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특파원 칼럼] 청와대에 ‘노(No)’라고 할 수 있는 기업인

손철 뉴욕특파원





예측하기 힘든 성정과 변덕에 극우적 편협함을 불사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반이 느리지만 조금씩 무너져 가는 듯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숱한 거짓말과 말 바꾸기에도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30%대 지지율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지난 8월12일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일어난 ‘백인우월주의’ 집회 이후 균열은 심상치 않다. 특검 수사가 한창인 러시아와 트럼프 선거캠프 간 내통 의혹이 백악관을 집어삼킬 듯해도 ‘탄핵’에는 신중했던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샬러츠빌 집회에 비판은커녕 양비론으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물타기를 하자 탄핵을 거론했다. 미국의 기본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가볍게 여기는 대통령이라면 자리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는 예측을 한 것인데 먼저 촛불을 들고 일어선 이들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세계 3대 제약사 중 하나인 머크의 케네스 프레지어 CEO는 트럼프 대통령이 백인우월주의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자 ‘개인적 양심’을 걸고 대통령 직속 자문위원회에서 사퇴했다. 흑인 경영자인 프레지어의 뒤를 이어 인텔의 브라이언 크러재니치 CEO와 유명 스포츠용품업체 언더아머의 케빈 프랭크 대표도 백악관에 사표를 던졌다. 공화당의 주요 후원자인 기업인들이 잇따라 등을 돌리고 양심선언이 봇물이 될 조짐에 트럼프 대통령은 아예 자문위를 해체했다. 재벌 출신 대통령이 기업인들의 카랑카랑한 쓴소리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CEO들의 ‘트럼프 보이콧’은 이후 문화 예술계와 종교계로까지 확산됐으니 영향력을 짐작할 만하다.

대기업 CEO가 살아 있는 권력에 대놓고 ‘노(no)’라고 말했다는 소식은 국내에서도 적잖은 관심을 모았다.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에 대거 연루돼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국내 주요 대기업 오너와 CEO들의 상황이 오버랩 된 측면도 있다. 왜 한국에서는 고등 교육을 섭렵하고 엄청난 연봉 등의 혜택을 받는 재계 리더들이 소신 있는 목소리로 정치·사회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느냐는 지적도 제기됐다.



사실 자본주의의 심장부이자 선거가 ‘머니게임’으로 불리는 미국에서도 기업 CEO가 권좌에 오른 막강 대통령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다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역사가 우리보다 3~4배는 긴 미국에서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정부 방침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기업이 세무조사를 받거나 기업인이 검경의 칼날에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일은 거의 없다. 정치·사회 시스템과 문화가 그런 권력을 용납하지도 않지만 백악관 참모들은 물론 고위공무원들이 부당 개입을 할 엄두를 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기업인에게 가장 무서운 일이 “청와대에 찍혔다”는 구설이다. 그런 점에서 법원이 1심 재판에서 이 부회장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1970·1980년대나 유행하던 ‘정경유착’을 유효한 문제점으로 제기한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과거 정치권력이 재벌 위에 군림하고 기업은 권력의 시혜를 기대했던 정경유착의 어두운 시절을 지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기업은 권력의 딴지가 걱정스럽기는 해도 정치권력을 통해 기업 경쟁력을 높이거나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애플·구글 등 초일류 기업과 전 세계를 무대로 벌어지는 경쟁에서 그런 특혜를 줄 수 있는 정부는 없다. 특검은 또 삼성이 최순실을 지원하면 청와대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지원할 것으로 보고 이를 ‘묵시적 청탁’이라고 하지만 25년간 삼성에 몸담았던 이 부회장이 가장 원했던 것은 그저 부조리한 권력이 회사에 해만 끼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고 본다.

일부 지각 있는 미국 기업인들의 소신과 결단이 부러우면서도 삼성과 이 부회장의 재판을 주목하는 것은 과거의 편견에 갇히지 말고 한국 기업의 현실을 안팎으로 정직하게 인정할 때 우리 기업인도 존경받을 수 있는 토양이 가꿔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runiron@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