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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미술학원 하다가 남성용 스킨케어 브랜드로 대박 낸 사연

추혜인 스웨거 대표

추혜인 스웨거 대표




어릴 적부터 그림이 좋았다. 조용한 성격으로 평상시 말수도 적었지만, 손놀림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어머니는 예원학교(한국 최초의 중학교과정 예술학교) 입학 준비에 들어갔다. 졸업 때까지 홍대 앞 입시전문미술학원을 다녔다. 밤 11시까지 학원에서 수업을 받다가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됐다. 피나는 노력 덕분인지 예원학교에 무난히 합격했고, 수업을 함께 듣던 친구들과 어울리며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우연히 영국의 명문사립인 베넨든스쿨 입학 시험을 볼 기회가 찾아왔다. 별다른 기대 없이 시험을 치렀는데, 예상치 못하게 합격했다. 하지만 베넨든 졸업까지 5년의 시간은 ‘절대 고독’과 ‘미술’이라는 벗이 함께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미술 실력은 향상됐고, 졸업 즈음에는 미국의 내로라 하는 미술대학은 거의 합격할 정도였다. 미술대학으로는 최고의 명문인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을 택했고, 대학 선배인 서도호 작가와의 인연으로 졸업 후에는 서 작가 밑에서 수련 생활도 했다. 평생 미술을 직업으로 살고자 하는 열망을 안고 미술과 영어를 접목한 영어미술학원을 열었지만, 교육자의 길은 그의 길이 아니었다. 디자인 능력과 미적 감각을 살려 브랜드 컨설팅을 조금씩 했고 입소문이 나면서 사업도 확장됐다. 그러다 나만의 브랜드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남성 전용 스킨케어 브랜드 ‘스웨거’로 세상에 도전장을 낸다. 올해로 7년차에 접어든 추혜인(34·사진) 대표의 삶이다.

연년생 오빠는 어릴 적부터 유달리 리더십도 강하고 못 하는 게 없는 ‘만능’이었다. 친구도 많고, 공부도 잘 하니 항상 주변의 주목을 받았고, 부모님의 관심도 오빠에게 쏠렸다. 추 대표는 정반대였다. 조용한 성격에 앞에 나서서 말하거나 남들 눈에 띄는 것을 싫어했다.

“제가 유치원 다닐 때였던 것 같아요. 유치원에서 영어연극제가 열리기에 앞서 오디션을 보는데 오빠는 영어로 자기 소개도 자신 있게 하고 선생님들의 질문에도 거리낌 하나 없이 대답했죠. 반대로 저는 한 마디만 해도 붙여준다고 했는데도, 무대 위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얼어 있었죠. 저랑 오빠의 타고난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아요.”

말수도 적고, 친구도 많지 않았던 추 대표에게 그림은 가장 큰 위안이자 가장 친한 벗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시간이 가장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딸이 미술을 좋아한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어머니는, 추 대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으니 그쪽으로 키우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듣고 나서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했다. 외국계 항공사 스튜어디스 출신인 어머니는 자녀 교육과 진로 문제에 대해서는 여느 어머니보다 강한 의욕을 보였고, 곧바로 딸의 미래 설계에 나섰다. 예원학교를 목표로 삼고 홍대 앞 입시미술전문학원에 등록한 것이다. 학원 강사는 추 대표의 데생 솜씨를 보고는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한번도 학원에 다닌 적 없다는 어머니의 설명에 더욱 놀라며 예원학교 입학을 자신했다.

이때부터 추 대표는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 속으로 들어갔다. 밤 11시까지 학원에서 숱하게 연습했다. 강도 높은 수업 덕분인지 그녀는 학원 친구 두어 명과 함께 예원학교 입학에 성공했다. 몇 년을 함께 고생하며 마음을 나눈 친구들과 함께 입학을 한 터라 중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평범한 소녀의 삶을 되찾은 듯 신이 났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영국 런던으로 오빠를 유학 보낸 어머니에게 영국의 지인으로부터 베넨든 학교에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한 번 도전해 보라고 제안한 것이다. 앤 공주 등 명문가 자녀만 입학할 수 있는 학교인 만큼 어머니 입장에서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입학을 위한 필기 시험에서 수학 100점 등 전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으니 학교에서는 합격 통지서가 날라왔다. 예원학교 한 학기를 다니자마자 학교를 옮기게 된 것이다.

“시험에 합격하고 그 다음 주에 입학하는 일정이었거든요.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오라는 말에 처음에는 안 가겠다고 버티며 엄청 울었어요. 그나마 중학교 친구들과 친해졌고, 학교 생활도 즐거웠거든요. 하지만 부모님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셨고, 저는 부모님의 뜻을 꺾지 못했죠. 글로벌 기업에서 임원까지 하셨던 아버지는 항상 ‘글로벌 스탠다드’를 강조하셨고, 큰 물에서 놀아야 글로벌 스탠다드가 몸에 밴다고 믿으셨어요. 오빠의 경우는 영국 유학을 가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석박사를 마쳤으니 부모님 기대에 부응한 아들이었죠.”

2000년 영국 유학 시절 추혜인 대표의 모습


영국 켄트(kent)의 명문 사립 베넨든 스쿨에는 한국인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영국 명문가 자녀, 브루나이 왕족 등 내로라 하는 집안 자제들이었다.

“베넨든 스쿨 다닐 때 가장 열등감이 컸던 것 같아요. 사는 수준도 달랐고, 인종도 달랐죠. 테니스 수업을 할 때도 저랑 짝을 하겠다는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맨 마지막까지 혼자 남는 아이가 저였구요. 혼자서 많이도 울었어요. 방학 때 다른 친구들은 각자 집으로 가는데 저만 기숙사에 남아서 그림만 그리곤 했죠. 입학한 지 얼마 안 지났을 때는 동급생 한 명이 저한테 어디서 왔냐고 물어서 ‘코리아에서 왔다’고 대답했는데, 저한테 커리 냄새가 난다고 말하면서 키득거리더라구요. 지금까지도 영국에서의 생활은 저한테 아픈 기억, 힘든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그렇듯 힘든 시간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은 붓과 물감과 스케치북에서 나왔다. 명문사립이다보니 시설도 워낙 좋았는데, 미술실의 경우 최고 수준의 물감과 붓을 갖춰 놓고 있었다. 방학이나 휴가기간 혼자 남은 기숙사에서 화방을 찾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 시절 일렉트릭 뮤직을 들으며 햇살 가득 들어오는 화방에서 보낸 혼자만의 시간은 그녀의 머릿속에 영국 생활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각인됐다.

“그렇게 그림에만 몰두했으니 남들보다 잘 할 수 밖에 없는 여건이었어요. 졸업할 즈음 보니까 성적도 월등했구요. 방학 때는 한국 들어와서 수학 등 사교육도 열심히 받았거든요”(웃음)

미국 뉴욕의 파슨스(Parsons School of Design), 영국 런던의 센트럴세인트마틴(Central Saint Martins College of Arts and Design), 런던인스티튜트(The Institute London),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RISD,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등 디자인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미술대학은 다 원서를 넣었다. 결과는 100% 합격, 원하는 곳을 골라 갈 수 있었다.

디자인 분야를 선택한 건 전적으로 아버지의 판단이었다고 한다. 순수 회화만으로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현실론이 부친이 그녀에게 디자인 전공을 권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녀의 선택은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이었다. 디자인 분야에서는 대표적인 명문인 데다 영국이란 나라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고 한다.

2001년 대학 입학 후 아버지의 권유대로 디자인 등 실용 수업도 들었지만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실용미술 수업도 많았던 덕에 3D 렌더링(2차원의 화상에 광원·위치·색상 등 외부의 정보를 고려해 사실감을 불어넣어 3차원 화상을 만드는 과정을 뜻하는 컴퓨터그래픽)을 익힐 수 있었던 건 지금까지도 큰 자산으로 여긴다고 한다. 디자인, 회화, 조각, 설치 등 미술의 다양한 분야를 접하며 충만한 미국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대학 졸업 즈음에는 국내 대표적인 설치작가인 서도호 씨와 인연을 맺었다. 서 작가는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과 예일대학에서 회화와 조각을 전공했다. 천을 이용한 정교한 설치와 미니어처 같은 조각 작업으로 해외에서 주목을 받았다. ‘한국화의 대부’ 서세옥 화백이 부친이다. 한국인 중에서는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 출신이 드물었던 만큼 자연스럽게 동문 선배인 서 작가를 알게 됐고, 귀국 후에는 서 작가의 성북동 자택에서 2년여간 작업을 도우며 문하생으로 살았다.

2005년 서도호 작가 밑에서 문하생으로 지낼 당시 추혜인 대표의 모습.


“순수 미술의 터치감을 잃지 않기 위해 졸업하고도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선생님 작품 활동도 도왔어요. 2005년부터 2년간 성북동을 오가며 작업을 도와드렸죠. 제가 주로 했던 것은 컴퓨터로 3D 렌더링을 하면서 모델링을 하는 거였어요. 구상 단계나 기초 작업이 끝난 것을 렌더링으로 구현해 작품이 원래 의도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본래 회화 등 자신만의 창의성을 발산하는 일에 매력을 느껴왔던 터라 2년이 채 가기 전에 성북동에서 나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해외로 나가고 싶다고 얘기하자 아버지는 홍익대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IDAS)에 등록할 것을 권했다.

“서도호 작가님 밑에서 나온 뒤엔 외국으로 그림 그리러 나가려고 했어요. 부모님께도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시더군요. 중학교 시절부터 유학을 보낸 터라 딸내미를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지 않으셨던 듯 해요. 당시엔 탐탁치 않은 마음으로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결과적으로는 대학원이 저의 인생을 바꾼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바로 브랜딩이라는 것을 접하게 된 거죠.”

대학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쓴 추혜인 대표가 환하게 웃고 있다.


미국 유학 시절엔 브랜딩을 직접 접할 기회는 없었다. 대학원에서 브랜딩 수업을 들은 뒤엔 예술과 관련된 모든 것이 브랜딩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고, 브랜드라는 분야 매력을 느꼈다.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거구나 싶었어요. 이것을 평생 할 수만 있으면 그림보다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요. 어려서부터 미술, 수학, 설치, 조각 등 안 해본 예술 분야가 없는데, 브랜딩이 바로 그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모아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온 몸에 전율을 느꼈지요. 그림을 그릴 때나 조각을 할 때 그 속에 담길 사상이나 철학,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표현할까를 고민하는데, 브랜딩이 바로 이것을 창조적으로 풀 수 있는 수단이니까요. 브랜딩을 저만의 방식으로 정의하면, 물건이나 기업이 갖고 있는 것을 외부의 시각으로 전략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업이나 물건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그런 뜨거운 희열을 느끼며 대학원 생활을 보냈지만, 졸업 후에는 막상 브랜딩을 갖고 뭘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회사 생활은 하기 싫고 자신의 힘으로 뭔가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방화동에 있는 부친의 회사 건물 1층을 빌려 영어미술학원을 열었다.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에서는 영어와 미술을 함께 가르치는 학원이 유행했던 시절이라 홍대 디자인과를 졸업한 오혜림 씨와 야심 차게 뛰어들었다. 글로벌한 아트의 느낌을 살려 학원명도 아트앤디자인 인터내셔날(ADI)로 지었다. 그때가 2009년이었다. 창업 전선으로 첫 발을 내딛은 해였다. 하지만 방화동이라는 지역 자체가 그런 수요가 적었다. 수강생만으로 건물 월세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둘의 월급조차 해결이 되지 않은 상황이 몇 달 계속되자,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알음알음 간판 등 인테리어 디자인 일을 받아서 진행했다. 한 건 당 20만~30만원에 불과했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일감은 늘었고 액수도 늘었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디자인 에이전시로 사업 방향을 틀고 페이스북 등에 본격적으로 광고를 태우기 시작했다. 이태원 등지의 외국인 대상 식당에서 로고나 메뉴 디자인을 의뢰하는 등 다양한 일이 들어왔다. 서울 이태원의 멕시칸 레스토랑 ‘바토스’의 브랜딩을 시작으로 외국인·동포를 대상으로 메뉴·배너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았다.

점차 사업이 커지자 오피스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화동을 떠나 홍대 앞에 둥지를 틀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일은 CJ푸드빌의 패키지 디자인이다. 뚜레주르와 투썸플레이스에서 생산하는 각종 베이커리 및 음료 제품 패키지 디자인이었는데, 배우 김수현 씨가 모델이었다. 가는 곳마다 자신이 디자인한 제품이 진열된 것을 보고 묘한 희열을 느꼈고, 디자인 에이전시가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싹텄다. 신명 나게 일하고 싶었지만, ‘클라이언트=하느님’이라는 등식 속에 무조건 맞추며 사는 삶이 지치고 힘들었다. 나만의 브랜드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디자인 에이전시를 하면서 화장품이나 음식 분야와 접할 일이 많았어요. 특히 화장품의 경우 처음에는 용기와 외관 디자인만 맡다가 나중에는 내용물까지 관여하곤 해서 전반적인 공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꿰뚫고 있었죠. 화장품 벤처기업을 유심히 관찰하니까 별도로 마케팅을 하지 않아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홍보를 하더라구요. 그런 마케팅이라면 우리도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선 끝에 2011년 남성 전용 스킨케어 브랜드 ‘스웨거(SWAGGER)’가 탄생했다. ‘으스대며 걷는다’는 뜻의 스웨거를 브랜드명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추 대표는 자유로운 남성의 특성을 잘 표현한 단어라고 소개했다. 특히 미국 유학 시절 힙합 음악에 빠져 살던 추 대표로서는 ‘스웨거’만큼 남성의 정체성과 트렌디한 생활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단어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남성 화장품일까. 훨씬 시장이 큰 여성이나 유아를 대상으로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외국에서 생활할 때 어린 남자부터 어르신까지 샤워젤을 쓰더군요. 남성 전용 샤워젤을요. 우리는 온 가족이 한 가지 샤워젤을 쓰잖아요. 우리나라에도 남성이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텐데, 남성 전용 샤워젤을 만들어 팔면 어떨까 라는 생각에서 사업이 시작됐죠.”

스웨거 대표 제품


물론 없던 시장을 개척하는 일이 쉬운 건 아니었다. 남성을 표현할 수 있는 향을 배합하는 것부터 남성이 선택할 만한 용기를 만들어내는 것 모두 새로운 도전이었다.

추 대표는 “일반적으로 샤워젤의 향수 함유비율이 0.1~0.2%인 반면 스웨거 제품은 2%나 돼 국내 최초로 ‘향수 샤워젤’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었다”며 “가격도 너무 높게 형성되면 거부감이 큰 만큼 1만원대~3만원대 사이에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파라벤 등 인체에 유해한 성분도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남성들의 최대 고민인 탈모 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재료만큼은 좋은 걸 써야 한다는 신념이다. 다만 좋은 원료를 쓰는 만큼 원가가 많이 들어 마진은 크지 않다는 게 추 대표의 귀띔이다.

더 나아가 제품 용기에도 반드시 디자인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화장품 용기 제조에 뛰어들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스웨거의 시그니처 디자인이 된 위스키 느낌의 용기다.

2011년 9월 본격 론칭을 했고, 그해 연말에 사단법인 한국디자인기업협회가 주는 베스트패키지상 그랑프리를 거머쥐었다. 잡지사 등에 제품을 보냈더니 명품 화장품 옆에 진열해 놓고 사진을 촬영하는 일이 빈번했다. 별도로 마케팅비를 쓰진 않았지만 디자인이 워낙 특이하다 보니 잡지사 기자들이 외국의 뜨는 브랜드로 오해해서 벌어진 ‘뜻밖의 행운’이었다.

“제 장기를 살려 디자인 하나로 승부를 걸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전략이 잘 먹힌 거지요. 당시 올리브영에는 남성 바디&그루밍 브랜드가 전혀 없었는데, 스웨거가 올리브용에 진열된 1호 남성 브랜드가 됐을 정도니까요.”

신기할 정도로 모든 일이 잘 풀렸던 시기였다. 하지만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지난2012년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대형 연예기획사에서 투자 의향을 밝혀 1대 주주로 참여하게 됐다.

하지만 그녀의 방향성이나 브랜드의 정체성과 생각이 많이 달랐고, 결국 결별 수순을 밟게 됐다. 그 과정에서 2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오히려 경영자로서 교훈을 얻은 소중한 기회였다고 회고한다. 현재는 김범수 카카오 의장, 케이큐브홀딩스 등이 주요 주주로 참여하면서 안정적인 운영이 이뤄지고 있다.

2012년 이마트에 스웨거 제품을 납품했을 당시 매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추혜인 대표.


남성 고객들이 화장품은 온라인에서 사지 않는 경향을 보여 오프라인 접점을 전략적으로 늘리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2년 올리브영 진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950여개의 올리브영 매장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들이 보다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는데요, 그 터닝포인트가 바로 2015년 세븐일레븐과의 인연입니다. 세븐일레븐은 전국적으로 8,800여개 매장이 있는 만큼 이곳에 진열된다는 사실 만으로도 수많은 남성 고객을 만날 수 있는 접점을 확보했다는 얘기거든요. 실제로 매출도 편의점에서 잘 나오는 편입니다.”(웃음)

샤워젤에서 헤어 스프레이, 헤어 왁스, 수분 크림, 비비 크림 등으로 제품군이 확장되면서 수출길도 열렸다. 홍콩 및 마카오의 최대 프리미엄 드럭스토어 ‘샤샤(SASA)’ 120곳에 이미 들어갔으며 최근에는 중국 왓슨스 1,000개 점포에 입점을 확정했다.

올 여름부터는 아마존을 통해 미국에도 진출했다. 다만 미국의 경우 ‘스웨거’라는 상표가 이미 등록돼 있어 ‘사나이(SSANAI)’라는 별도 브랜드를 만드는 전략을 썼다. 이렇듯 수출 전선에도 청신호가 켜지면서 올해 매출은 25억원, 이 가운데 수출 비중이 20%를 차지할 전망이다. 더욱이 스웨거 론칭 후 첫 흑자 전환이 예상돼 회사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밝다고 한다.

추 대표의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남성 스킨케어 브랜드로 입지를 다진 만큼 내년부터는 남성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확장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남성의 생활 전반에 녹여 들어간, ‘상남자의 필수품’으로 자리잡는다는 포부다. 또한 내년에는 여성 및 유아용 스킨케어 브랜드 시장에도 진출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는 계획이다.

벌써 CEO 경력 9년차에 접어든 그녀에게 창업을 꿈꾸는 후배를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창업을 꿈꾸며 찾아오는 후배들에게 좋은 창업 아이디어와 양질의 비즈니스 모델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매달리는 근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합니다. 벌써 9년이면 스타트업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연차지만, 돌이켜 보면 정말 힘들게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사업을 하면서 좋은 인연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한 명의 생명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데요. 힘든 시기를 잘 견뎌내면 그만한 보상이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끝까지 버텨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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