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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445년 전 여름, 프랑스 파리. 긴장 속에서도 화해와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았다. 긴장 요인은 종교. 가톨릭 공주와 위그노(Huguenot·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 방계 왕자 간 혼인에 불만을 품은 귀족이 적지 않았다. 긴장 속에 열렸어도 국혼(國婚)과 연일 이어지는 축하 파티에서 신·구교도 귀족끼리 어울려 먹고 마시고 춤췄다. 숱한 반대를 물리치고 성사된 국혼의 목적은 바로 종파 간 화해. 성 바르톨로메오(바돌로매) 축일까지 다가오면서 파리는 겹경사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파리의 하늘에 축복이 아니라 죽음의 거대한 그림자가 깃들었다. 1572년 8월 24일 새벽 4시,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가톨릭 군대가 닥치는 대로 위그노 귀족을 죽였다. 결혼식에 참석하러 대거 파리를 방문한 위그노 귀족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임을 당했다. 하루 뒤인 25일 국왕 샤를 9세가 내린 중지 명령도 소용없었다. 일주일 동안 학살이 이어지며 위그노 귀족과 그 가족 3,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파리의 위그노 소탕은 지방으로 퍼져 10월 초순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위그노 2만~7만 명이 죽었다.

종교전쟁으로 얼룩진 16세기 유럽에서도 가장 잔혹했던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종교적 적대감과 광기. 보다 자세히 보면 정치적 암투와 계산이 낳은 참극이었다. 먼저 국혼의 주인공인 두 남녀를 보자. 나바르 공국의 왕 앙리와 프랑스 왕실 마르게이트 공주는 20세 동갑으로 6촌 간. 어릴 때 루브르 궁에서 같이 자랐다. 섭정을 맡고 있던 모후 카트린 메디치의 강권으로 결혼하게 됐으나 공주는 앙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애인이 있었다. 프랑스의 실권자인 기즈공작 앙리(23세)와 연인 관계였다.

카트린 모후가 가톨릭이면서 공주의 연인인 기즈공작 앙리를 마다하고 나바르의 앙리를 사위로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견제. 넓은 영지와 막강한 재력으로 바탕으로 대를 이어 국왕 이상의 권력을 뽐내는 기즈 가문을 견제하려고 ‘가톨릭의 배신자’인 신교도 앙리를 골랐다. 결혼식 당일부터 둘은 삐걱거렸다. 학살 6일 전인 18일의 성대한 결혼식에서 신랑은 가톨릭 미사 형식으로 진행되는 혼배성사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공주의 오빠 앙주 공작(훗날 앙리 3세)이 신랑 대역을 맡았다.

위그노 왕자가 불참한 혼배성사를 지켜보며 격앙한 가톨릭 강경파 귀족들은 결국 22일 일을 벌였다. 위그노 귀족의 군사적 지도자인 콜리니 제독 저격에 나선 것. 암살 지령을 내린 당사자는 모후 카트린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목적은 역시 ‘견제’에 있었다. 아들(샤를 9세)이 콜로니 제독과 지나치게 가까워지고 있다고 판단해 제거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국왕을 알현하고 돌아가는 도중에 콜리니 제독은 팔에 총탄 두 발을 맞았다. 국왕이 병문안 온 자리에서 위그노 귀족들은 국왕 샤를 9세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고 전해진다. 곧 가톨릭 귀족 사회에 위그노 귀족들이 보복을 위해 파리를 공격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23일 밤, 국왕과 카트린 모후, 기즈공작은 이 기회에 위그노 핵심 세력을 처단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가톨릭 군대는 24일 새벽을 틈타 일제 기습을 펼쳤다. 저격에도 살아남았던 콜리니 제독은 총상과 사지 절단, 사체 훼손 등을 당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센 강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국왕은 당초 위그노 핵심 지도자 몇몇을 살해 또는 체포할 생각이었으나 대규모 참극으로 번진 이유가 있다. 민병대를 비롯한 파리 시민들이 가세했던 탓이다. 아무리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겨도 주변의 누구 하나라도 잘못하면 하늘의 벌을 받는다는 공동체 신앙 의식을 갖고 있던 파리 시민들은 신앙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가톨릭 주류 세계는 ‘이단자’인 위그노 척살을 반겼다. 학살 소식을 접한 로마에서는 난리가 났다. 신의 은총을 경배하는 축포가 터지고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살을 기리는 성화(聖畵)를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그레고리력 보급 교황)는 ‘위그노의 절멸을 찬양’하는 기념 메달까지 만들었다. 신교도 네덜란드 반란군과 싸우던 스페인도 반색했다. ‘그리스도교 세계에 뚜렷한 은혜가 될 행동을 환영한다’며 프랑스 왕 샤를 9세야말로 ‘가장 기독교도다운 왕’이라고 추켜세웠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프랑스는 3차 위그노 전쟁으로 빠져들었다. 학살의 와중에서 가톨릭으로 거짓 개종한 나바르의 앙리 왕자가 훗날 앙리 4세로 등극해 종교적 차별을 최소화한 ‘낭트 칙령’을 반포할 때까지 프랑스는 8차례에 걸쳐 36년 동안 종교 내전을 겪었다. 학살 주역들의 끝도 좋지 않았다. 샤를 9세는 바르톨로메오의 학살 21개월 후인 1574년 24세 젊은 나이로 죽었다. 기즈공작 앙리도 날로 강성해졌으나 형에 이어 등극한 앙리 3세가 보낸 자객에게 목숨을 잃었다. 앙리 3세는 기즈 공작을 죽인 뒤 1년 뒤에 가톨릭 열혈주의자의 손에 암살 당했다. 기즈공작 앙리나 앙리 3세나 모두 38살로 생을 마쳤다.

결국 프랑스 왕위는 나바르의 앙리가 차지(앙리 4세)했다. 물고 물리는 ‘세 앙리 간의 권력 싸움(War of the Three Henries)’도 바르톨로메오 학살의 피해자였던 앙리 4세의 승리로 끝났다. 앙리 4세는 끈질긴 소송 끝에 1599년 마르게이트 왕후와 애정 없는 형식적 결혼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혼하되 마르게이트의 왕후 지위는 유지한다는 조건이었다. 결혼 기간 중 둘 다 다른 이성과 수많은 염문을 뿌렸다. 학살극의 주범으로 지목받는 카트린 모후는 아들 앙리 3세가 죽기 직전 69세로 사망했다. 앙리 4세는 마르게이트와 이혼 뒤 22살 아래이며 카트린의 조카뻘인 마리 메디치를 새로운 왕후로 들였다. 카트린은 앙리 4세에게 장모이며 처고모였던 셈이다.

앙리 4세 역시 가톨릭교도의 손에 암살당하며 57세로 생을 마감했다. 첫 번째 아내인 마르게이트는 앙리 4세 사망 5년 뒤 자연사했다. 앙리 4세는 명재상 ‘쉴리’를 등용, 경제 부흥정책을 펼쳐 프랑스를 일으켜 세웠다. 끝까지 위그노 신앙심을 지켰으면서도 국가의 분열을 막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며 ‘파리는 종교를 바꾸어서라도 취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말을 남겼다. 지도자는 종교보다 국가를 우선해야 한다는 전형을 보인 앙리 4세는 오늘날까지 프랑스 국민들에게 ‘위대한 앙리’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앙리 4세의 관용 정책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앙리 4세의 손자인 루이 14세는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위그노 신앙을 금지하는 퐁텐블로 칙령을 내려 무려 30만 명의 위그노가 고향을 등지고 망명길에 올랐다. 부르주아와 장인, 상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위그노들은 프랑스를 빠져나가 영국과 네덜란드·독일 등 신교국가들에 터를 잡았다. 위그노의 대탈출(Huguenot Diaspora)은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령(1492)과 함께 서양 경제사의 흐름을 바꾼 고급 인력 이동 사례로 꼽힌다. 신교 지역이 많던 프로이센 지역의 산업과 기술이 특히 위그노 장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프랑스의 종교는 잔혹한 학살로 소기의 성과를 이뤘는지도 모른다. 바르톨로메오 학살 이전 전체 국민의 약 20%를 차지했던 위그노는 다시는 그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유럽 제 1의 강대국이었던 프랑스는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 다시는 그 위치를 회복하지 못했다. 바르톨로메오 학살의 변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사회적 소수를 상대하는 데 관용과 타협보다 폭력으로 배제하는 게 더 빠르고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이제는 없다고 장담할 수 있나. 압제와 억울한 죽음을 보고 손뼉 치는 광기는 사라졌을까. 온라인에서는 더 하다. 비아냥과 근거 없는 비난이 판치는 세상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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