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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 잊어버린 풍도 해전





1894년 7월 25일 오전 7시 20분, 아산만 부근 섬 풍도 해역.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에 긴장이 감돌았다. 청나라와 일본의 해군 함정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선전포고는 없었지만 조선으로 진주한 양국의 군대가 첨예하게 대치하던 상황. 거리가 3,000m로 좁혀진 7시 45분께 일본의 방호 순양함(순양함에 장갑을 덧댄 함정) 요시노(吉野)의 함포가 먼저 불을 뿜었다. 목표는 청나라의 방호 순양함 제원(濟遠). 선제공격을 제원이 먼저 했다는 주장도 있다.

누가 먼저 선제 포격을 가했는가를 놓고 중국과 일본의 주장이 엇갈리지만 확실한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청일전쟁이 시작됐다는 점. 공식적인 선전 포고 8월 1일보다 일주일 앞서 싸움에 들어갔다. 두 번째, 중국과 일본의 대비 태세가 전혀 달랐다. 일본은 아산만에 찾아든 청나라 북양함대의 이동 경로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아산에 증파할 육군 병력을 실은 수송함과 호위함 4척이 톈진 항을 출항할 때부터 첩자의 보고를 받았다. 방호 순양함 3척은 매복 상태였다.

반면 청나라 함대는 매복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아산에 주둔한 청나라 육군과 합류해 조선의 동학군과 싸우려 파견되는 것으로만 알았다. 더욱이 매복 중인 일본 함대가 ‘청국 군함을 발견하면 격침하라’는 지시까지 받은 줄은 상상도 못했다. 믿는 구석도 있었다. 청 함대에 영국 국적 상선 고승(高升)호가 포함된 이상, 설령 일본 군함과 마주쳐도 쉽사리 공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청나라가 4만 파운드를 내고 빌린 2,134t급 고승호에는 1,116명의 청국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위험도가 큰 목표부터 노렸다. 청이 1884년 독일에서 사들인 2,355t급 제원함을 1차 목표, 청의 국산 1호 함정인 1,000t급 철골목재함 광을(廣乙)함을 2차 목표로 삼았다. 일본 해군은 자신감에 넘쳤다. 객관적인 전력부터 청보다 우위였다. 영국이 건조한 함령 1년의 요시노함은 배수량 4,150t(당시는 함정의 무게, 즉 배수량이 중요했다. 배수량이 클수록 장갑이 두텁고 강력한 함포를 많이 장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속 23노트로 세계에서 가장 빨랐다.

요시노함과 같이 매복하던 방호순양함 나니와(浪速)는 3,650t에 시속 18.5노트였다. 덩치가 가장 작은 아키츠시마(秋津洲)도 3,150t, 시속 19노트로 청 함대의 가장 큰 함정보다 크고 빨랐다. 특히 아키츠시마는 일본 최초 국산 순양함의 4번 함으로 요코스카 공창에서 인수 받은 지 4개월도 안 된 최신 함정이었다. 객관적인 전력 우위를 점하고 정보가 빠르며 준비된 군대가 그렇지 못한 군대를 이기는 것은 당연지사. 집중적인 함포 사격을 얻어맞은 제원함이 꽁무니 뺐다. 제원함 함장은 항복하려고 백기를 걸었다가 부상으로 피투성이가 된 수병들의 항의를 받고 전속으로 도망쳐 간신히 전장을 빠져나왔다. 일본의 두 번째 목표인 광을함은 말이 순양함이지 포함 정도의 화력과 기동력, 방어력에 머물던 함정. 광을함은 나니와아 아키츠시마의 집중 포격을 받고 9시께 화약고 폭발로 침몰했다.(국산 함정을 적에게 넘겨주느니 자폭을 택했다는 설도 있다.)

청 함대의 남은 세력은 영국 국적 수송선 고승호와 보조운송선 조강(操江)호 . 고승호는 버티기에 들어갔다. 전투 능력이 없는 고승호에게 나니와의 함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대좌는 정선 명령을 내렸다. 영국인 골즈워디 선장이 배를 멈추려 했으나 청국 병사들의 거센 항의로 항진을 계속했다. 4시간의 대치와 교섭 끝에 영국인 선장을 비롯한 외국인 선원이 내리자마자 나니와는 함포와 어뢰를 쏘았다. 오후 1시 30분 고승호 격침. 조강호는 오후 2시에 나포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청일전쟁의 신호탄인 풍도 해전은 전투 개시 6시간 30여 분 만에 끝났지만 파장은 오래 갔다. 국제적으로 고승호 격침이 논란을 불렀다. 전시도 아니고 동학군과 싸우려 조선에 가는 제 3국 선박을 침몰한 행위에 영국을 비롯한 각국이 항의하고 나섰다. 도고 헤이하치로 대좌가 만국공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반박하면서 이 사건은 국제 해사 분쟁의 오랜 논쟁거리로 남았다. 분명한 것은 일본의 잔학행위. 고승호에 동승했던 독일인 교관 한네켄 콘스탄틴 폰은 고승호 격침 직후 탈출한 청국 수병들을 일본군이 구조하기는커녕 사살했다고 증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은 부인했으나 잔학성을 보인 사례로 남아 있다.





싱겁게 끝난 풍도 해전은 청일전쟁의 예고편이었다. 일본은 연전연승하며 전쟁 발발 8개월 17일 만에 청의 항복을 받아냈다.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로 청은 무수히 많은 것을 잃었다. 조선에 대한 종주권(시모노세키 조약 제 1조가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점을 확인한다는 내용이었다)을 잃고 타이완을 공식 할양했다. 요동도 넘겼다가 일본을 견제하려는 러시아 등의 3국 간섭 덕분에 되돌려 받았다. 통상의 특권을 내주고 청나라의 3년 치 예산, 일본 예산의 8년분에 해당하는 전쟁배상금 2억 량까지 물었다. 일본은 이 돈으로 금본위제도를 실시하고 자본주의화의 길을 걸었다.

청일전쟁으로 독립국이라고 재확인된 조선은 보다 당당해졌을까. 그렇지 않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전부터 철저하게 계산하고 수를 썼다. 풍도 해전 발발 이틀 전에 경복궁을 습격해 고종을 사실상 포로로 잡았다. 청일전쟁 도중에 중립을 표방한 조선과 고종을 윽박질러 조·일 맹약을 맺어 조선에게 병참 및 청국군 포로 감시 역할까지 맡겼다. 주지하듯이 ‘청으로부터 독립된 조선’은 일본의 속국화 과정을 밟았다. 청일전쟁에서 조선 민중은 피눈물을 삼켰다. 청과 일본이 남의 땅에서 전쟁을 치르며 기본적인 물자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탓에 조선은 물자를 뜯겼다. 인부와 우마, 마초와 땔감까지 징발에 시달렸다.

1893년 기록적인 흉년을 겪은 직후 청과 일본 군대에 식량을 징발 당해 조선의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다. 청일 양국군의 살인과 약탈, 부녀자 겁탈, 방화도 조선 백성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특히 일본보다 청국 군대의 행태가 심했다고 전해진다. 청국군의 시신이 방치돼 전염병도 돌았다. 마침 세계적인 콜레라 발병과 맞물려 조선인 수십만명이 돌림병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에 입었던 피해 뿐 아니다. 일제는 두고두고 조선을 괴롭히고 골수까지 빨아먹었다. 청일전쟁이 종결된지 1년 4개월 뒤, 일본 군대와 낭인들은 조선의 국모를 잔혹하게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풍도 해전으로 확인된 일본의 침략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풍도 해전 승리의 주역인 일본 해군 도고 대좌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을 맡아 승전한 뒤에 ‘서해에서는 풍도를, 동해에서는 독도를 차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 시네마현이 슬그머니 자기 영토라고 주장한 후유증은 지금도 한일 양국의 분쟁으로 남아 있다. 중국과 일본이 영토분쟁을 벌이는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문제도 청일전쟁으로부터 비롯됐다. 제국주의에 물들었던 국가가 적지 않지만 침략 과정에서 획득한 땅을 자기의 고유 영토라고 우기는 나라는 전 세계를 통틀어 일본밖에 없다.

123년 전 동북아시아 역사의 물줄기를 돌린 풍도의 앞바다는 평온하지만 언제 격랑이 몰아칠지 장담하기 어렵다. 중국의 경제적·군사적 발흥과 일본의 재무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중국과 일본은 역사를 분명하게 기억한다. 중국은 ‘갑오전쟁박물관’을 건립하고 풍도 전투와 청일전쟁의 치욕을 국민들에게 알린다. 강한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북양함대가 서태후를 비롯한 지도층의 부정부패로 인해 전력을 유지하지 못한 사례까지 자세하게 소개한다. 일본은 각급 교과서에서 풍도 전투를 가르친다. 망각한 곳은 오직 한 나라뿐이다. 대한민국에 풍도 전투를 기억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청을 망가뜨린 부정부패에서 오늘날의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지 생각해본다. 북양함대를 이끄는 이홍장을 견제하려고 오히려 일본에 패배하기를 원했다는 당시 청나라 지도층처럼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은 정치인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한국의 동의 없이도 유사시 자위대를 북한 지역에 파병할 수 있다는 일본과 덜컥 군사협정을 맺는 행태는 어떻게 납득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대주의 근성이 사라졌는지는 더욱 궁금하다. 동학군을 잡겠다고 덥석 외세를 끌어들여 망국을 재촉한 조선, ‘속국이면서도 독립국’이라고 주장해 열강의 비웃음을 샀던 조선의 사대주의와 우리는 뭐가 다른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정확하게는 북양함대가 아니라 북양수사(北洋水師)다. 청은 한 때 예산을 퍼부어 세계 8대 해군국에 끼일 정도로 해군력을 확충해 일본을 떨게 만들었으나 청일전쟁 발발 시점에서는 객관적인 전력에서 일본에 뒤졌다. 총 배수량이 4만 840t 대 3만 2,100t, 함포 수는 268문 대 195문으로 일본이 우세했다. 비슷한 수준인 어뢰발사관 수에서도 일본이 568대를 보유해 청의 556대보다 다소 많았다. 결정적으로 일본 함정들은 함령이 짧아 속도가 빨랐다. 북양함대의 평균 속도는 시속 10.5 노트인 반면, 일본 연합함대는 14.5 노트에 이르렀다. 북양함대의 자매함으로 아시아 최대 함정이던 독일제 정원과 진원도 처음에는 15노트를 냈지만 시간이 지나며 엔진 성능이 저하하며 속도 역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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