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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위한 행진곡…세우타 점령

금을 위한 행진곡…세우타 점령

금을 위한 행진곡…세우타 점령
1415년 8월 22일, 아프리카 서북부 세우타(Ceuta). 지브롤터와 마주 보는 아프리카 북단의 이슬람 항구 도시인 세우타가 포르투갈 수중에 떨어졌다. 국왕 동 주앙 1세의 친정 아래 각종 선박 238척과 4만 5,000여 병력은 우여곡절 끝에 교역과 황금의 도시 세우타를 손에 넣었다. 인구라야 불과 100만 명 남짓한 유럽의 작고 가난한 나라, 포르투갈의 세우타 점령은 세계사의 흐름을 갈랐다. 대항해시대와 지리상의 발견, 식민지 건설 경쟁이 봇물처럼 터졌다. 지구촌은 서구가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포르투갈이 국력을 긁어모아 대규모 원정을 감행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첫째,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호전적 에너지가 들끓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정치적 변혁기를 맞고 있었다. 레콘키스타(Reconquista·이슬람이 점령한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자는 기독교 국가들의 반격)와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포르투갈 왕국을 선포(1139)한 지 244년 만인 1383년, 아폰시나 왕조의 적통이 끊겼다. 아비스(Avis) 기사단장이던 동 주앙이 국왕에 추대됐으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는 이웃 카스티야와 전쟁을 치렀다. 포르투갈은 간신히 독립을 얻었으나 여기저기서 요구가 터져 나왔다.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호전성이 굳어진 귀족과 기사집단은 새로운 전쟁을 원했다.

두 번째는 종교적 열망. 아프리카 또는 아시아에 있다는 전설 속의 기독교 왕국을 찾아내 이슬람을 협공할 요량이었다. 원정 보고를 받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 12세는 ‘포르투갈은 십자군’이라며 기독교 국가들의 지원과 참여를 독려했다. 세 번째는 경제적 이유. 동 주앙의 집권을 도왔던 상인 세력들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독점하는 무역에 진출하자며 귀족들에게 세우타 점령을 부추겼다. 세우타가 10세기부터 순도 높은 금화를 주조한 금의 산지라는 점도 포르투갈의 구미를 당겼다.

정작 원정은 쉽지 않았다. 리스본을 출항한 대규모 원정 함대는 이틀 뒤부터 난기류와 급류에 휘말려 지브롤터 해협 부근에서 보름여를 맴돌았다. 간신히 세우타 앞바다에 당도했을 때도 풍랑으로 선발대와 후발대가 갈라졌다. 최종 공격을 앞두고도 폭풍우가 몰아쳐 원정 함대는 카스티야의 항구로 피신해 때를 기다렸다. 카스티야는 포르투갈과 사이가 안 좋았으나 교황이 인정한 십자군 원정함대에게 정박을 허용하고 물과 식량까지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정함대는 리스본 출항 26일이 지난 8월 21일에서야 세우타 공략에 들어갔다.

세우타를 수비하는 이슬람군은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22일 손을 들었다. 중대한 실수도 저질렀다. 일주일 전 세우타 앞바다에 도달했던 포르투갈 함대가 풍랑으로 되돌아갈 때, 상륙이 없을 것으로 보고 증원 병력을 철수시켰던 것. 포르투갈은 풍요롭고 수준 높은 세우타에 놀랐다. 유럽 각국은 더 놀랐다. 사실상 실패로 끝난 십자군 원정을 명분으로 변방의 소국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북단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조차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시절, 바다 넘어 세우타를 점령한 포르투갈은 점령 직후부터 세우타 금화를 그대로 본떠 포르투갈 금화를 찍어냈다.

세우타 점령은 스타도 낳았다. 상륙전 초반 부상에도 공격을 주도한 21세의 엔히크 왕자는 용명이 알려지며 유럽 각국으로부터 군대를 맡아달라는 청을 받았다. 심지어 최대의 가상 적국인 카스티야마저 이슬람 세력과 싸움에 엔히크를 불렀다. 엔히크의 선택은 바다. 각국의 초청과 청혼을 마다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바다를 개척할 사람을 모으고 자본을 댔다. 대양 항해에 적합한 카라벨선도 엔히크 왕자의 사람들을 통해 퍼졌다. 왕위에 오른 적은 없지만 ‘항해왕’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노예 무역과 노동 착취로 아프리카를 수탈한 원조라는 비판에도 그는 여전히 대항해시대의 개척자로 기억된다.

세우타를 기반으로 지중해와 아프라카 무역을 장악하겠다는 포르투갈의 계산은 맞아떨어졌을까. 그렇지 않다. 실패와 반전이 뒤따랐다. 아프리카의 무역 주도권을 갖고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려면 주요 도시를 더 점령해야 한다는 생각에 1437년 탕헤르 공략에 나섰으나 왕자가 포로로 잡히는 등 처절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엔히크 왕자가 키운 항해 세력. 포르투갈은 ‘바닷물이 펄펄 끓는 죽음의 장소’라고 알려졌던 적도 부근의 대양을 지나 엔히크 사망 이후인 1498년에는 희망봉을 찾아냈다. 인도로 가는 뱃길이 열리고 스페인과 네덜란드·영국의 경쟁 속에 유럽은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유럽이 포르투갈에 주목한 것은 금(金) 때문이었다. 포르투갈은 서유럽에서는 거의 끊어진 금화의 생산을 이어나가며 각국의 탐험 의욕을 북돋았다. 포르투갈은 육지로 면(面)을 넓히는 전략에는 실패(탕헤르 공략 실패)했어도 바다로 선(線)을 늘리는 전략에는 성공하며 부를 늘렸다. 고 피에르 발라르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소 교수가 남긴 ‘금과 화폐의 역사’에 따르면 엔히크 생전과 사후 포르투갈 탐험대의 행로는 금의 탐사 및 확보 경로와 일치한다. 15세 말과 16세기 초반 매년 포르투갈에 유입되는 400~900㎏의 순금은 각국의 부러움을 사고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까지 자극했다. 포르투갈의 세우타 점령은 서구 세계가 금을 찾으려는 행진곡의 서곡이었던 셈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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