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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혁명 ·2차 석유 위기의 기폭제, 1978년 검은 금요일





1978년 9월 8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 시내가 군중으로 들끓었다. 종교 행사와 반정부 시위, 두 가지가 겹쳤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 계속된 라마단(Ramadan·금식을 포함한 각종 종교 행사 기간)이 끝나고 사흘 간 계속되는 축제의 마지막 날인 이날 시민들은 금요 예배가 끝난 뒤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테헤란 뿐 아니라 이란 전역에서 400만 여명이 축제에 참가해 대부분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의 구호는 ‘자유와 독립’. 팔레비의 독재에

민주화와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다.

독립 국가 이란에서 ‘독립’ 요구가 나온 것은 석유 이권을 미국과 영국이 과점했기 때문. 미국과 영국이 이란의 유전을 각각 40%씩 나눠 갖고 팔레비 국왕이 나머지를 가졌다. 이란인들은 세계 1~3위를 다투는 산유국이면서도 국민의 생활이 어려운 이유를 외국 자본 탓으로 여기며 ‘실질적인 독립과 석유 자원 국유화’를 요구했다. 금요 예배를 마치고 시위에 나선 군중들은 이전에 없었던 구호까지 외쳤다. ‘이슬람 통치!’ 팔레비 국왕 입장에서 이 구호는 제도 개선과 민주화 요구를 넘어 왕정 자체를 부인하는 반체제 구호였다.

팔레비 국왕의 분노 때문인지 군과 경찰은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무자비하게 굴었다. 테헤란 동부 잘레(Jalah)에 시위대 수 천명이 모이자 군은 모든 통로를 전차로 봉쇄한 뒤 실탄 사격을 퍼부었다. 시민들은 속절없이 쓰러졌다. ‘검은 금요일의 학살’로 불리는 이날 얼마나 죽고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추정이 엇갈린다. 이란 사태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스의 기호학자 미셀 푸코는 ‘사망자만 1만 5,000여 명이라고 주장해 서구언론은 이를 그대로 받아썼다. 2,000~3,000명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 첫째, 이란 정부는 사망자를 88명이라고 발표해 불신만 키웠다. 둘째, 무차별 발포는 한 가닥 남아 있던 ‘대화를 통한 해결’을 주장하던 온건파의 입지를 약하게 만들었다. 정권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마저 떠났다. 팔레비 정권은 본보기를 보여 줬다고 여겼지만 ‘검은 금요일의 학살’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실책이었다. 국내에서 정권에 대한 지지도는 땅에 떨어졌다. 서방 언론들은 연일 관련 보도를 내놓아 해외에서의 팔레비 왕정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떨어졌다.

‘검은 금요일 학살 사건’의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이란 시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국왕의 사정은 날로 나빠졌다. 결국 학살 사건 발생 4개월 뒤 팔레비 국왕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망명길에 올랐다. 1953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지 25년 만에 팔레비의 무한 권력도 생명을 다했다. 이듬해 1월 망명길에 오른 팔레비는 각국의 입국 거절로 6개국을 전전하다 췌장암에 걸려 1980년 7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객사(客死)했다.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던 팔레비는 석유자원을 갖고도 왜 실패하고 말았을까. 이란의 오일 달러는 쌓이는 반면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오히려 떨어진 탓이다.

독재 권력 아래에서 측근들의 부정부패가 만면하고 빈부격차는 날로 커져 국민 생활의 질은 제자리였다. 팔레비 왕정은 1973년 1차 석유 위기 이후 유입된 막대한 오일 달러를 주로 무기 도입에 썼다. 시위가 일어난 당해년도인 1978년 한해에 무기 도입에 투입한 예산은 무려 120억 달러 수준. 한국의 연간 수출액이 1977년에서야 100억 달러를 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은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의 무기를 이란에 팔았다. 미국은 한국에는 판매를 거부했던 M-60 탱크는 물론 영국, 이스라엘에도 공급하지 않았던 F-14 전투기까지 넘겨줬다.



미국이 이란에 고성능무기를 판매한 이유는 ‘중동 전역의 경찰’ 역을 맡아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 그러나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면서 미국의 이란에서의 영향력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미국 대사관 인질 억류 사건을 놓고 대립하면서 미국과 이란의 사이는 사실상 끝장났다. 이란은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뭉쳐 이라크의 침공을 저지하고 이슬람 공화국으로 자리 잡았다.** 핵 개발로 둘러싸고 갈등했던 미국과 이란은 대화로 위기를 넘겼으나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새로운 대립 국면을 맞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란은 골치 아픈 존재겠지만 두 가지 부질없는 궁금증이 머리를 스친다. 1953년 이란의 민주정을 그대로 놔두거나 1978년 팔레비 국왕의 군대가 발포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렀을까. 이란 정국이 요동치지 않았어도 2차 석유위기가 일어났을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이란은 이미 1952년에 석유자원의 완전 국유화를 선언한 적이 있었다. 민주 선거로 총리직에 오른 민족주의자 모사데크는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선언, 국제적 파문을 낳았다. 경제 봉쇄에도 이란이 버티자 과 영국 정보 기관은 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았다. 팔레비 국왕도 이 때부터 전권을 휘둘렀다. 2000년 3월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1953년의 이란정권 전복은 실수였다고 인정했으나 정식 사과 요구에 대해서는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 팔레비 왕정은 성직자 호메이니를 견제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결국 모든 게 패착이었다는 점이 나중에 드러났다. 팔레비 국왕에 의해 1964년 강제 출국 당한 호메이니는 이란 정부의 입김으로 터키와 이라크 등지로 옮겨 다녔으나 국민적 지도자로 우뚝 섰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비밀경찰 사바크가 호메이니의 장남을 살해했다고 믿는 시민들이 늘어나며 시작됐다는 시각도 있다. 당시 호메이니는 ‘개인사는 말하는 게 아니다’라며 말을 아꼈다. 그러나 느닷없이 테헤란의 한 일간지가 ‘호메이니는 동성애자에 공산주의자’라는 비난 기사를 게재하며 저항의 불이 붙었다.

문제의 기사가 나간 바로 다음날인 1978년 1월 7일 이슬람 신학생들이 기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군은 이들에게 사격을 가해 6명이 숨졌다. 사망 직후 매장해 40일 뒤 추도하는 이란의 장례 특성에 따라 신학생들이 죽은 뒤 40일이 지나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군은 또 총을 쏴, 사망자가 생겼다. 결국 40일 주기로 대규모 시위가 반복됐다. 결정적으로 8월 진압을 피해 숨어 들어온 시위대로 가득한 극장에서 화재가 발생, 477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출입문은 봉쇄되어 있었다.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의 테러’라고 발표한 반면 시민들은 사바크의 소행이라고 여겼다. 이런 와중에 검은 금요일의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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