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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 구조를 깬 바스티유 감옥 습격





1789년 7월 14일 오후 5시 30분. 파리 시민들의 공격을 받던 바스티유 감옥 문이 열렸다. 군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이유는 두 가지. 왕정과 싸울 화약을 확보하고 정치범을 석방할 요량이었다. 파리 시민과 급조된 부르주아 민병대 1,500명은 교전 끝에 승리를 따냈다. 절대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이 이렇게 시작됐다.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인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은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산물인 공화정은 단순한 정치체제에 머물지 않고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로 변형되어갔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지구촌 정치사 최대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국왕 루이 16세 입장에서 불온한 조짐은 두 달 10일 전인 5월 5일 삼부회를 소집할 때부터 움텄다. 루이 16세는 성직자와 귀족, 평민으로 구성되는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를 소집하면 평민 대표들의 요구가 거셀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국가 재정이 거덜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해 세금 수입은 5억 리브르 남짓한 반면 부채는 45억 리브르에 이르렀다. 매년 부채 상환에만 3억 리브르 이상이 들었다. 최악의 재정난에서도 돈과 권력을 지닌 기득권층은 면세 혜택을 포기할 수 없다고 버텼다.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에 따르면 혁명 직전 프랑스 상위 10%가 부의 90%를 차지했다. 특히 상위 1%가 차지하는 재산이 60%가 넘었다.



프랑스 인구의 2% 미만인 성직자(제1계급)와 귀족(제2계급)의 면세 혜택을 없애 세수를 확보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좌절된 상황. 루이 16세는 1641년 이래 열리지 않던 전국 규모의 삼부회를 175년 만에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평민 출신 신흥 부자들에게 손을 벌리기 위해서다. 위험 부담을 안고 소집한 삼부회의 제3계급(평민)은 순순히 왕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상위 2%인 성직자와 귀족 집단은 한 푼도 안 내고 차상위 8%를 점하는 신흥 부자(부르주아)에게 세금을 더 내라는 강요가 통할 리 만무. 투표권 비율부터 이견을 보인 삼부회의 평민 대표들은 요구가 번번이 무산되자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따로 국민의회를 구성한 평민대표들은 회의가 루이 16세의 방해로 막히자 테니스장에 모여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6월 20일)’ 19일 뒤인 7월 9일 국민의회는 스스로 ‘제헌의회’라고 선포하며 한 발 더 나갔다. 루이 16세는 2만여 군병력을 파리 주변에 깔았다.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루이 16세가 세제 개혁을 추진하던 재정총감 네케르를 해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일 밤부터 파리는 더욱 술렁거렸다.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 주역은 카미유 데물렝. 변호사 출신 언론인이던 그는 군중 앞에서 외쳤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네케르 해임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처럼 애국자들을 죽이려는 예고편이다. 독일과 스위스 군대가 우리를 죽이려 출발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선택만 남았을 뿐이다. 모두 무기를 들자.’ 선동은 바로 먹혔다. 파리와 바르세유 궁전에 포진한 2만 5,000여 근위대 가운데 절반인 독일과 스위스 출신의 외국인 연대가 파리로 진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군중들은 13일까지 교회와 학교 등을 습격해 52개 마차 분량의 식량을 털었다.

운명의 14일 아침. 부르주아 민병대와 시민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앵발리드 상이군경 회관 무기고에서 머스킷 소총 약 3만 정을 탈취했으나 문제는 탄약. 불과 며칠 전 화약 250통을 ‘안전한 바스티유 감옥’으로 옮겼다는 정보를 접한 군중은 바로 바스티유 감옥으로 발길을 돌렸다. 화약은 물론 수감 중인 정치범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어떤 곳인가. 넘기 어려운 요새였다. 파리 동부에 위치한 이곳은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돼 17세기부터 감옥으로 쓰이던 시설. 높이 30m의 성벽을 폭 25m 해자(垓字·성 주변에 조성한 인공 연못)가 감쌌다. 대포 30문에 장병 114명으로 구성된 수비대가 바스티유 감옥을 지켰다.



공격 측은 이름이 확인된 사람만 954명. 빈 총을 든 군중까지 모두 1,500여 명의 대열은 오전 중 바스티유 감옥에 도착, 대표를 뽑아 협상에 들어갔다. 수비대 사령관 드 로네이 후작은 항복과 무기와 화약의 인도, 정치범 석방 요구를 거부했다. 오후 1시 30분, 수비가 허술한 지역을 찾아내 성내에 진입하려는 일부 군중에게 수비대가 사격을 가했다. 수비대의 사격이 오후 3시까지 계속되자 공격 측도 대포 2문을 끌어와 포격으로 맞서던 오후 5시, 수비대 쪽에서 휴전 제의가 왔다. 수비대도 음식과 물이 떨어진 상황. 오후 5시 30분께 성문이 열렸다.

양측의 교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모두 99명. 공격 측 98명과 수비대 병사 1명이 죽었다. 사령관 로네이 후작은 전투가 끝난 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군중에게 끌려다니고 조롱당하며 ‘차라리 죽여 달라’고 외치던 그는 요리사가 찌른 칼에 숨졌다. 로네이 후작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모두 살려주기로 하고 성문을 열었다는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 상존한다. 로네이 뿐 아니라 수비대 장병 6명도 살해당했다. 일부 군중이 처형한 사령관과 장교들의 목을 잘라 창에 걸고 시내를 행진하는 동안 감옥 내부를 수색하던 지도부는 크게 놀랐다.

볼테르나 디드로 같은 계몽사상가들이 수용됐던 정치범 수용소라고 알려진 바스티유 감옥에 정치범이 없었기 때문이다. 군중이 ‘구출’한 죄수라야 달랑 7명. 정신병자에 근친상간범, 화폐 위조범에 사기꾼이 섞여 있었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세이 드 사드 백작도 습격 10일 전에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고 없었다.(루이 14세의 특별 명령으로 수감됐던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성도착증 환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상대방에게 고통을 안기는 행위에서 성적 쾌락을 얻는다는 ‘사디즘(Sadism)’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바로 그 사람이다). 사기범 4명이 군중에게 풀려난 직후부터 자취를 감췄다.

파리가 피 흘리던 그 날 국왕 루이 16세는 온종일 사냥으로 지친 몸으로 일기에 ‘한 마리도 못 잡았다’는 아쉬움을 적은 채 밤 10시쯤 침소에 들었다. 조금 뒤 파리 소식이 베르사유 궁에 들어왔다. 왕실의 의상담당관인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 후작이 루이 16세를 깨웠을 때 대화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잠이 덜 깬 국왕은 후작에게 되물었다. ‘반란인가?’ 후작은 바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하. 이것은 혁명입니다.’ 후작의 말이 맞았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의 진실이 어떻든 역사에 남은 결과는 봉건적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구질서)’을 무너트린 프랑스 대혁명의 신호탄이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당일 루이 16세의 행동은 그가 무능한 군주라는 반증으로 자주 인용된다. 정말 그는 어리석은 군주였을까.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모두 그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시리즈를 집필 중인 주명철 한국교원대 교수는 시리즈 제1권 ‘대서사의 개막’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전후 상황을 고려해보면 루이 16세는 나름대로 현실에 대처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중략)…절대 군주정에서 아무리 왕의 역할이 막중하다 할지라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책임을 모두 루이 16세의 무능 탓으로 돌린다면 당시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치를 일삼았다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마찬가지다. ‘지나친 사치로 나라를 망친 오스트리아의 암캐’로 알려졌으나 과장됐다는 시각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주명철 교수는 위의 책 ‘대서사의 개막’과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마리 앙투아네트 신화’를 통해 왕비의 사치는 사기꾼 일당이 씌운 누명이라고 규정한다. 바스티유 점령 직후, 파리와 베르사유에 주둔한 군대를 물리겠다고 약속한 루이 16세에게 군중들은 ‘국왕 만세’라고 외쳤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로 돌아간다고 밝혔을 때 군중은 ‘왕비 만세’라며 화답했다.

그렇다면 바스티유를 점령하는 봉기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적폐(積弊) 탓이다. 루이 14세 치세부터 방만한 재정 운영과 연속된 전쟁, ‘국민에게 존경받는 국왕’이었다는 루이 15세(루이 16세의 조부) 시절에도 영국과 크고 작은 전쟁에서 모두 패배하며 광대한 식민지를 상실한 부작용이 컸다. 곳간이 비었는데도 재산과 권력 유지에만 매달렸던 프랑스 엘리트 집단의 책임이 더 크다. 물론 국왕 부부는 엘리트 집단의 핵심 멤버였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운도 나쁘고 정책적 실책도 겹쳤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기후와 천재지변도 있었다. 먼저 바스티유 습격의 기록화를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나온다. 혹서기로 접어드는 계절인데도 군중과 진압군은 긴 외투까지 걸쳤다. 테니스코트 선서의 기록화에서도 의원들은 겨울철 옷을 입고 있다. 파리 지역이 한겨울에도 2℃ 정도의 온화한 지역인데도 두꺼운 옷을 입은 이유는 기상 이변.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당일 파리의 한낮 최고 온도는 7℃였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는 1750년부터 시작된 소빙하기의 영향이었다.

이상 저온뿐 아니다. 서정복 충남대 명예교수의 저서 ‘프랑스 혁명’에 따르면 1785년 가뭄, 1787년 대홍수, 1788년 극심한 가뭄과 우박, 1788년 이래 이상 저온이 반복되며 프랑스 농업은 극심한 흉작과 생활고에 시달렸다. 혁명 발발 당시 프랑스 인구는 2,600만여 명으로 1715년부터 연 10%씩 늘어났으나 먹을 식량이 부족해졌다. 18세기 초중반까지는 신대륙에서 넘어온 옥수수와 감자 등으로 농업 생산이 늘어 인구가 증가했으나 이상 기온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흉작과 농산물 가격 폭등으로 이어진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직전 파리 노동자들의 하루 수입은 평균 30수(sous). 주식인 빵값이 2수 아래로 안정되어야 생활할 수 있었는데 두 달 새 최소 두 배로 뛰었다. 일부 지방은 네 배까지 올랐다. 1726~1741년 사이 24개 식료품의 가격을 100으로 잡았을 때, 1785~1789년의 가격지수는 165. 특히 1789년 6월과 7월 두 달 사이에 가격이 150% 이상 뛰었다. 여기에 정책 실수도 저질렀다. 영국에 뒤지는 경쟁력으로도 무리하게 자유무역협정(이든 조약·1786년)을 맺은 결과 영국과 경합하는 면직 및 의류업종이 줄줄이 문 닫았다. 실업률도 50% 넘게 치솟았다.

가뜩이나 먹을 것도, 직장도 없는 마당에 영국과 단기간 동안 다섯 차례나 전쟁에서 네 번 패배하는 통에 식민지에서 귀국한 사람들의 입까지 더해져 식량 수급난이 가중됐다.(단 한번 승리는 간접 승리였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군을 물리친 것이니까. 하지만 여기에도 10억~20억 리브르에 이르는 천문학적 전쟁 자금이 들어가 재정을 더욱 망가뜨렸다.) 미망인으로 나폴레옹과 결혼하게 되는 조세핀의 집안도 서인도제도의 기상 변화와 영국의 침공 위협에 눌려 본국에 귀환한 가문이었다. 사람은 많아지고 식량과 땔감은 부족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불만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쏠리고 결국은 혁명으로 이어졌다고 정리할 수 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는 정치적 갈등과 경제난, 사회적 불만이 모두 녹아있던 셈이다.

소설가 겸 역사가인 고 앙드레 모루아는 저서 ‘프랑스사’에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현대 프랑스의 시작이라고 봤다.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도 여기서 나왔다. 혁명 초기 선동으로 유명한 언론인 카미유 데물랭은 녹색을 새로운 프랑스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으나 프랑스 국민군(부르주아 민병대의 후신)의 총사령관을 맡았던 라파예트 후작(미국 독립전쟁의 프랑스 파견군 사령관 출신)이 바스티유 감옥 점령 직후 시민과 군인들에게 삼색이 들어간 모자를 보급하며 국기로 굳어졌다.

주목할만한 대목은 프랑스혁명의 성공 요인. 명분도 분명치 않았고 포로 처리에서는 더욱 비인도적이었던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그 이후의 혼란과 반동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세계를 변화시켰다. 인류애와 조국애라는 가치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한 달 보름 여 뒤인 8월 26일 발표된 ‘인권과 시민의 권리 선언(인권선언)’은 자유와 평등을 인간이 누려야 할 천부의 권리로 못 박았다. 지구촌의 어떤 정치체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왕정을 떠나 적어도 법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기본적 가치로 삼는다.

근대적 군대도 프랑스 혁명에서 나왔다. 혁명 정신의 파급을 막으려 유럽의 절대 왕정국가들이 침공해 들어올 때 프랑스군은 지리멸렬 상태였다. 군 지휘관의 95%를 차지하는 귀족들이 처형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한 탓이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능력 위주로 장교를 선발하고 장군을 뽑았다. 외세 침략에 국민 총동원령을 내려 순식간에 70만 대병력을 조직, 안보를 지키고 유럽을 휩쓸었다. 국민 개개인의 조국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물론 나폴레옹의 침략과 제정 복귀를 반동으로 볼 수 있으나 인류애에 기반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는 프랑스혁명 정신을 세계에 뿌렸다.



프랑스혁명이 점화한 7월 14일을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읊었다. “7월 14일이다. 이날, 이 땅 위에 자유가 잠에서 깨어나 우레 속에서 웃었다. 이날, 민중은 한탄했다. 과거를, 이 검은 침탈자를, 파리는 멱살을 잡았다. 사악한 바스티유의. 이날, 운명은 판결을 내렸다. 프랑스에서 밤을 쫓아내라고, 그래서 영원은 빛나리니. 희망의 곁에서.” 프랑스는 해마다 이날이 되면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젖는다. 지난 2004년 열린 혁명기념일에는 영원한 원수 같았던 독일군을 초청해 파리의 엘리제 궁 앞을 행진하는 이벤트를 펼쳤다. 화해의 이벤트에는 프랑스가 공급한 혁명의 가치를 모든 국가가 공유한다는 자신감이 배어 있다.

프랑스 혁명 228주년. 나라 안팎을 생각한다. 화해의 마당으로까지 승화시켰다는 혁명기념일을 맞는 프랑스는 초비상 상태다. 지난 2016년 테러의 악몽 탓이다. 해안도시 니스에서 혁명기념일에 이슬람 과격분자로 추정되는 테러세력이 트럭을 돌진해 무려 85명이 죽고 200여 명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바로 그날 저녁 파리 에펠탑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가 ‘에펠탑이 흘리는 눈물 같았다’는 외신의 화면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올해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혁명기념일에 암살하려는 시도가 적발되기도 했다. 지구촌의 갈등이 그만큼 심화했다는 얘기다. 해결이나 예방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지나온 발자취와 현주소도 떠오른다. 많은 점에서 프랑스혁명 전야와 닮았다. 빈부 격차와 실업, 국민을 개, 돼지로 여기며 타락한 엘리트층까지 비슷하다. 궁금하다. 프랑스 시민들이 구체제를 무너뜨린 것처럼, 우리도 마침내 적폐 구조를 깰 수 있을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 1572년 8월 24일 파리에서의 신교도(위그노) 학살극. 위그노인 나바르 공국 왕자와 가톨릭 신자인 프랑스 공주의 결혼식 축제 엿새째인 이날은 마침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까지 겹쳐 파리 시내가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신·구교도가 함께 어울린 결혼 축하 파티에 섭정인 카트린 드 메디치 모후가 동원한 군대가 난입해 위그노 귀족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일주일간 이어진 학살로 위그노 귀족 4,000여 명이 죽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거상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이자 앙리 2세의 미망인,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모후인 카트린 드 메디치는 결혼식을 전후해 국왕이 위그노 세력과 가까워지자 위그노 지도부 척살령을 내렸다. 피에 흥분한 종교적 광기는 전국으로 번져 국왕의 중지 명령에도 10월까지 위그노 7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학살 소식이 전해진 로마에서는 ‘신의 은총’을 경배하는 축포가 터지고 학살을 기리는 성화(聖畵)와 메달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두고두고 후유증에 시달렸다. 프랑스를 빠져나간 위그노 30만여 명이 영국과 네덜란드·독일 등 신교국가들의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위그노의 대탈출은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령(1492년)과 함께 서양 경제사의 흐름을 바꾼 고급 인력 이동 사례로 꼽힌다. 프랑스가 식민지 경쟁에서 영국에 밀린 요인을 위그노 인력의 상실로 보는 시각도 있다. 스위스 정밀산업과 독일 지역의 무기 공업도 프랑스 위그노 길드가 집단 이주하며 번영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종교적 광기가 나라를 뒤흔든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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