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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영국의 해상 퍽치기





조선이 임진왜란의 전화(戰禍)에 휩싸인 1592년 여름, 대서양에서 사상 최대의 해상 약탈이 일어났다. 영국이 동양의 진귀한 보물과 향신료를 가득 실은 포르투갈 보물선을 턴 것이다. 전함 9척과 보조함선 7척으로 편성된 영국 함대가 다트머스 항구를 출항한 시기가 1592년 5월 초. 석 달 동안 영국함대는 태풍에 3척을 잃으면서도 서인도 제도에서 짭짤한 전과를 올렸다. 대형 선박 위주인 스페인의 전함 1척을 나포하고 1척을 불태웠다. 정작 영국 함대는 만족하지 않았다. 출항 목적이 ‘스페인 보물선 털이’였으니까.

스페인 전함을 나포하면서 7,000파운드가량의 은과 보물을 챙겼으나 성에 안 찼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가려던 7월 말,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제도 코로보 섬 부근에서 대형 선박을 만났다. 태풍을 피해 인근 섬에 정박 후 떠나려는 포르투갈 선박 ‘산타 크루즈호’였다. 산타 크루즈는 배수량 800t급으로 공격 측인 영국 전함 3척보다 컸지만, 출항을 앞두고 급습을 당해 불타고 말았다. 영국 함대는 보물을 눈앞에서 놓친 대신 포로 심문을 통해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보름 내에 포르투갈의 대형 보물선이 당도한다’는 것. 영국 함대는 매복에 들어갔다.

비슷한 시각, 동군연합(同君聯合)인 스페인·포르투갈은 ‘서인도제도에서 활개치는 영국 함대’를 잡기 위해 대형 전함 5척을 보냈다. 전력이 우세했던 스페인 함대는 영국 배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서쪽으로만 항해했다. 영국 함대가 포르투갈의 영역인 아조레스 해역(포르투갈 본토에서 1,500㎞ 서쪽 해상)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아조레스 해역에서 10일간 매복했던 영국 함대 7척은 ‘포르투갈 보물선 마드레 데 디오스호’를 먼저 찾아냈다.

1589년 건조된 ‘마드레 데 디오스호’는 해양 선진국 포르투갈에서도 견줄 배가 없다던 최신의 대형 함선이었다. 배수량이 1,600t으로 영국 함대에서 가장 큰 전함보다 3배 이상 컸다. 영국 함대는 ‘특유의 벌떼 공격’에 들어갔다. 동틀 무렵 시작된 싸움은 오후 들어 승패가 갈렸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포르투갈 배를 영국 함대는 조금씩 공격했다. 진즉 침몰시킬 수 있었어도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다. 밤 10시, 영국 선원들이 디오스호에 오르며 전투는 16시간 만에 끝났다.

배를 장악한 영국인들은 놀랐다. 실제로 승선해 보니 배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더욱 놀란 것은 화물. 금과 은, 진주·다이아몬드·호박 같은 보물은 물론 후추 450톤과 정향 45톤, 계피 35톤 등 값비싼 향료와 중국산 비단이 가득 실려 있었다. 공격을 지휘하고 나포 후에는 재고를 조사했던 존 버로는 ‘향신료와 마약, 인도산 섬유, 카펫, 사향 고양이, 가죽과 천연염료 등 온갖 진귀한 화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보고서를 남겼다. 스페인 함대는 나포 소식을 듣고 급히 뱃머리를 돌렸으나 너무 늦었다.

디아스호를 앞세운 영국 함대는 9월 7일 의기양양하게 다트머스 항구로 돌아왔다. 항구에는 생전 처음 접하는 대형 함선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전국의 도둑과 상인들도 몰려들었다. 선원들을 꼬드겨 물품을 빼내고 더러는 어선을 타고 디아스호에 기어올라 훔쳐가는 소동이 일어났다. 도둑이 극성이라는 보고를 받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한때 염문이 돌았던 총신(寵臣)이자 영국 함대의 사령관을 맡았던 월터 롤리에게 범인 색출과 약탈품 회수를 명했다.



당시 영국법에 따르면 전리품 대부분이 국왕의 소유. 롤리가 다시 조사한 결과 전리품의 원래 총 가치는 약 50만 파운드. 단일 해상 약탈로는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영국 재정의 절반에 이르는 전리품이 도둑질로 14만 파운드로 줄어들었다. 보물을 되찾아 국고에 넣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쾌속선 10척을 동원해 보물을 런던으로 옮겼다. 둘째, 엘리자베스 여왕은 투자 원금의 2,000%에 달하는 수익률을 올렸다.

‘여왕의 투자’가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실이다. 엘리자베스는 국가의 전함 두 척을 현물 투자로 냈다. 영국 함대 자체가 상설 해군이 아니라 귀족과 상인들이 펀드를 조성해 꾸민 급조 함대였다. 해적이자 사략선(私略船·정부에게 적국 함선에 대한 해적 허가를 받은 선박) 사업자, 탐험가, 두 번째 세계 일주 항해가, 영국해군 제독이던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선단과 마찬가지로 ‘사략선 펀드’로 함대가 구성된 것이다. 정부(여왕)가 현물을 투자하고 귀족과 상인들이 돈을 모았으니 오늘날의 매칭 펀드와도 닮았다.

국왕을 제외하고는 투자 금액과 기여도에 따라 성과를 나눠야 하지만 원칙은 적용되지 않았다. 가장 많은 금액을 투자한 컴버랜드 백작 클리프트와 전공이 큰 버로는 다트머스 항구에서의 도둑질에 관련 또는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인지 배당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전리품 분배에 불만을 품은 버로는 2년 뒤 롤리의 측근과 결투를 벌여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분배로 분쟁이 발생했어도 영국의 해상 약탈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켰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틈에서 후발주자 영국은 공공연히 해적질을 부추겼다. 닐 퍼거슨 하버드 대학 교수(역사학)는 저서 ‘제국’에서 영국에 이런 평가를 내렸다. ‘해상폭력과 도둑질로 성장한 해적 국가’

디아스호 나포와 사상 최대의 해상 약탈은 단순한 약탈에 그치지 않았다. 디아스호 한 척에 실린 동양 화물에 매료된 영국은 직접 진출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디아스호에서 발견된 문서도 동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590년 마카오에서 인쇄된 ‘동양 보고서’에는 중국과 일본 시장에서 무역하는 방법에 대해 상세한 자료와 설명이 실려 있었다. 영국은 결국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본격적인 동양 공략에 나섰다. 해상 교역이 보다 활발해지면서 금융도 같이 컸다. 퍽치기로 빼앗은 장물로 부를 축적해 독점적 도매상으로 성장하고 자본주의의 꽃까지 피운 셈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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