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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돈의 결정체, B-29 폭격기





1942년 9월 21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무게 34톤, 길이 30m가 넘는 비행체가 하늘로 솟구쳤다. 미 육군항공대(미 공군의 전신·공군으로 독립은 1947년)의 차세대 XB-29 폭격기가 처녀 비행한 순간이다. 미국이 차세대 폭격기 개발에 나선 것은 1934년부터. 급속하게 강해진 독일의 공군 전력이 영국을 능가하고 곧 유럽 전체 공군보다 강해진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미국은 급한 대로 기존에 개발하던 4발 엔진 폭격기 생산을 서두르는 한편 새로운 개념의 폭격기 설계에 들어갔다.

최초의 결과물은 보잉사가 설계, 1936년부터 생산한 B-17 중(重) 폭격기. 16.4t 무게에 22.66m 길이의 B-17 폭격기는 1945년 종전까지 무려 1만 2,731대나 생산돼 유럽 전선에서 주로 활약했다. 개발 당시 미국은 이보다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 날 수 있는 기체를 원했다. 특히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독일의 기계화부대가 폴란드를 점령(1939년 9월)하자 더욱 바빠졌다. 구체적인 대안이 ‘초장거리 폭격기(VLR)’ 개발. 독일이 유럽을 전부 점령할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미 본토에서 발진해 유럽 폭격이 가능한 ‘초장거리 폭격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고개 들었다.

미국의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 영국이 독일의 공중 공세(영국 본토 항공전)를 막아낸 덕분에 초장거리 폭격기에 대한 수요는 일단 가라앉았지만 장거리 폭격기 개발은 계속 진행됐다. 새로운 목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남미 국가들이 독일의 편을 드는 상황에 대비해 중남미 전 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폭격기 개발에 속도를 냈다. 1940년 5월 공개 입찰 결과 낙점을 받은 기체가 보잉사가 출품한 ‘345 모델’. 강력한 성능과 탑재량으로 ‘하늘의 요새’로 불렸던 B-17 폭격기보다 종합적으로 2배 강한 성능을 자랑했던 ‘345 모델’은 ‘B-29 폭격기’란 제식 명칭을 얻었다.

보잉사가 내놓은 설계안은 혁신적인 첨단 기술을 담았다. 기체 내부에 압력 장치(여압 장치)를 달아 승무원들은 일상복을 입고 편안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높은 고도를 비행하는 폭격기 조종사와 승무원들은 고공의 압력을 견디기 위해 전용 헬멧을 쓰고 두꺼운 방한복을 입어야 했다. B-29 폭격기부터 일반화한 여압장치는 전후 일반 여객기에 도입돼 민간 항공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덩치가 크고 속도가 전투기 수준으로 빨랐으며 폭탄 적재량도 B-17보다 두 배나 컸다.

첨단 기술의 결정체는 중앙 제어식 화기 관제 시스템. 초보적인 아날로그식 전자계산기를 깔아 대공 전투용 기관포와 연결한 이 시스템은 대공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승무원들에게 ‘호위 전투기가 없어도 안전하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6월에는 일본 규슈 상공에서 한 폭격기가 79대의 일본 전투기와 공중전을 펼쳐 7대를 격추한 적도 있다. B-29의 원격 조준 시스템에서는 전기식 계산기가 적기와 거리, 속도, 외부 기온 등 외부 데이터와 기관총탄의 중력까지 계산해 적 전투기에 기관포탄 세례를 안겼다. 요즘의 컴퓨터에 해당하는 전기식 계산기의 부피가 컸지만 기체가 큰 B-29는 화력 관제용 계산기를 탑재할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신형 폭격기(B-29)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실험기체 3대가 제작돼 처녀비행하기도 전에 미 육군은 보잉사와 납품 계약을 맺었다. 1,664대를 먼저 주문한 것이다. 모두 3,970대가 제작된 B-29 폭격기의 평균 가격이 약 64만 달러였으니까 10억 달러 이상의 선 주문을 낸 셈이다. B-29 폭격기의 개발과 구매, 운용에 투입된 예산은 30억 달러 이상으로 전체 사업비 규모가 20억 달러 남짓했던 맨해튼 프로젝트(원자폭탄 개발계획)보다 많았다. B-29 폭격기는 돈을 들인 이상의 몫을 해냈다. 본격 생산과 실전배치에 들어간 1944년 5월 이후 미 육군 항공대는 보다 수월하게 적군을 두들겨 팼다.

태평양 전선에 배치돼 일본과 싸운 B-29 태평양 섬들에서 발진해 일본 본토까지 비행해 고도 1만m에서 일본의 공장과 도시를 때렸다. 레이더 같은 관측 시설과 고고도 전투기가 절대 부족한 일본 입장에서는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전선에서 미 육군항공대의 B-17 폭격기가 독일 전투기들의 집중 견제를 받아 격추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태평양전쟁에서 B-29는 효과적인 화력 제어 시스템 덕분에 호위전투기 없이도 떨어지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 폭격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300m 상공에서 저공 비행하는 경우에나 대공포나 일본 전투기가 대응할 수 있었다. 일본 상공에서 격추된 B-29는 약 300여 대로 미군은 잠수함을 동원해 조종사와 승무원을 구조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B-29 폭격기는 일본을 짓눌렀다. 1945년 도쿄 대공습(3월 10일)에서는 345대의 B-29가 소이탄을 뿌려 민간인 사망 83,793명, 중상 40,918명이라는 인명 피해(일본 정부 조사 기준)를 냈다. 이재민이 100만 명 이상 발생했으며 ‘나무와 종이’로 이뤄진 도쿄의 가옥이 불타 시내는 잿더미로 변했다. 도쿄의 민가에 소이탄을 투하하고 돌아와 양심의 가책을 보이는 B-29 조종사와 승무원들에게 커티스 르메이 21 폭격기 사령관(육군 소장)이 남긴 말이 있다. ‘(민간인도 어떤 형태로든 전쟁에 기여한다. 일본에)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도쿄 대공습 이후 B-29 폭격기 편대는 일본 주요 도시는 물론 진해와 부산, 청진, 원산 앞바다에 무수히 많은 기뢰를 떨어트렸다. B-29 160대는 1,529회 출격해 기뢰 1만 2,135개를 투하, 일본 근해를 꽁꽁 묶었다. 일본으로 식량과 전쟁 물자 반입을 막으려는 ‘기아작전’에도 B-29 폭격기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B-29 폭격기 1,000대가 일본의 하늘을 까맣게 덮은 날도 있었다. 종전을 앞당긴 원자폭탄 투하 역시 B-29 폭격기가 맡았다. B-29 폭격기는 한국전쟁에서 전성기와 쇠락기를 함께 맛봤다. 전쟁 초기 융단폭격으로 맹위를 떨쳤으나 소련이 미그-15 제트 전투기를 신의주 상공에 보낸 이래, B-29는 주간폭격을 중단했다.

제트기 시대에 B-29는 폭격기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지만 기체가 크고 부품을 구하기 쉬어 정찰기, 잠수함 수색기, 공중급유기 등 다양한 변형으로 쓰였다. 시대를 앞서 간 B-29 폭격기를 제조했던 미 보잉사는 여압장치 등 개발 경험과 기술을 상용기에 접목시켜 민간 여객기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기반을 닦았다. 폭격기로 전쟁의 승리를 맛봤던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다양한 전략폭격기를 운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 노스롭사가 차세대 폭격기를 개발하는 역할을 맡았다.

문제는 경제력이 뒷받침할 수 있느냐. 미국 폭격기의 계보를 보면 가격과 생산수량의 함수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B-17 23만 8,329달러 1만 2,731대, B-29 63만 9,188달러·3,970대*, B-52 8,400만달러(H형 기준)·777대, B-1 4억 6,400만 달러(B-1B 기준)·100대, ·B-2 7억 3,700만 달러·20대.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뛰니 당연히 조달 수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두 가지 궁금함이 남는다. 새로운 폭격기의 가격은 도대체 얼마나 될지와 미국의 폭격기 운용자들은 아직도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고 생각하는지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일반인의 눈에는 B-29로 보이는 폭격기가 무려 847대 더 있다. 소련이 ‘짝퉁 B-29 폭격기’를 대량 생산했기 때문이다. B-29를 탐냈던 소련은 사할린 등에 불시착한 B-29 폭격기 3대를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과정을 거치며 ‘TU-4’이라는 폭격기를 만들어 1968년까지 운용했다. 소련은 스탈린의 특별 지시로 나사 하나까지 똑같이 복사했으나 화력 제어 장치와 조준기는 끝내 복사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스탈린에게 1953년 Tu-4 10대를 공여받은 중공은 1988년까지 Tu-4를 현역 폭격기로 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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