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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운하의 전성시대가 열리다





1761년 7월 17일, 영국 중서부 석탄산지인 워슬리와 공업도시 맨체스터 남서부를 연결하는 ‘브리지워터 운하(Bridgewater Canal)’가 뚫렸다. 시공자는 워슬리 영주로 석탄 광산 소유주인 브리지워터 공작. 산업화로 맨체스터 지방의 석탄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한 그는 운하 건설에 온 힘을 쏟았다. 프랑스 미디 운하를 견학하고 의회를 설득해 1759년 관련법부터 만들었다. 공사는 당대의 토목 기술자 제임스 블린드리에게 맡겼다. 공작은 프랑스 미디운하처럼 갑문을 만들어 수면 높이가 다른 강과 연결할 생각이었다.

운하를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할 블린드리의 생각은 달랐다. 강이나 운하 위에 배가 다니는 다리, 즉 수로교(水路橋·aqueduct)를 건설해 강(江)과 인공 운하의 수차를 극복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공작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공사 시작 1년 반 만에 워슬리 탄광의 석탄을 실은 첫 배가 맨체스터로 떠났다. 운하의 이름은 공작의 영지 이름을 따서 브리지워터라고 불렀다. 길이 16㎞, 폭 5m에 불과한 운하였어도 수로교(운하교) 건설 등 난구간 때문에 공사비는 적지 않게 들었다. 16만 8,000 파운드. 노동자 임금 상승률을 기준으로 할 때 요즘 가치 2억 9,470만 파운드(4,337억원)에 해당하는 큰 돈을 공작 혼자서 댔다.



투자를 결심할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 사교계 최고 미인으로 꼽히던 3년 연상 미망인 해밀턴 백작 부인과 약혼이 깨진 직후 그는 오직 운하 건설에만 매달렸다. 재산의 절반 이상을 투입한 결과는 대박. 브리지워터 공작은 연간 5만~10만 파운드의 순수익을 거뒀다. 짐 마차보다 수송 효율이 10배 이상 높았던 덕분이다. 워슬리 탄광에서 캐낸 석탄은 이전까지 자연적인 경사를 활용한 마차 길(Wagon way)로 강까지 운반했지만 탄광 입구까지 배가 들어왔다. 운송 절차가 단순해지고 속도 역시 빨라졌다.

운하는 석탄의 공급자인 브리지워터 공작 뿐 아니라 석탄 수요자인 공장주들에게도 커다란 이익을 안겼다. 석탄의 대량 적시 공급으로 운하 완공 1년 뒤 소비지인 맨체스터의 석탄 가격이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덕분이다. 브리지워터 공작은 1768년 주변 도시로 운하를 확장해 길이를 46㎞로 늘렸다. 1791년 워슬리의 탄광은 석탄 10만 1,819t을 생산해 6만 1,431t을 운하로 날랐다. 운하 완성 이전보다 10배나 늘어난 규모다. 적시에 낮은 가격으로 연료를 거의 무한정 공급받은 맨체스터는 영국을 대표하는 산업지대로 떠올랐다. 브리지워터 운하 개통으로 촉발된 물류 인프라 혁신과 가격 경쟁력 배양이 맨체스터는 물론 영국의 산업 수준을 끌어올린 셈이다.

브리지워터 운하의 성공은 영국 전역의 운하 투자 바람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투자분석가 겸 역사가인 에드워드 챈슬러의 ‘금융투기의 역사(원제: Devil take the Hindmost)’에 따르면 브리지워터 운하 건설 이후 영국에서 운하 건설의 시대가 열렸다. 20년 동안 1,500㎞가 넘는 운하가 건설되고 운하회사들의 주가는 하늘로 치솟았다. 상품 값은 하락하고 운하 주변의 땅값이 뛰었다. 1790년대 초반에는 한꺼번에 운하 50개를 건설하는 법이 통과됐다. 1740년 이후 50년 동안 뚫린 운하 25개보다 두 배 많은 운하 굴착 공사가 일시에 시작된 것이다.

1792년 운하 투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신문마다 새로 건설될 운하와 운하 회사의 주가 소식이 자세하게 실렸다. 파국이 찾아온 것은 1793년부터. 프랑스혁명의 여파와 투기 과열의 후유증으로 투자 수익과 운하회사의 주가가 뚝 떨어졌다. 투기 열풍이 불기 이전까지 50% 이상을 자랑하던 운하에 대한 투자수익률은 19세기 들어 5%대로 주저 앉았다. 1825년께에는 운하회사 5곳 중의 하나는 배당을 실시하지 못할 수준으로 영업 환경이 나빠졌다. 수많은 운하가 생기는 통에 비슷한 노선이 많아지고 고객 확보 경쟁으로 수익성이 급락한 탓이다.

투자자들은 물동량이 늘어나는 한 수익률 저하가 일시적 현상일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1830년 맨체스터-리버풀간 철도가 개통된 이래 물류의 주역은 운하에서 철도로 바뀌었다. 운하회사들은 선박에 증기 엔진을 달아 철도와 경쟁하려 시도했으나 역부족.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영국의 내륙 운하는 수송 단가가 철도나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쌌다. 폭이 좁은 운하에서 운항하는 30t 안팎의 소형선박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속도에서 상대가 안됐다. 애써서 증기기관을 장착해봐야 강물의 저항 탓에 증기기관차의 속력을 따라갈 수 없었다.





나중에 뛰어든 투자자 중에는 쪽박을 찬 사람이 많았지만 선두주자인 브리지워터 공작은 대박을 만끽했다. 운하가 뚫린 후부터 연간 7만 5,000파운드 순수익이 떨어지고 얼마 안 지나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으로 불렸다. 그가 64세로 사망한 1803년 브리지워터 운하는 화물 33만 9,863t을 운송했다. 독신으로 사망한 그를 상속한 조카들이 운영할 때까지 이 회사는 전성기를 누렸다. 1836년 물동량은 98만 4,341t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여기가 한계. 철도에 밀려 화물 운송이 기능을 점차 잃었다.

1만t이 넘는 대형 화물선까지 운항이 가능한 맨체스터 선박 운하가 1894년 등장한 이후에는 관광용 운하로만 작동하고 있다. 브리지워터 운하는 약 70년 동안 반짝하며 전국적 운하 투기라는 부작용을 낳았지만 영국의 산간 오지까지 산업혁명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였다. 한창 때 6,400㎞에 달했던 영국 내륙 운하의 총연장은 약 4,000㎞로 줄었다. 20세기 중후반 이후 환경과 생태 보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인공 운하의 시설을 허물어 자연 하천으로 돌린 까닭이다. 영국 내륙 운하 중에서 화물 운반이 차지하는 비중은 0.1% 안팎. 거의 사라졌다.

요즘의 용도는 관광용이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운하 옆 도로를 달리는 자전거와 연계한 관광 상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아직도 운하가 살아 남아 관광객의 눈이라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이유는 유지 비용이 싸기 때문이다. 연중 고른 강수량과 수량이 풍부한 하천, 산이 많지 않은 지형이 운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갈수기와 장마철의 수량 차이인 하상계수(河狀系數)가 높은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의 하천 환경이 수많은 운하를 판 배경이었다. 그나마 19세기 후반 이후 운하 건설은 완전히 끊겼다. 오히려 허물고 있는 판에 21세기 한국에서는 운하를 염두에 둔 4대강 사업에 매달렸으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증기기관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내륙 수로의 동력원은 돛이나 말. 운하 옆에 설치된 도로를 따라 말이 다니며 배를 끌었다. 인건비가 싼 곳에서는 큰 배를 사람이 끄는 경우도 있었다.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의 대가인 일리야 레핀의 작품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이 유명하다. 운하 폭이 작은 영국에서는 말 한 두 마리가 배를 끄는 노역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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