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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털루 학살…그래도 ‘저들은 적다’





1819년 8월 16일 영국 맨체스터시.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이날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영국 북서부 공업지대의 일반 시민과 노동자 6만 명이 도심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것이다. 목적은 시위. 정치 개혁과 임금 인상, 곡물 가격 하락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광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찼다. 미처 집회장에 들어오지 못한 3만 명은 광장 외곽을 돌았다. 수많은 사람을 광장에 불러들인 가장 큰 요인은 생활고. 경제사가 겸 투자이론가 윌리엄 번스타인의 역저 ‘부의 탄생’에 따르면 나폴레옹 전쟁(1797∼1815) 이후 생활 여건 악화에 대한 불만이 대규모 집회를 낳았다.

전쟁이 끝나면 생활이 나아지리라 기대했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렀다. 반숙련 기계공의 경우 60실링에 이르던 주급이 24달러로 떨어졌다. 하락 폭 60%! 가장 많았던 미숙련 섬유 노동자의 고통은 더 컸다. 주급 15실링이 4실링 6데니~5실링 수준으로 깎였다. 가뜩이나 적은 소득이 66~79% 나 줄었으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임금 하락은 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이 돌아와 산업예비군이 넘쳐나는 판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문제는 형평성. 전쟁 기간 중 크게 올랐던 곡물 가격은 오히려 더 올랐다.

보수 성향이 짙은 집권 토리(Tory)당이 지지 기반인 지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1815년 곡물법을 제정한 탓이다. 곡물법의 골자는 외국산 농산물 수입 금지. 국내산 밀 1쿼터(약 12.7㎏) 당 가격이 80실링을 밑돌 경우 밀의 수입을 금지시켰다. 나폴레옹 전쟁 전까지 46실링 수준이던 밀 1쿼터 가격이 전쟁 중 177실링으로 올랐다가 종전 후 60실링으로 떨어지자 대지주 출신이 많은 토리당은 고가격 보장 장치로 곡물법을 만들었다. 곡물법의 영향으로 노동자들이 먹고사는 비용은 두 배로 뛰었다.

정치 개혁 요구도 드셌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먼저 시작한 나라였으나 선거 제도는 봉건 시대의 잔재를 유지해 나폴레옹 전쟁 이전부터 개혁 요구가 드셌던 상황. 귀족들이 사실상 대를 이어 당선되는 부패 선거구가 658 의석 가운데 150석을 차지했다. 지주가 콘월은 인구 40만 명에 44개 의석을 확보했으나 인구 100만이 넘는 런던의 의석은 4개에 불과할 만큼 의석 분포도 지주 중심이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구실 삼아 정치 개혁 일정을 뒤로 미뤘던 토리당은 막상 전쟁이 끝나자 오리발을 내밀었다. 정치와 경제의 숨통이 막혀버린 상태에서 대규모 군중의 집회에 토리당은 강경책으로 맞섰다.

우선 집회 자체를 승인하지 않았다. 애초 8월 2일 열릴 예정이던 집회가 8월 9일로 한 차례 연기를 거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규모 집회에 긴장하기는 주최 측인 개혁주의자 연합도 마찬가지. ‘부랑자들이 프랑스처럼 혼란만 일으킨다’는 어용 언론의 공세에 ‘최대한 많은 인원이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모이되 최대한 자제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누구도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많은 인원이 모이는 만큼 지역별로 질서정연하게 입장하는 연습까지 했다. 토리당과 어용 언론은 이를 ‘군사 연습’이라며 대책을 세웠다. 왕립 포병대와 8개 보병 중대, 제 15 경기병대와 체서·맨체스터 의용기병대 1,500명을 주변에 깔았다.

집회를 주도한 급진주의자 헨리 헌트가 연단에 올라 특유의 연설로 시위대를 사로잡기 시작하자 치안관은 체포 명령을 내렸다. 군중으로 가득 찼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체포는 쉽지 않았다. 어렵게 헌트를 체포한 이후 군중과 기병대가 잠시 옥신각신하는 것 같더니 광장은 바로 피바다로 바뀌었다. 의용기병대가 칼을 빼 들고 질주했기 때문이다. 제지나 저항이 있으면 바로 칼을 휘두르고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의용기병대에 이어 정규군 경기병대도 무자비한 진압에 가세해 15명이 숨지고 700여 명이 칼을 맞았다. 영국의 군대는 왜 이리도 무자비하게 진압했을까. 진압의 주력인 의용기병대의 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용기병대는 민병 성격이었으나 여느 나라의 민병대와는 차원이 다른 군대였다. 무엇보다 구성원이 달랐다. 말을 소유하고 승마에 능한 자영농 이상 계급이었던 ‘요맨리(Yeomanry·鄕士)’가 의용기병대의 핵심. 규모만 작았을 뿐 지주라는 점에서 토리당과 이해관계가 같았던 요맨리들은 비상근 형식으로 근무하지만 돈만 주면 의용기병대 소위가 현역 중령 계급을 살 수도 있었다. 유복한 중류층 이상 계급으로 기득권 세력이던 요맨리들은 선거권을 요구하며 시위대를 ‘무리를 이뤄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불손 세력’으로 여겼다.

집회가 계속 연기되며 생업을 떠나 비상 소집된 요맨리들의 시위대에 대한 적대감도 커졌다. 일부 의병기병대는 진압작전 전에 술까지 마셨다. 노동자들을 깔보고 증오하던 의용기병대 소속 장병과 베드로 광장의 시위에 동참했던 노동자 일부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의 승리를 결정지은 워털루 전투에서 싸웠던 역전의 용사라는. 의용기병대의 칼을 맞아 병원에 옮겨졌으나 보름 뒤 죽은 직조공 ‘존 리’도 워털루 전투의 참전용사였다.



현장을 지켰던 기자들은 미증유의 사건에 ‘피털루의 학살(Peterloo Massacr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워털루(Waterloo) 전투의 용사들이 베드로 광장(Peter’s Field)에서 비무장 시민을 학살했음을 비꼬며 만들어낸 말이다. 이탈리아에 머물던 시인 퍼시 셸리(Percy Bysshe Shelly·1792-1822))는 피털루 학살 소식을 듣고는 시 ‘무질서의 가면((Masque of Anarchy)’을 썼다. 30세에 요절한 셸리의 이 작품은 그가 죽은 후 10년 후에서야 세상에 발표돼 사람들의 저항정신을 불러일으켰다. 그 마지막 행. ‘잠에서 깨어난 사자처럼, 일어나 우리의 용맹을 보여주자!/잠자는 동안 우리에게 씌워졌던 쇠사슬을/ 갈기 위의 물방울처럼 털어버리자!/우리는 많고, 저들은 적다!//’



피털루 학살에 바이런, 키츠 등도 작품을 남겼다. 영국의 정치 경제의 흐름을 바꿨다. 악법인 ‘단결금지법’이 1824년 폐지되고 참정권 획득운동에도 불이 붙었다. 1833년에는 공장법이 제정돼 최소한의 산업안전과 아동 노동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시작됐다. 곡물법도 폐지(1846년)돼 소비재와 식량 가격이 싸졌다. 정치운동 역시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 보다 결정적으로 영국 특유의 ‘노동계급’이 형성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에드워드 파머 톰슨(Edward Palmer Thompson)은 명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피털루 학살 이후 노동자 대중은 독학이 아니라 상호협력을 통해 지식을 증폭시켜나가기 시작했다고 봤다.

노동자들이 서점과 술집, 작업장, 교회뿐 아니라 야학과 일요학교, 각종 모임을 통해 신문을 공개적으로 읽고 스스로 정기 간행물을 만들어가며 세력을 넓혀 나갔다는 것이다. 1830년대 선거법 개정 운동 당시 영국에서 가장 유력하다는 ‘타임스’의 발행부수가 5,800부 미만이었으나 노동자 단체가 만드는 신문이나 정기간행물의 판매 부수는 최소한 5,000부~10만 부나 나갔다. 영국 노동자들의 자기 학습은 1900년대 노동당 설립을 낳았다. 1920대 중반 이후 영국의 정치는 노동당과 보수당 양당 체제로 내려오고 있다. 피털루 학살 약 100년 만에 시위대의 소망이 일부나마 이뤄진 셈이다.

앞으로 2년이면 피털루 학살로부터 200년을 맞건만 단순한 옛날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 피털루 광장에 모인 민중을 학살한 의용기병대와 우리는 무엇이 다를까. 한 줌의 기득권, 한 치만큼의 엘리트 의식으로 자신보다 재산이 적고 못 배운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사회 전체의 이익보다 진영의 이익을 보다 중시하지는 않는가. 자기 학습과 계발에 열중하는 노동이 우리에겐 얼마나 있는가. 한국 역사의 광장에는 언제나 근육이 붙을까. 셸리의 시처럼, 허위와 차별, 불의를, 사자가 갈기의 물방울 털어버리듯 떨쳐내고 싶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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