했다. 1870년 프로이센과 전쟁 패배 직후 성립된 프랑스 제3 공화국도 이로써 70년 만에 막을 내렸다.

통상 ‘비시 프랑스’나 ‘비시 정권’으로 불리는 ‘프랑스 국가’는 형식상 적법한 절차에 의해 성립됐으나 실제 행태는 달랐다. 보수 우파의 가치를 강조했을 뿐 실제 모습은 독일 점령군에 협력하는 사실상의 괴뢰 정부였다. 프랑스 민중들은 ‘친독 정권’의 탄생에 저항했을까. 그렇지 않다. 대다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독일과 전쟁 시작 불과 5주 만에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현실에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두 번째 이유는 페탱 원수에 대한 신뢰.

프랑스 국민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구한 전쟁 영웅 페탱 원수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페탱의 이름이 알려진 계기는 베르됭 전투.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양국 군대 135개 사단이 전투에 참가해 프랑스 37만 1,000명, 독일 33만 7,000명이라는 사상자를 낸 이 전투는 애초 프랑스의 패배가 예상되던 전투였다. 예측대로 프랑스군은 밀렸으나 페탱이 지휘를 맡은 후 전세가 뒤집혔다. 페탱은 무리한 돌격보다 중화기를 이용한 수비 전술을 개발,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승진 운이 없어 전쟁 발발 직전까지 58세 나이에도 대령 계급에 머물렀던 페탱은 이후 탄탄대로를 달렸다.

1차 대전 당시 병사들은 ‘페탱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에서 싸우면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며 그를 따랐다. 페탱 원수의 친독 성향 정권 출범을 바라보는 프랑스 국민들의 생각도 1차 대전 당시 병사들의 기대와 비슷했으리라. 프랑스 국민들의 기대는 일부만 현실로 나타났다. 우선 비시 정권의 출범으로 프랑스는 독일군에 의한 완전 점령을 피할 수 있었다. 국토의 중남부 지역 5분의 2를 다스린 비시 정권은 개혁에 나섰다. 문제는 개혁이 역방향이었다는 점. 페탱 원수는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맥없이 무너진 이유가 사회 가치관의 혼란, 외국인 자본가, 공산주의자들의 준동 탓이라고 여겼다.

‘프랑스 국가’ 출범 직후부터 연말까지 귀화 금지법을 비롯해 반(反) 유대인법, 반 공산주의·반 무정부주의자법을 잇따라 만들었다. 인종과 국적의 차별을 금지하며 사상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흐름과 정반대인 페탱의 입법권 행사에 프랑스 국민들은 등을 돌렸다. 페탱 수반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교회의 대부분과 기업인, 자본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페탱이 추구했던 새로운 프랑스는 ‘표어’가 말해준다. 페탱은 ‘자유·평등·자애’라는 프랑스 혁명(1789년) 이래 견지해온 가치를 버리고 ‘노동·가족·조국’을 새로운 지향점으로 제시했다.

페탱의 프랑스 국가는 노동자 단결권을 부인하는 ‘건전한 노동 정신’ 아래 가족의 전통적 기능을 회복하고, 각자가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국가였다. 비시 정권은 영국과 전쟁을 위해 잔 다르크를 국가 이념과 정책 홍보에 활용하면서도 갑옷과 무기를 든 잔 다르크가 아니라 육아와 가사에 매진하는 ‘모범적인 농가 처녀’로 소개했다. 비시 정권에는 바로 반대 세력이 생겼다. 국내에서 저항세력, 즉 레지스탕스(Resistance)가 광범위하게 조직되고 해외에서도 드골 육군 소장을 중심으로 ‘자유 프랑스(Free France)’ 운동이 기치를 올렸다.

당시 세계는 비시 정권과 자유 프랑스를 어떻게 대우했을까. 영국만 자유 프랑스를 지지했을 뿐이다. 미국과 소련도 비시 정권을 프랑스의 적통으로 여겼다. 특히 미국은 본격 참전한 뒤에도 노골적으로 드골 장군을 견제했다. 자유 프랑스는 ‘망명 무장단체’일 뿐 국가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고 권달천 부산대 교수(사학과)의 논문 ‘제2차 세계대전 중 미·불 관계의 부조화에 관한 자료 보충적 고찰’에 따르면 미국에 기항한 비시 정권의 함정과 상선의 승무원이 ‘자유 프랑스’에 합류하려고 탈출했을 때 모두 체포해 감옥에 가둔 적도 있다. 견제의 표적은 드골 장군. 드골의 군 선배나 정치인 출신에게 자유 프랑스를 맡으라고 끊임없이 부추겼다.

프랑스 국민들은 점점 더 자유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경제적 수탈이 ‘페탱은 독일과 한 패거리’라는 인식을 하게 만들었다. 비시 정권은 독일이 정하는 환율에 따라 하루에 2,000만 마르크씩 독일 점령군 유지비용으로 댔다. ‘의무 노동제’라는 이름 아래 프랑스 노동자 65만명이 독일 공장으로 끌려갔다. 프랑스 내 산업시설과 500만명의 노동력도 독일을 위한 군수물자 생산에 투입됐다. 비시 정권은 국민의 안위를 내세웠으나 2차 대전 중 프랑스 국민의 영양 상태는 독일 직접 점령지역보다 나빴다. 독일에 잡힌 프랑스군 포로 200만명(식민지군 20만 포함)의 송환을 요구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돌려받은 포로는 11만명 선에 그쳤다.

비시 정권 아래 적극적으로 친독 행위에 나선 인물도 적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언론인들은 독일의 세상이 이어지리라 판단했는지 파시즘 전파에 열을 올렸다.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나치 친위대 샤를마뉴 사단은 소련 원정은 물론 끝까지 베를린 시가전에서도 싸웠다. 일부 지방 공무원들은 프랑스군 포로의 아내들이 ‘사실상 독신’이라며 독일군과 맺어주는 운동을 펼쳤다. 저항세력(레지스탕스)도 독일군보다는 비시의 경찰과 군사조직(Milice)과 민병대에게 더 많이 잡혔다. 비시의 경찰은 저항세력을 체포하면 공산주의자라며 처형했다. 약 7만명에 이르는 프랑스 유대인을 강제수용소에 넘긴 것도 비시 정권이다. 프랑스에서 유대인 색출과 검거에 나섰던 독일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프랑스 저항세력은 독일군, 비시 정권과 싸우며 점점 강해졌다. 저항세력과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가 가장 빛났던 순간은 1944년 8월 파리 입성. 당초 미국은 독일 점령지 전역에서 군정(軍政)을 세울 요량이었으나 프랑스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저항세력이 끊임없이 독일군을 괴롭혔으며 자유 프랑스군도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이탈리아 전선에서 전공을 세웠다는 이유를 들었다. 드골은 전쟁물자를 지원해준 미국에 감사를 표시하면서도 프랑스인들이 보여준 국내외의 저항은 군사 지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점을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결국 미국은 파리 해방의 순간을 자유 프랑스가 맡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가 해방되고 나서야 미국은 자유 프랑스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프랑스인들의 저항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미군의 군정을 받는 것은 물론 국제연합(UN)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가치를 회복한다며 독일에 붙었던 비시 정권의 인사들과 친독 부역자들은 프랑스 해방 직후 철퇴를 맞았다. 독일군과 동침했던 여인들은 머리를 삭발 당한 채 거리에서 조롱 당하고 거리와 도시마다 재판소가 설치돼 청산이 진행됐다. 프랑스는 세 종류의 재판을 열었다. 비시정부의 고위 인사는 탄핵재판소에서 언론인과 작가는 특별법원에서, 죄상이 미미한 협력자들은 각 지방법원에서 죄과를 심문 받았다. 분노한 군중들에 의한 약식 재판에서도 수많은 나치 부역자들이 처형 당했다.

프랑스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처벌은 언론인과 작가 집단에 대한 청산. 조국을 위해 앞장서야 마땅한 지식인들의 배반을 최악질로 본 것이다. 대독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은 여전히 위력이 있는 선동 무기였기에 부역 언론인은 나치의 1급 전투원으로 간주됐다. 언론인과 작가들의 범죄 사실 증명은 어렵지 않았다. 증거가 명백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혐의를 부인하다가도 활자나 방송 녹음, 책자 등의 증빙을 보여주면 부역자들은 고개를 떨궜다. 부역 언론인 청산을 통해 프랑스는 ‘언론은 사실만을 보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뼈에 새겼다. 글로 쓴 것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법이다.

프랑스의 각급 법원은 무려 100만명에 이르는 부역자 재판을 거쳤다. 여기서 6,763명에게 사형선고를, 2만 6,529명에게는 징역형이 내려졌다. 유죄를 선고받은 부역자가 8만9,7709명에 이른다는 자료도 있다. 실제 사형 집행은 782명. 페탱 원수도 사형이 언도됐으나 1차 세계대전에서 부관(중위)이던 드골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 받아 감옥에서 죽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기업이던 르노 자동차도 독일을 위해 무기를 생산했다는 죄를 추궁 받아 소유구조가 국영기업으로 바뀌었다.

4년이 채 안되는 피점령기간을 청산하기 위해 프랑스는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처형된다며 용서하자는 주장도 없지 않았다. 드골은 ‘종기와 고름을 그대로 두고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할 수 없다’며 물리쳤다. 민족 반역자 처단에 시효를 두지 않았기에 프랑스의 반역 청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지난 1998년에는 비시 정권에서 저질렀던 과거가 새로 드러났다며 90세 노인을 체포해 옥에 가뒀다. 온천 휴양도시인 비시 지역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하려다 여론의 몰매를 맞을 적도 있다. 지난 2011년에는 인구 100명 정도의 시골에 아직도 ‘페탱 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홍역 끝에 거리 이름이 바뀌었다. 프랑스 극우정당마저 비시 정권과 나치 부역만큼은 철저하게 부인한다.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콜라보라시옹’은 금기어다. 철자가 영어와 같은 ‘콜라보라시옹(collaboration)’은 본래 협력이나 협업을 뜻하는 단어. 보통은 좋은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정관사나 대문자가 붙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페탱 원수가 비시 정권 출범 초기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협력(Collaboration)’을 강조한 이래, 이 단어는 ‘반역’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됐다. 우리 말로 치자면 ‘협력=친일 반역’ 쯤에 해당되는 단어가 바로 ‘콜라보라시옹’인 셈이다.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콜라보라시옹이 유난히 강조된다. ‘이제는 잊고 협력하자’는 언어에는 망각하고 참여하지 말라는 부역자들의 메시지가 깔린 게 않을까.

과거 청산에서 프랑스는 모든 게 한국과는 정반대다. 일제에 부역하며 동족을 팔았던 자들이 대대로 잘 먹고 잘 사는 우리와는 딴판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과거 청산에서 동일한 점은 딱 한 가지뿐이다. 둘 다 진행형이라는 점. 프랑스에는 아직도 청산이 이뤄지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망각이 진행 중이다. 무엇이 한국과 프랑스를 갈랐을까. 더욱 많은 관심과 참여가 필요해 보인다. 독일 태생의 유대계 미국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민이 정치에서 소외된 사회는 언제든지 전체주의화한다.’ 나치와 일제는 물론 비시 정권이 추구했던 바가 바로 권위적 전체주의다. 2017년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전체주의 성향에서 얼마나 자유스러울까. 소외를 거부하는 시민들이 나라를 구하고 역사를 만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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