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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가 직감한 새로운 세상… 발미 전투





‘오늘 이곳에서 세계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파리 동쪽 발미(Valmy)에서 벌어진 전투를 참관한 요한 볼프강 괴테(당시 43세)가 남긴 말이다. 불과 25세 나이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해 독일을 넘어 유럽의 작가로 필명을 날리던 그는 프로이센군 사령관의 정책보좌관 자격으로 참전해 프랑스군의 용전을 지켜보고 이런 말을 남겼다. 프랑스는 발미 전투를 대단한 승리로 여겼지만 과연 그럴까. 사상자 수를 보자. 프랑스를 침공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의 피해는 186명. 프랑스군의 사상자 300여 명보다 적었다.

프랑스가 발미 전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째, 절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에서 연전연패하던 ‘오합지졸’ 프랑스군이 유럽 최강으로 꼽히던 프로이센군의 진공을 일단 막아냈다. 둘째, 꺼질 것 같던 혁명의 불길을 지킬 수 있었다. 괴테 역시 민주화한 시민의 군대(프랑스)가 조국에 대한 열정으로 고도로 군율이 잡힌 군대(프로이센)와 대등하게 싸웠다는 점에 놀랐다. 전황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프랑스에서는 혁명의 열정이 더욱 크게 타올랐다. 도대체 어떤 전투였길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혁명 발발 4년 차에 접어든 1792년, 프랑스는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모두가 전쟁을 외쳤다. 정파별로 전쟁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국왕의 권한을 박탈당한 채 감금 상태인 국왕 루이 16세 부부도 마찬가지. 전쟁이 일어나면 막강한 전력을 지닌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 군대가 프랑스를 휩쓸어 왕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여겼다. 1792년 4월, 입법회의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정신이 프랑스 국경을 넘을까 조바심내던 터. 두 나라는 전쟁을 반겼다.

프랑스는 기세 좋게 10만의 군대를 각 지역으로 보냈으나 연전연패. 첫 번째 전투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네덜란드 접경 북부 프랑스 릴에서 4월 말 오스트리아군과 만난 프랑스군은 도망치기 바빴다. 전투에서 줄행랑쳤던 병사들은 전열을 가다듬으려는 장군을 붙잡아 ‘오스트리아의 첩자’라며 죽였다. 병사들이 귀족 출신 장군과 장교들을 적대시하는 판에 프랑스군은 연달아졌다. 잇따르는 패전 소식에 파리에서는 귀족들이 일부러 패배를 유도하고 있다는 의구심이 더욱 퍼졌다. 국왕과 혁명 세력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여름으로 접어들며 사태는 더욱 나빠졌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국왕 루이 16세에 대한 인신 구속을 구실삼아 프랑스에 연이어 선전포고하기에 이르렀다. 프로이센군 5만, 오스트리아군 3만, 가장 비싼 몸값으로 유명한 헤센-카셀(미국 독립전쟁에서도 영국 측에 용병을 팔았던 지역. 로스차일드 가문이 부를 쌓기 시작한 것도 헤센-카셀의 영주가 용병 장사로 모은 돈을 관리하는 데서 출발했다)도 정예병 6,000명을 보냈다. 프랑스 병력도 있었다. 망명한 왕족과 귀족들이 거느리는 2만 2,000명이 프랑스 침공군에 끼었다.

총 병력 10만 8,000여 명의 지휘관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당시 57세). 영국 왕실인 하노버 왕가(1917년 윈저 왕조로 개칭)의 방계 왕자로 프로이센 육군 원수였다. 1차 대프랑스 동맹은 선전포고문에 국왕 루이 16세 부부에 대한 구출 계획도 못 박았다. 혁명을 무산시키고 전제 왕정으로 되돌린다는 협박은 오히려 파리 민중을 자극했다. 시민들은 국왕 부부가 거처하는 튈르리 궁을 습격, 치열한 전투 끝에 호위대인 스위스용병 600명을 몰살시켰다. 국왕 부부는 탑에 갇혔다.

브라운슈바이크가 이끄는 동맹군은 전선에서 프랑스군을 하나하나 깨트렸다. 8월 말과 9월 초에 국경도시 론과 베르됭이 떨어졌다. 파리 입성이 눈앞에 왔다고 자신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만약 국왕 부부의 손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혁명의 소굴인 파리를 철저하게 짓밟겠다’고 협박했다. 협박은 또 다른 피를 불렀다. 흥분한 파리 민중과 지원병들은 전선으로 떠난 사이에 처자식이 반혁명 분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내부의 적을 소탕해야 한다며 감옥에 갇힌 정치범 중에서 ‘혁명의 적’이라고 여긴 1,000여 명을 죽였다.

발미 전투는 이 같은 대립과 갈등, 흥분과 증오 속에서 치러졌다. 전투에 동원된 병력은 프랑스군 3만 2,000명 대 동맹군 3만 4,000명. 프랑스는 예비대가 없었던 반면 동맹 측은 더 동원할 여력이 있었다. 대포 수도 40문 대 52문으로 프랑스가 적었다. 운명의 9월 20일, 안개가 잔뜩 낀 가운데 프로이센 기병대가 먼저 움직였다. 대포도 불을 뿜었다. 프랑스군은 중부군과 북부군이 아직 합류하지 못한 상황. 여느 때 같으면 총성과 대포 소리에 놀라 흩어졌을 프랑스군은 물러나지 않고 대오를 지켰다.



전투는 오전 내내 포격전으로 치러졌다. 프랑스 포병대는 수적 열세에도 정확도가 높고 연사 속도가 빠른 대포(그리보발 12 파운드포) 덕분에 유럽 최강 프로이센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이날 전투에서 사용된 포탄은 모두 2만여 발. 괴테는 대포가 발사되는 광경이 ‘연한 핏빛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 같았고, 포탄이 날아다니는 소리는 나무 꼭대기의 바람 소리나 물소리, 새의 휘파람 소리 같았다고 전했다. 괴테는 가끔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갔음에도 무사했던 이유를 땅이 젖어서 포탄이 땅에 푹 박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오후 들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내린 돌격 명령도 프랑스군의 포화에 막혔다. 아들과 함께 참전해 프랑스군을 이끈 클레르망 장군(57세)은 프로이센의 기세가 꺾였다고 판단, 보병대를 이끌고 진격했다가 포병의 집중 사격을 받고 군마를 잃었다. 프랑스군의 공격이 무너진 틈을 탄 프로이센군의 역공 순간에 이날 전투의 상징적인 장면이 나왔다. 말도 타지 못하고 보병들과 전열에 선 클레르망 장군이 모자를 칼끝에 꽃아 높이 쳐들고 병사들을 독려하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외침이 터져 나왔다. ‘Vive la Nation!(조국의 위하여, 만세!)’. 프랑스군이 대대별로 포효하는 우렁찬 함성에 프로이센군은 물러났다.

동맹군은 고착된 전선에서 10여 일 머무르다 퇴각했다. 발미 전투는 이렇게 끝났다. 포탄이 땅에 푹푹 박힐 정도로 젖어있던 터에 양쪽에서 6만 6,000여 명의 군대가 격돌했음에도 사상자는 500여 명 안짝에 그친 전투. 전술적으로는 누구도 승리를 주장할 수 없는 무승부였지만 프랑스는 커다란 자산을 얻었다. ‘거지 군대’라고 불리던 혁명군이 유럽 최정예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 혁명의 기치 아래 애국심으로 뭉치면 어떤 적도 물리칠 수 있다는 전과를 거뒀다.

프랑스가 얻은 것은 또 있다. 공화국. 발미 전투 이틀 뒤, 입법회의가 해산하고 국민공회가 들어서며 왕정 폐지와 공화정을 선포했다. 민족 국가와 민족 군대도 생겼다. 발미 전투에서 병사들이 ‘Vive la Nation!’를 외쳤을 때, 괴테는 전율했으리라. 근대적 민족 군대, 시민 군대가 탄생하는 순간임을 직감했을 테니. 마르세유 항구에서 행진해 온 600여 명의 의용군 부대가 불렀던 ‘군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역시 발미 전투를 통해 널리 퍼지며 1795년 프랑스 국가로 지정됐다. 시대의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발미 전투 직전의 두려움은 반혁명을 분쇄한다는 미명 아래 공포정치를 낳았다. 군에 대한 자신감은 대규모 동원체제와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침략 전쟁으로 이어졌다.

발미 전투는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는 발미 전투 11개월 뒤인 1793년 8월 ‘국민 총동원령(Levee en masse)’을 발동, 근대적 군사 동원 체제를 만들었다. 프랑스에서 형성되고 규격화한 국민의 군대, 시민군대는 오늘날 대부분 국가에서 안보의 기본 틀이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존 린(John A. Lynn) 교수(사학과)의 저서 ‘전쟁, 배틀의 문화사’에 따르면 발미 전투 이후 프랑스의 군사제도는 국가의 틀을 바꿨다. 용병 또는 ‘국가 위임군대(state commission army)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 발미 전투 이후부터는 전제 왕정의 피지배자가 아니라 주권을 지닌 시민으로 구성되는 ’국민 개병군대(popular conscript army)‘로 대체됐다는 것이다.

시민이 전사가 되어 싸우는 전쟁의 양상은 전투의 대규모화를 낳았다. 민족주의 감정이 불붙고 전쟁의 양상도 국가 총력전으로 변했다. 영국 육군사관학교에서 26년간 전쟁사를 강의하고 20여 권의 저술을 통해 ‘전쟁사를 대중화시킨 주인공’이라는 평가를 받는 고 존 키건(John Keegan·1934~2012)은 ‘제 2차 세계대전사’에서 사망자 5,000여만 명을 낳은 2차대전의 기원을 18세기 말 대혁명 당시 위기에 처한 프랑스의 발미 전투와 동원체제에서 찾는다. 시민군으로 전쟁을 치른 나폴레옹 이후 1차대전까지 100년간 평화 기간 중 각국은 기술을 개발하고 병사의 질을 높였고 결국은 양차 대전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전쟁의 기술과 개별 병사의 역량 발전이 호전성으로 이어졌다는 키건의 분석이 틀리기를 바란다. 민족과 군대가 힘이 강해질 때 배타적이고 침략적으로 변하는 인간의 습성도 반복되지 않으면 좋겠다. 평범한 시민과 농민으로 구성된 프랑스의 병사들이 외쳤던 함성이 프랑스 혁명의 본래 정신인 자유와 평등, 박애에 머물렀다면 좋았을 것을. 힘이 셀수록 싸움을 좋아하는 인간 세상, ‘안전한 군사 옵션’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구 상 어떤 나라의 군사력이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가치를 지키는데 최소한만 쓰이기를….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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