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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만든 ‘사쓰에이 3일 전쟁’



일본을 만든 ‘사쓰에이 3일 전쟁’
1863년 8월 17일, 가고시마에 함포 사격을 퍼부었던 영국 동양함대 소속 전함 7척이 뱃머리를 돌렸다. 일본 쓰시마번(薩摩藩)과 영국이 3일 동안 싸웠던 ‘사쓰에이(薩·英) 전쟁’이 끝난 순간이다. 사쓰마번은 약 260개 번(藩) 가운데 하나. 일개 지방 정권이 세계 최강이던 영국 해군과 왜 싸웠을까. 1년 전에 발생한 ‘나마무기사건(生麥事件)’ 탓이다. 영국에서는 ‘리차드슨 사건(the Richardson Affair)’으로 부르는 이 사건의 개요는 사쓰마번 사무라이들의 영국 무역상 찰리 리처드슨 살해.

사무라이들이 영국인을 죽인 이유는 간단하다. 불경죄. 가신(家臣)과 병사 400명을 대동한 사쓰마번 번주(藩主)의 행렬과 마주친 영국인들이 ‘불경하게도 말에서 내리지 않아 본보기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사쓰마번의 사무라이들은 위험을 깨닫고 도망가는 영국인 상인과 관광객 4명을 뒤쫓아 칼을 휘둘렀다. 영문도 모른 채 사무라이들의 습격을 받은 영국 관광객 4명 가운데 리처드슨은 칼을 맞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보름 뒤에 죽었다. 나머지 2명 역시 중상을 입었다. 홍일점이던 영국인 여성만 화를 면했다.
일본을 만든 ‘사쓰에이 3일 전쟁’
자국민의 피습에 격앙된 영국은 중앙정부인 막부(幕府)를 윽박질러 배상금 10만 파운드를 받아냈다. 영국은 사쓰마번에도 책임자 처벌과 함께 2만 5,000만 파운드를 배상하라고 다그쳤다. 대답은 ‘노(No)!’ 사쓰마가 단호하게 버티자 영국은 전함 8척과 병력 4,000여 명을 보냈다. 최후 교섭에서 양측의 입장이 확인된 직후인 1863년 8월 15일, 오전 10시께 영국은 가고시마만에 정박 중인 사쓰마번 소속 증기 군함 3척을 빼앗았다. 사쓰마번은 바로 선제 포격으로 응수했다. 본격적인 전투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일본을 만든 ‘사쓰에이 3일 전쟁’
영국은 나포한 사쓰마 군함을 불사르는 한편 탑재 함포 100여 문을 동원, 가고시마시 함포 사격에 나섰다. 사쓰마는 해안 포대 8곳의 각종 함포 85문으로 맞섰다. 이틀 동안 이어진 포격전에서 일본은 해안포대 1곳과 대포 8문, 탄약고 2개소가 파괴되고 가고시마시가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심혈을 기울여 마련한 근대식 공장시설 집성관과 주전소, 민가 350채가 불탔다. 사쓰마 번주의 저택과 가신들의 주택도 소실됐다. 인명 피해는 포대에서 전사자 1명, 부상자 9명이 발생하고 시내에서도 사상자 9명이 나왔다. 사쓰마가 민간인들을 미리 대피시킨 덕분에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사상자 수로 따지면 영국 함대의 피해가 더 컸다. 사망 20명에 부상 43명. 특히 2,371t급 기함 ‘유리아나스’함이 피폭 당해 함장과 부함장이 즉각 전사하고 함대 사령관도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기함뿐 아니라 중형함 2척도 대파되는 손실을 입었다. 영국 해군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전투에서, 더욱이 비유럽 군대와 포격전에서 이 같은 피해를 입은 것은 처음이다. 영국 함대는 결국 17일 탄약과 석탄이 떨어져 임시 모항으로 정한 요코스카로 돌아갔다. 사쓰마와 영국은 서로 승리를 주장하면서도 속으로 놀랐다.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해 반강제로 개항된 1853년 이래 사쓰마는 외세 배격론의 대표 주자였으나 사쓰에이 전쟁을 겪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문호를 개방한 막부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하며 내걸었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 중에서 ‘존왕’만 남고 ‘양이’는 사라졌다. 영국 함대의 위력을 절감한 사쓰마는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 배우기에 나섰다. 1865년 해외 진출을 금지한 막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청년 19명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 어느 지역보다 빨리 신문물을 익혔다. 사쓰마가 일본의 무수히 많은 지방 가운데 메이지 유신 초기 유달리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영국 함대의 피해가 예상보다 컸던 이유는 함교에 막부가 보낸 배상금을 쌓아두고 탄약을 갑판에 쌓아놓는 등 사쓰마를 얕잡아 봤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승리라고 주장했지만 일본이 ‘전쟁’으로 부르는 이 전투를 ‘가고시마 포격(Bombardment of Kagoshima)’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도 ‘사실상의 패전’이라는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대놓고 영국의 패전을 부각시켰다. 중요한 점은 영국이 제휴선을 막부 중심에서 웅번(雄藩·힘이 강한 지방정권)으로 분산시키기 시작했다는 점. 막부의 친 프랑스 노선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영국의 이런 정책은 결국 왕정복고를 앞당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양측은 싸움의 발단인 나마무기 사건 뒷수습에도 합의했다. 사쓰마가 막부에서 2만 5,000 파운드를 빌려 영국에 배상금을 내줬다. 책임자 처벌에 대해서는 ‘도망갔기에 찾을 수 없다’며 꽁꽁 숨겼고 영국 역시 알고도 속았다. 사쓰마와 더불어 외세 배격을 주창한 2대 웅번의 하나였던 조슈번(長州藩) 역시 개혁과 개방파로 변했다. 서양 함선과 대포를 들여와 걸핏하면 외국 군함을 포격하던 죠슈는 1864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4개국 연합함대와 시모노세키 전쟁을 겪은 후 더욱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일본을 만든 ‘사쓰에이 3일 전쟁’
막부와 대결하기 위한 사쓰마와 죠수의 비밀 동맹(삿초동맹)은 대정봉환(大政奉還·쇼군의 권력을 왕에게 반환·1867), 왕정복고(王政復古·1868), 폐번치현(廢藩置縣·지방 정부인 번을 폐지하고 현으로 대체·1871) 등으로 숨가쁘게 이어졌다. 외국과 전쟁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일본 근대화를 추진하는 동력으로 작용한 셈이다. 사쓰마와 조슈, 그리고 일본은 운이 좋았을까. 메이지 유신의 전개를 보면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사쓰마와 조슈는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는 점이다. 둘째는 근대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피를 흘렸다는 사실이다.

먼저 사쓰마와 조슈는 도자마 다이묘(外樣大名), 즉 토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의 패권을 놓고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1600) 이후에 도쿠가와 막부 휘하로 들어와 늘 감시와 차별을 받던 ‘찬밥’ 신세였다. 수도인 에도(江戶·도쿄)에서 멀리 떨어져 2세기 이상 절치부심하며 경제력을 기른 결과가 메이지 유신에 응축돼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사쓰마와 조슈 등이 주도한 개혁은 내부와 외부에서 숱한 위기를 맞았다. 보신전쟁(戊辰戰爭·1868~1869)과 세이난전쟁(西南戰爭·1877)은 물론 고비 때마다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다.

고 에드윈 라이샤워 하바드대학 교수(일본사)는 ‘일본 제국주의 흥망사’에서 근대 일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젊은이들의 꿈이라고 봤다. 하급 무사 출신이 대부분인 젊은 사무라이 그룹의 거대한 꿈에 허울만 남아 있던 국왕이 합류하며 일본이라는 근대 국가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사쓰에이 전쟁 역시 젊음이 익어갔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이 고비를 맞을 때마다 고향인 사쓰마보다 일본 국가를 먼저 생각했던 정치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러일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승리를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郎) 등이 당시 전쟁에서 해안포대 병사로 참전해 죽다 살아난 인물들이다.

사쓰마는 한국과 악연으로 얽혀 있다. 지역 언어가 한국어와 유사성이 많을 만큼 영향을 받은 한반도에는 해악을 끼쳐왔다. 임진왜란에서 용명을 떨쳤다는 시마즈 가문의 장수들부터 가고시마의 카미카제 자살 특공대 기지를 건설했으나 종전 후 행방이 묘연한 조선인 징용자까지, 옛 사쓰마번 지역에는 한국인의 한이 서려 있다. 사쓰마번이 경제력을 갖추는데도 조선인 도공들의 힘이 컸다. 오죽하면 도고 헤이하치로가 조선인 도공의 후손이라는 설까지 돌까. 사쓰마와 얽힌 애증이 풀렸으면 좋겠다. 오랜 세월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최상류층 자제가 아니어도 희망을 위해 매진하는 모습만큼은 정녕 부럽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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