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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워치]편의점, 직장인엔 단골 백반집…알바생엔 밥줄…자취생엔 얼굴 없는 하숙

●편의점은 '인생 옴니버스 극장'

서울 명륜동의 한 편의점에서 직원이 쓰레기통과 주류 냉장고를 정리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한 대학생이 홀로 테이블에 앉아 편의점 도시락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저마다 사연을 가진 인간 군상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 영화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2012년 개봉)’는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 진출했던 작품이다. 이 영화는 편의점에서 시작해 편의점에서 끝나는 스토리다. 오전10시부터 12시간 동안 대학생, 자퇴생, 인디 뮤지션, 취업 준비생, 레즈비언, 탈북자, 중년의 실직자로 구성된 아르바이트생과 손님들, 그리고 이들의 고용주인 사장의 이야기를 엮어낸다. 무미건조한 표정과 똑같은 조끼로 획일화된 아르바이트생들은 영화 속으로 와서야 저마다 품고 있던 사연을 뿜어낸다. 편의점은 토익 공부를 하며 정규직장을 준비하는 일종의 정류장이고, 달콤한 사랑을 만나게 해준 로맨스 공간이며, 사회의 냉혹함을 처음 느낀 곳이다. 간간이 보이는 시계는 옴니버스로 구성된 이야기를 구분하기도 하고 시급제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의 처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2017년 우리나라의 편의점도 이와 똑같다. 허겁지겁 출근하는 와중에도 아침 식사를 거르기 싫은 직장인들에게 편의점은 또 하나의 단골 백반집이 되고 점심시간 군것질거리를 찾아 우르르 몰려오는 여고생들에게는 옛날 학교 앞 떡볶이집과 같은 작은 수다 방이자 미래에 추억으로 남을 장소가 된다.

또 설거지조차 귀찮아 저녁 때마다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자취 학생에게는 얼굴 없는 하숙집 아줌마, 밤에 담배를 사러 오는 중년 남성에게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상의 종점이기도 하다. 편의점의 타임라인에 사람들의 24시간, 365일, 나아가 인생과 우리 사회상 전부가 스미는 셈이다.

GS25의 한 관계자는 “편의점은 가맹점마다 근무 형태, 고객 분포 등이 너무 천차만별이어서 한마디로 그들의 일상을 정의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준영 상명대 소비자주거학과 교수는 “편의점에서 나트륨 함량이 높은 도시락을 자주 취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안 좋게 볼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다행히 편의점이라도 있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08:00 - 부산이 고향인 李 대리, 아침식사는 삼각김밥



버스와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쏟아지는 출근길 피크타임의 서울 광화문의 한 편의점. 오전7시30분에 출근해 새벽 아르바이트와 교대한 경영주 김성규(57·가명)씨의 손놀림이 점점 더 빨라진다. 8시 전후는 편의점 냉장 코너에 한가득 쌓였던 샌드위치·김밥·삼각김밥·우유 등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시간대다. 5년 전 20년 이상 다니던 회사를 퇴직한 김씨는 사무직이었기에 달리 기술이 없었다. 생활비만 충당하면 된다는 생각에 시작한 편의점의 시간표가 어느덧 그의 생체리듬과 같아졌다.

김씨의 손이 바빠지는 것은 세종로에 있는 회사로 출퇴근하는 3년 차 직장인 이민준(32·가명)씨 같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씨는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이 편의점을 매일 아침 찾는 인물이다. 부산이 고향인 이씨는 서울 보문동에서 혼자 자취를 하기 때문에 집에서 아침을 챙겨줄 사람이 없다. 회사에 들어가기 직전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나 삼각김밥·커피 등을 사서 3분 내로 먹는 게 그의 하루의 시작이 됐다. 어머니가 전화로 “아침은 잘 챙겨 먹느냐”며 물을 때마다 “매일 먹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답한다. 하지만 차마 편의점 음식을 먹는다고 말하지는 못하고 집에서 차려 먹는 척하기 일쑤다.

10:00 - “휴…” 물품 발주 마친 점주는 한숨 돌려



서울 시내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한지석(46·가명)씨는 오전9시50분 본사에 필요한 물품 발주를 마친 뒤 한숨을 돌린다. 일과 중 그나마 한가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11시부터는 아침에 동난 도시락을 다시 받아 매대를 채워야 한다.

이 시간대에는 중간중간 인근 빌딩에서 편의점 커피를 사러 오는 여직원들이 그나마 많다. 특히 김성신(31·가명)씨는 벌써 2년째 편의점 커피를 매일 마시러 오는 손님이다. 수도권 집값을 고려하면 최대한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한 김씨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4,000~5,000원씩 하는 커피 가격이 아까워 편의점을 곧잘 찾는다. 단돈 1,000원이면 원두커피를 얼마든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모두 아껴도 커피만은 포기할 수 없는 그녀에게 편의점만큼 부담 없는 곳은 없다. 김씨는 “요즘에는 편의점 커피도 품질이 매우 좋아져 커피숍 못지않다”며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워낙 좋다 보니 일을 하다 직장 동료와 자주 마신다”고 말했다.

12:00 - 양복 입은채 컵라면·도시락…바쁜 직장인 북적



서울 명동의 한 편의점. 낮 11시30분만 되면 이곳은 근처에서 가장 잘되는 식당처럼 발 디딜 곳이 없어진다. 앉아서 취식할 수 있는 공간을 넓게 만들었더니 양복을 입은 채로 컵라면·도시락·김밥 등을 취식하는 직장인들로 매일 같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일이 너무 바쁘거나, 전날 과음을 했거나, 직장 상사·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기 불편할 때마다 가끔 이 편의점을 찾는 정모(33)씨는 원하는 도시락이 없을 때마다 난감하다. 일찍 오지 않으면 인기 있는 도시락과 김밥은 이미 다 팔린 뒤이기 때문에 최대한 12시 전에는 이곳을 찾아야 한다는 게 정씨의 지론이다.

앉을 자리를 당장 찾지 못하는 건 개의치 않는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3분만 기다리면 반드시 자리는 난다. 그 역시 5~10분 이상 자리를 지켜본 적이 없다. 고된 업무와 육아에 지친 그는 얼른 밥을 먹고 사무실에서 낮잠이라도 청하려는 게 편의점을 찾는 이유기 때문이다.



워킹맘 박희진(42·가명)씨는 바쁜 시간을 쪼개 대학원 생활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퇴근길 교통체증을 뚫고 학교에 도착하면 언제나 수업시간이 코앞이다. 식사는 항상 편의점 도시락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는 “식당에서 혼자 먹는 것보다 덜 외롭고 편의점에서 밥 먹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열심히 살고 있다’는 동지 의식까지 느낀다”고 말했다.

18:00 - 수업·일 끝난 자취생·근로자, 만찬 공간으로



대학생 정모(24)씨는 매일 수업이 끝나면 자취 집 인근 편의점으로 출근한다. 사장님과 교대하는 오후6시부터 밤 11시까지가 그의 근무시간이다. 지방에 계시는 부모님이 학비와 생활비 일부를 대어 주시지만 연애를 하려니 본인도 돈을 조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자취 집에서 같이 사는 누나는 그를 ‘편돌이’라고 놀린다.

오후6~8시에는 그와 같은 자취 학생들이 도시락을 먹으러 많이 찾는다. 자취촌이다 보니 일용직으로 보이는 40~60대 중년 남성도 많다. 얼마 전 집을 떠나 아내와 별거 중인 양정훈(66·가명)씨는 이 편의점의 VIP 손님이나 마찬가지다. 양씨는 고시원에서 간단한 소일거리와 국민연금으로 산다. 그는 매일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과자·소주·맥주 등을 사 들고 방에 들어가 9시면 잠에 든다.

22:00 - 1만원으로 맥주 4캔 사들고 야근 피로 꿀꺽꿀꺽



직장인 이모(47)씨는 일주일에 3번 꼴로 야근을 한 뒤 퇴근길에 꼭 편의점을 들른다. 편의점 앞에 놓인 간이 탁자에서 4캔에 1만원 하는 수입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다. 홀로 앉아 맥주를 마시다 보면 어느새 동료가 하나 둘 늘어난다. 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피곤함이 가득 배어 있다. 이씨는 “나에게 편의점은 퇴근 후 하루의 고달픈 삶을 달래는 장소”라며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보다 이것이 더 편하다”고 말했다.

이 시간은 청소년들이 무리 지어 편의점으로 몰려드는 시간대이기도 하다. 인근 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온 중고등학교 학생들이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김밥과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서로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낸다.

불쑥 편의점을 찾는 택시기사들도 많다. 택시기사들은 보통 도시락을 구입한 뒤 직원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은 뒤 볼일을 해결한다. 직원 박모씨는 “택시기사 등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편의점은 식사 장소인 동시에 화장실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00:00 - 중년, 하루 마치며 뻐끔…알바생은 매대 정리 시작



남편과 함께 경기 일산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강모(63)씨의 출근 시간은 저녁 10시다. 직원 비용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낮에는 남편이, 밤에는 그녀가 근무를 서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독하다고 손가락질하기도 하지만 남편의 퇴직금을 쏟아부은 가게라서 마음 편히 운영할 수는 없다.

주택가라서 밤 12시가 되면 손님은 그나마 뜸하다. 그래도 야식을 먹으러 오는 젊은이들, 다음날을 위해 두둑하게 담배 한 갑을 챙기러 오는 남성 손님은 있다.

구모(35)씨는 밤 12시에 편의점을 단골로 찾는 손님이다. 집안일과 육아와 씨름하다 이제 갓 돌 지난 아이를 재우고 이른바 ‘육퇴(육아퇴근)’를 하고 나면 어김없이 편의점을 찾는다. 아내 타박에 퇴근 이후부터 아이한테 해가 될까 봐 피우지 못한 담배를 그제야 하염없이 몰아 피우고 아이스크림 등 그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 먹는다. 사소한 습관이지만 이제 그에게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종의 의식이 됐다.

서울 강남 유흥가에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박정준(26·가명)씨의 주 고객은 취객이다. 손님들은 주로 담배와 숙취 음료 등을 사 간다. 그에게 반말을 건네는 사람도 많고 혀가 꼬여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의 주 업무는 따로 있다. 새벽 2~3시께 당일 아침 손님을 위해 잔뜩 들어오는 김밥·도시락·과자를 매대에 정리하는 업무다. 그의 손이 하루의 도돌이표를 찍는 셈이다. 박씨는 “야간 일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무례한 손님이 많은 편”이라며 “그래도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야간밖에 안 되는데다 손님이 낮보다 적어 괜찮다”고 말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사진=이호재·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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